[살롱] 일상탐독 (35)윤동주/별 헤는 밤오늘은 친구 S의 이야기를 한번 해볼까 합니다.엄밀히 말하면 S가 홀로 지나와야 했던 어떤 특정한 시기,달리 말해 저 같은 철부지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밤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면 될까요.
짐작하건데,윤동주 시인에게는 별 헤는 밤이 있었겠죠.별 하나에 추억과별 하나에 사랑과별 하나에 쓸쓸함과별 하나에 동경과별 하나에 시와별 하나에 어머니를 떠올려 아름다운 시를 썼던 밤이 말이죠.
S에게도 그런 밤이 있었습니다.하지만 그녀가 헤아렸던 것이 결코 별이라고는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S에게 그 밤들은 ‘어서 지나가라, ...김유경 기자 2016-12-05 22:00:00
[살롱] 일상탐독 (34) 박재삼/아득하면 되리라광장으로 나갔다.곧 닥쳐올 겨울을 알리는 가을비가 내린 저녁이었다.다음날 주최 측은 1만, 경찰은 4000이라는 집계를 내놨다.그 숫자엔 분명 내 머리통 하나도 포함되었을 것이다.눅눅한 땅 위에 종이를 깔고 앉았다. 구호도 외쳤다.그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그를 만난 날은 2년 전 2월이다.정확하게는 2014년 2월 28일.지난 신문을 뒤져보고 알았다.역시나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온 날이었는데, 앙상한 나무가 일렬로 늘어선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서사진기자 선배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의 아파트로 올라간 기억이 선연...김유경 기자 2016-11-29 16:23:24
[살롱] 일상탐독 (33) 유희경/한편 그 말을 작정하고 마음에 새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은 지난해 11월 어느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부터 나와 동행하기 시작했고 시간을 거듭할수록 스스로 몸집을 불리고 줄이는 자생력을 지니기 시작했다. 인식의 통제를 벗어나는 일, 무언가를 상상하게 하는 일, 말의 힘은 거기에 있었다.
커피를 마시다 문득 창밖으로 눈을 돌려 분주하게 돌아가는 세상을 엿보거나 신문에서 생판 모르는 이의 불행한 삶의 단면을 예기치 않게 마주하게 되었을 때, 공들여 키운 화초가 꽃봉오리를 피어 올리거나 퇴근...김유경 기자 2016-11-17 15:04:55
[살롱] 일상탐독 (32) 조경란/후후후의 숲 이것은 아주 짧은 이야기예요. 이것은 또한 볼펜 한 자루에 관한 이야기, 달리 말하면 밍크코트 한 벌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아, 어쩌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 그 부질없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네요. 가을비가 내리던 목요일 오후였어요. 민주 씨는 문자 메시지를 하나 받습니다.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로 시작되는 메시지였죠. 보낸 이는 천영호. 그는 민주 씨와 그녀의 남편이 남아프리카로 신혼여행을 갔을 때 가이드를 했던 여행사 사장입니다. 삼십대 중반이라는 엇비슷한 나이에, 엇비슷...김유경 기자 2016-11-08 13:50:35
[살롱] 일상탐독 (31) 박서영/돌의 주파수 다짜고짜 이름이 안 좋다고 했다. '자식을 보게 되면 아들보다는 딸이랑 인연이 있겠고, 재물운은 나쁘지 않으나…'라는 말을 마친 뒤였다. '허어… 어디 가서 물어보면 아가씨 이름 안 좋다는 말 안 하던가?' 남자는 그렇게 혼잣말도 아니고 묻는 말도 아닌 말을 하더니 입을 쩝쩝 다셨다. 푸르죽죽한 입술 사이로 누런 앞니가 얼핏 보였다. '아… 네.' 당황스러워하는 내 앞에 남자는 곰팡내가 풀풀 풍기는 책자를 하나 들이밀었다. 철 지난 등산복 차림에 면도도 하지 않은 남자의 궁핍한 행색처럼, 서향으로 앉아 하루 ...김유경 기자 2016-10-21 15:18:24
[살롱] 일상탐독 (30) 정호승/슬픔이 기쁨에게 S. 너 잘 지내니. 내가 네 이름을 불러보긴 처음인 것 같다. 이렇게 차분히 앉아 네 모습과 표정, 음성을 떠올려보는 것도.
살면서 종종 네 생각을 했다. 차가운 유리창을 스치던 손길, 해질녘 운동장에 서 있던 한 남자아이의 가녀린 뒷모습, 흰 크림이 담뿍 들어있던 고소한 빵과 우유도.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작고 여윈 한 마리 새 같던 너를 치마 자락에 감추고 울먹이던 한 여인, 화장기 없던 그녀의 얼굴. 그 막막했던 표정은 지난 20년 동안 내 뇌리를 떠난 적이 없었다. 그래, 이렇...김유경 기자 2016-09-30 14:25:38
[살롱] 일상탐독 (29) 최승자/개 같은 가을이 바야흐로 가을이군요. 추석연휴는 잘들 보내셨나요. 저는 연휴 끝자락에 아울렛 매장에 들러 트렌치코트를 한 벌 샀습니다. 깃이 넓고 소매통이 좁은 롱코트인데 몸에 착 감기는 느낌이 썩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사들고 밤거리를 타박타박 걸어 집으로 오는 기분이, 참으로 참담했달까요. 어둔 거리에 한참을 서서 구두굽에 바싹 마른 나뭇잎이 가루처럼 바스라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어요. 쇼핑의 기쁨도 무력하게 만드는, 가을은 그런 것인가 봅니다.
이번 가을은 미친듯한 흔들림, 공포, 무력감과 함께...김유경 기자 2016-09-21 10:47:07
[살롱] 일상탐독 (28) 진은영/그 머나먼 K는 중견 예술가다. 나는 그를 몇 년째 알고 지내고 있다. 나는 그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고 그는 나의 글을 높이 산다. 그는 내게 군더더기 없이 신사적이고 나 또한 그를 예술가로서 깎듯이 존중해왔다. 우리는 가끔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신다. 그는 예술 활동의 어려움과 기쁨, 지난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는 조용히 귀 기울여 듣는다. 그와 나는 철저히 개인 대 개인으로, 정서적으로 교류한다.
그러던 어느 날 식사자리에서, K는 조금 쓸쓸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며 이렇게 말했다. 아내...김유경 기자 2016-08-26 16:05:15
[살롱] 일상탐독 (27) 김경미/해명 아, 그 여자요? 첫인상이 그리 따뜻하진 않죠? 살짝 눈 내리깔고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올리거나 멀리 있는 무언가를 무연히 바라볼 때, 특히 옆모습이 쓸쓸하다 못해 차갑다 느껴질 거예요. 사실 그 여자, 손발도 무척이나 차답니다. 그래서 한겨울엔 장갑과 부츠가 필수죠. 그것도 모자라 입과 콧잔등을 푹 덮을 만큼 길고 두터운 머플러도 늘 백에 넣어 다니죠.
여자에겐 스물다섯 먹던 해가 어떤 기점이 된 것 같았습니다. 그 여자가 진짜 아가씨 태가 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그 해...김유경 기자 2016-08-19 14:17:08
[살롱] 일상탐독 (26) 라우라 에스키벨/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먼저 냄비에 물을 끓여 멸치 다시를 낸다. 김치는 쫑쫑 썬 것을 쓴다. 김치 한포기를 4등분해 한 등분만 쓰는 것이 좋다. 김치가 주재료이지만 과하게 들어가면 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쫑쫑' 써는 것이다. 다지는 정도로 잘게 썬 것은 별로다. 아삭하게 씹히는 맛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에 썰어 둔 김치를 넣어 끓인다. 은은한 다시 향이 김치에 배어들도록. 때문에 슬쩍 끓여선 안 된다. 수화기 너머에서 그녀가 말한다. 야야, 니 그거 대충 끓이면 안 된다. 그녀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바글바글' 끓인다.
...김유경 기자 2016-08-12 14:06:03
[살롱] 일상탐독 (25) 이문열/젊은 날의 초상 2001년 그해, 저는 고등학교 1학년생이었습니다. 봄이면 벚꽃이 학교 안팎에 흐드러지고 운동장 한가운데 서면 아름다운 만(灣)이 내려다보이는 공립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풍광들은 저를 끝없이 꿈꾸게 만들었고, 동시에 스스로를 유폐시키도록 만들었죠. 그래서일까요. 부끄럽지만 지금보다 그 시절에 훨씬 다양한 책들을 더 많이, 공들여, 열정적으로 읽었던 것 같아요. 흔히 말하는 문학소녀도 아니었고, 앞으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더더욱 없었지만 저는 학교 도서관에 퍽이나 자주 들락거리던 여학생이었습...김유경 기자 2016-08-04 14:25:37
[살롱] 일상탐독 (24) 하인리히 뵐/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1.글을 시작하기에 앞서,이 글은 지역 언론계에 대한 내부고발이자,지나간 내 과오에 대한 고해성사임을 밝힌다. 2.지난달 중순, 조금 이른 휴가를 다녀왔다.물리적으로 멀리 떠나 있었고, 심정적으로도 떠나 있고 싶었으므로휴대전화는 철저하게 꺼뒀다.그것이 화근이었는지 모른다.아니, 불씨는 아니었으나 불쏘시개였을지 모르겠다.나를 아끼는 회사 선배들과 타언론사 기자들은 번갈아 전화를 넣었을 것이다.문자 메시지도 여러 번 보내보았을 것이다.그러나 나는 응답하지 않았다.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 나에 대한 루머...김유경 기자 2016-07-11 19:04:11
[살롱] 일상탐독 (23) 최영미/서른, 잔치는 끝났다잔치가 끝났다는 걸 안 건 서른 살 먹던 해였다.차려진 음식은 동이 났고, 흐르던 음악은 끝이 났지만,나는 나 자신과 내 주변, 그리고 이 세상과 화해해야할 뭔가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을 알았다.폐허 같은 내 내면에는, 이대로 계속 나아가기엔 턱없이 빈약한 의지와 허술한 논리만이 건재해 있었다.
힘주어 밀면 앞으로 팍 고꾸라질 것만 같은, 참으로 딱한 서른 살 여자.그 당시 내게 필요했던 건 돈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계속 이 삶을 살아가야 할 당위성 같은 거였다.대체 이건 뭐지? 뭘 위해 계속 살아야 하는...김유경 기자 2016-06-10 14:46:26
[살롱] 일상탐독 (22) 유안진/지란지교를 꿈꾸며J!우리가 그렇게 애타게 기다렸던 봄이다.아니지. 어느덧 여름 가까이, 그것도 해가 중천에 뜬 대낮에 가까워지고 있구나.우리가 준비도 없이 맞이한 서른두살의 나날들이 말이야.부옇고 탁하기만 했던 회색은 은은한 파스텔톤으로 변하더니 이제는 온통 상큼한 연둣빛으로 가득하구나.12년 전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도 봄이었잖아.지금보다 훨씬 철이 없었고, 그렇기에 훨씬 신선했고, 때문에 훨씬 혼란스러웠던 봄.
우리는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 걸까.좌절된 꿈을 안고 있다는 걸, 웃고 있지만 사실은 무척 외롭다는 걸...김유경 기자 2016-05-13 14:26:49
[살롱] 일상탐독 (21) 이언 매큐언/체실 비치에서
여기는 체실 비치(Chesil Beach)라고 불리는, 영국 도싯 주(州)에 있는 아름다운 해변입니다. 자잘한 자갈이 깔린 길이 해변을 따라 시원하게 나 있는, 영불해협이 내다보이는 해안이지요. 1960년 7월의 어느 날, 바로 이 체실 비치에서 이야기는 시작되고 또 끝이 납니다. 네. 맞아요. 이 이야기는 단 하룻밤 사이의 이야기, 그러나 두 사람의 평생이 담긴 짧고도 긴 이야기 입니다. 주인공은 젊은 남녀, 그것도 오늘 오후에 막 결혼식을 올리고 체실 비치로 신혼여행을 온 신혼부부입니다. 신랑의 이름은 에드워드 메이휴,...김유경 기자 2016-04-08 14:1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