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말고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 김선우이 집 한 채는쥐들의 밥그릇바퀴벌레들의 밥그릇이 방을 관 삼아 누운오래 전 죽은 자의 밥그릇추억의, 욕창을 앓는 세월의 밥그릇맵고 짠 눈물 찐득찐득 흘려대던병든 복숭아나무의 밥그릇멍든 구름의 밥그릇상처들의,이 집 한 그릇밥그릇 텅텅 비면 배고플까봐그대와 나 밥그릇 속에 눕네그대에게서 아아 세상에서 제...2016-07-28 07:00:00
- 눈 오는 길 - 신대철
막 헤어진 이가야트막한 언덕집처마 밑으로 들어온다.할말을 빠뜨렸다는 듯씩 웃으면서 말한다.눈이 오네요그 한마디 품어 안고유년 시절을 넘어숨차게 올라온 그의 눈빛에눈 오는 길 어른거린다.그 사이 눈 그치고더 할 말이 없어도눈발이 흔들린다.☞ 교복 입고 내려오는 중·고등학교 하굣길을 스쳐갈 때마다, 남...2016-07-21 07:00:00
- 울타리 밖 - 박용래
머리가 마늘쪽같이 생긴 고향의 소녀와한여름을 알몸으로 사는 고향의 소년과같이 낯이 설어도 사랑스러운 들길이 있다.그 길에 아지랑이가 피듯 태양이 타듯제비가 날 듯 길들 따라 물이 흐르듯 그렇게그렇게천연天然히울타리 밖에도 화초를 심는 마을이 있다오래오래 잔광殘光이 눈부신 마을이 있다밤이면 더 많이...2016-07-14 07:00:00
- 라산스카 - 김종삼
바로크시대 음악 들을 때마다팔레스트리나 들을 때마다그 시대 풍경 다가올 때마다하늘나라 다가올 때마다맑은 물가 다가올 때마다라산스카나 지은 죄 많아죽어서도영혼이 없으리☞ 라산스카는 뉴욕 출신의 소프라노 가수, 헐더 라샨스카이다. 김종삼 시인이 편애한 가수인 모양이다. 그의 시집에서 이 여자의 이름이...2016-07-07 07:00:00
- 벨로우니카에게 - 이용악
고향선 월계랑 붉게두 피나보다내사 아무렇게 불러도 즐거운 이름어디서 멎는 것일까달리는 뿔사슴과 말발굽 소리와밤중에 부불을 치어든 새의 무리와슬라브의 딸아 벨로우니카우리 잠깐 자랑과 부끄러움을 잊어버리고달빛 따라 가벼운 구름처럼 일곱 개의 바다를 건너가리고향선 월계랑 붉게두 피나보다내사 아무...2016-06-30 07:00:00
- 성자聖子 - 오삼록
새댁은 지하도의 오후를 내려가다짐을 든 할머니를 도와다시 오른다할머니는 지팡이에 기대어오른 다리로 계단을 오른다짐을 든 손은 엉금엉금 벽을 오르는 담쟁이 같다할머니도 빛났던 한때가있었을 터,빛고운 추억은 조글조글하다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서 있는데마주 오르는 둘은 모녀처럼다정하다새댁은 슬슬 계...2016-06-23 07:00:00
- 추억- 정소란
얼마나 많이 흔들리며비 맞고 올지빗줄기도 미끄러진 길을갈매기 낮게 나는 일에도가슴에 물결이 일고너 오는 동안에는몽혼의 잠에 취해 버리기를문 밖에 바람이 불고눈 밑 서늘히 그늘이 지면네가 내 안에 이미 들어 숨을 쉰다고거들어 들어온 미열의 통증이익숙한 처방을 한다일탈이 필요하다☞‘처녀지’를 사전과...2016-06-16 07:00:00
- 백석 시집에 관한 추억 - 서정춘
아버지는 새봄맞이 남새밭에 똥 찌끌고 있고어머니는 언덕배기 구덩이에 호박씨 놓고 있고땋머리 정순이는 떽키칼 떽키칼로 나물 캐고 있고할머니는 복구를 불러서 손자 놈 똥이나 핥아 먹이고나는 나는몽당손이 몽당손이 이 강산 낙화유수 아재비를 따라백석 시집 얻어 보러 고개를 넘고☞ 마치 시인 백석이 직접 ...2016-06-09 07:00:00
- 남자를 위하여 - 문정희
남자들은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결별한다딸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며신이 나오는 길을 알게 된다아기가 나오는 곳이바로 신이 나오는 곳임을 깨닫고문득 부끄러워 얼굴 붉힌다딸에게 뽀뽀를 하며자신의 수염이 때로 독가시였음도 안다남자들은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비로...2016-06-02 07:00:00
- 남해 금산 - 이성복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남해 금산을 처음 걸어 오른 어느 봄날과 이 시가 담긴 시집이 ...2016-05-26 07:00:00
- 김시습 - 박주택
금오산 갈 때중중한 손으로 내 뺨을 후려쳐나를 남자로 만든 쇠심줄, 아버지뼈를 꺾어 검(劍)을 만들다살을 찢어 초적(草笛)을 만들다등을 꼿꼿이 세우고 폭포수 속(劍)빛 인광을 뿜으며 솔향입을 여시니, 태백의 심줄을 보라 하심이렸다강남역 뉴욕제과 앞장미꽃을 든 여릿한 남자애 귀고리가 가상타불알 없는 놈!☞...2016-05-19 07:00:00
- 목장갑 - 원종태
농사는 절대 짓지마라노가다는 하지마라책상에 앉아 펜대 굴리라면서기라도 되어라 공부해라공사판에 걸린 목장갑이 말을 걸어온다아버지의 빈 도시락에는 늘보름달 빵이 들어있었다참으로 나온 그 빵 속에서토끼새끼는 쿵쿵, 방아 찧고 있다☞ 작업장에서 참으로 나온 빵 하나를 먹지 않고 빈 도시락에 담아 와 아...2016-05-12 07:00:00
- 물맛 - 장석남 물맛을 차차 알아간다영원으로 이어지는맨발인,다 싫고 냉수나 한 사발 마시고 싶은 때잦다오르막 끝나 땀 훔치고 이제내리닫이, 그 언덕 보리밭 바람 같은,손뼉 치며 감탄할 것 없이 그저속에서 훤칠하게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그 걸음걸이내 것으로도 몰래 익혀서...2016-05-05 07:00:00
- 동해 - 이영광
내 여자는 동해 푸른 물과 산다탁류와 해초들이 간간이 모여이룩하는 근해의 평화를 꿈꾸지 않는다저녁마다 아름다운 생식기를 씻어 몸에 담고한층 어렵게 밝아오는 먼 수평선까지 헤엄쳐 나가아침이면 내 여자는 새 바다를 낳는다살을 덜어 나의 아들을 낳는다내가 이 세상의 홀몸을 이기지 못해천리 먼 길 절뚝여 ...2016-04-28 07:00:00
- 책꽂이를 치우며 - 도종환
창 반쯤 가린 책꽂이를 치우니 방 안이 환하다눈앞을 막고 서 있는 지식들을 치우고 나니 마음이 환하다어둔 길 헤쳐 간다고 천만 근 등불을 지고 가는 어리석음이여창 하나 제대로 열어놓아도 하늘 전부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배웠다 하는 사람의 집에 가면 서재가 있다. 서재를 훑어보면 그 사람의 지적 편력을 ...2016-04-21 07: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