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먼 왕십리- 권달웅
1964년 초겨울 역마다 서는 완행열차는 경상북도 봉화에서 청량리까지 아홉 시간이나 걸렸다. 어머니가 고추장항아리 쌀 한 말을 이고 내린 보퉁이에는 큰 장닭 한 마리가 대가리를 내밀고 있었다.나는 어머니와 이십오 원 하는 전차를 탔다. 사람들은 맨드라미처럼 새빨간 닭 볏을 신기한 듯 들여다보았다. 나는 ...2015-09-10 07:00:00
- 아버지의 짐- 김혜연
젖병 물리면서 다 크도록 키운 개가 없어졌다도둑으로부터 주인 집 지켜내야 했던버겁고 힘든 시간 가볍게 털어버리고복날 하루 앞둔 저녁 무렵짖지도 않고 사라졌다도둑맞아 벌써 어느 놈 뱃속에 들어갔는지혀 끌끌 차며 대문 밖 나가시다 하는 아버지의 혼잣말그 놈 제 발로 걸어 나갔다면 잘 나갔다버리지 못하...2015-09-03 07:00:00
- 추석 무렵- 성선경
들판의 벼 이삭들이 칙칙 밥 익는 냄새를 풍길 때가을, 달의 늑골 사이에도 살찌는 소리가 들립니다.책장과 책장 사이구와 절 사이지난여름 내내 압핀에 꽂혀 있던검은 귀뚜라미들도 귀향 귀향문득 잠에서 깬 듯 웁니다.나는 그만 단풍 같은 책장 덮고 어머니 하고 불러 봅니다.칙칙 김을 내뿜는 압력밥솥같이 둥그...2015-08-27 07:00:00
- 자존- 윤효
무서리 하늘 높이 기러기 행렬이 지나고 있었습니다.때마침 헬기가 굉음을 내며 스쳐갔으나, 그 대오를 전혀 흐트러뜨리지 않았습니다.☞ 겨울을 찾아 나고 드는 철새의 행렬과 괴력에 가까운 힘을 가진 헬기의 비행이 서로 방해가 되지 않는 상태. 여기서 ‘그 대오를 전혀 흐트러뜨리지 않’은 주체는 기러기 자신들...2015-08-20 07:00:00
- 동질(同質)- 조은
이른 아침 문자 메시지가 온다- 나 지금 입사시험 보러 가. 잘 보라고 해줘. 너의 그 말이 필요해.모르는 사람이다다시 봐도 모르는 사람이다메시지를 삭제하려는 순간지하철 안에서 전화를 밧줄처럼 잡고 있는추레한 젊은이가 보인다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그때 나는 잡을 것이 없었고잡고 싶은 것도 없었다그 긴장...2015-08-13 07:00:00
- 가족- 윤제림
새로 담근 김치를 들고 아버지가 오셨다.눈에 익은 양복을 걸치셨다.내 옷이다, 한 번 입은 건데 아범은 잘 안 입는다며아내가 드린 모양이다.아들아이가 학원에 간다며 인사를 한다.눈에 익은 셔츠를 걸쳤다.내 옷이다, 한 번 입고 어제 벗어놓은 건데빨랫줄에서 걷어 입은 모양이다.☞‘가족’이란 무엇일까요? ‘인생...2015-08-06 07:00:00
- 민지의 꽃- 정희성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다섯 살배기 딸 민지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2015-07-30 07:00:00
- 그늘- 김기만
뜨거워야 그늘이 생긴다한낮의 나무들 푸른 잎사귀햇살 쏘이며 반짝반짝 춤춘다눈 찌푸리던 내가 부끄럽다누군가의 그늘에서 땀을 말리며나는 시원하게 웃었을 것이다누군가의 눈물 위에 누워휘파람도 불었을 것이다삶의 무게로 힘들 때그만큼 가벼워지는 것들시소에 앉아 힘줄 때반대편에서 만났을아이들 눈 속의...2015-07-23 07:00:00
- 그리운 나무- 정희성
나무는 그리워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애틋한 그 마음 가지로 벋어멀리서 사모하는 나무를 가리키는 기라사랑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나무는 저리도 속절없이 꽃이 피고벌 나비 불러 그 맘 대신 전하는 기라아아, 나무는 그리운 나무가 있어 바람이 불고바람 불어 그 향기 실어 날려 보내는 기라☞ 그리움이 ...2015-07-16 07:00:00
- 코치의 말- 김제현
‘어깨의 힘을 빼라’홈런을 치려거든목에 든 힘을 빼라출세를 하려거든참으로 아름다워지려거든온몸의 힘을 빼라.☞ “어깨에 힘을 빼!” 야구 코치의 한마디가 시인에게 ‘힘을 빼는 일’에 대한 통찰을 환기합니다. 그렇습니다, 한 타임의 경기에 이기기 위해서도 어깨의 힘을 빼야 하는데 출세라는 난코스, 인생이라는...2015-07-09 07:00:00
- 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2015-07-02 07:00:00
- 유등- 강희근
내 몸에 글을 써다오나는 흐르고 흐른 뒤 기슭이나 언덕어디 햇빛어디 구름들 아래 이그러지다가생을 마치리라글을 써다오생이라면 글줄이 있어서, 먹물 같은캄캄함이 있어서택배로 사는 노동을 다하다가마감 날 떳떳이 지리라여인이 있다면 여인의 눈썹으로 뜨는 글수자리로 가는 남자 있다면 남자의 태극기로 펄...2015-06-25 07:00:00
- 사람과 개- 김용화
이삿짐이 떠나고강아지 한 마리버려진 가구 곁에오도마니앉아 있었다다음날도다다음날도앉아 있었다발자국 소리날 때마다번쩍,머리를 쳐들었다눈이 오고 있었다☞ 가구를 버리듯이 강아지를 버린 사람과, 주인의 체취가 밴 가구를 지키며 철석같이 주인이 돌아올 것을 믿는 개. 사람답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시 속의...2015-06-18 07:00:00
- 한 줄의 역경(易經)- 강영은
버들다리 아래 흰뺨검둥오리 한 가족이 나들이 나왔다엄마 오리, 구름 한 조각 내려앉은 상류로 상류로 헤엄쳐 간다엄마는 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걸까, 갸우뚱거리는 아기 오리들엄마가 내려 보내는 물결을 부지런히 베껴 쓴다세상은 아래로만 흐르는 게 아니란다, 때로는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거란다,한강으...2015-06-11 07:00:00
- 닭서리- 강경주
뒷날 아침 엄니는 욕지거리를 퍼부었다염병에 코 박고 죽을 개뼉따구 같은 놈덜잡히기만 해봐라 그냥 뼉따구를 확 뿐질러 뿔겨, 모가지를 홱 비틀어 뿔겨닭뼈가 배때지를 뚫고 나와 콱 뒈져뿌릴 놈덜그날은 하루종일 가슴이 찔끔거리고닭뼈가 배때지를 뚫고 나오는 것만 같았다☞ 간밤 닭서리의 범인이 설마 아들이...2015-06-04 07: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