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일곱 살쯤(김승희의 ‘새벽밥’에 기대어)- 강현덕별이 밥이던 시절밥이 별이던 시절낮은 지붕 위로 퐁퐁 솟아나던밤하늘 가득 담기던主食이던 그 시절새벽녘 내 눈물 노린 몇 줄의 문장들이위로 위로 솟구쳐 거기 또 담기던그러면 허겁지겁 퍼먹고 대문을 나서던-시집 ‘안개는 그 상점 안에서 흘러나왔다’☞ 별을 밥 먹듯이 밥을 별 보듯이 지낸 시절, 배고픈 밤하늘에 ...2012-04-05 01:00:00
- 아지랑이- 조오현나아갈 길이 없다 물러설 길도 없다둘러봐야 사방은 허공 끝없는 낭떠러지우습다내 평생 헤매어 찾아온 곳이 절벽이라니끝내 삶도 죽음도 내던져야 할 이 절벽에마냥 어지러이 떠다니는 아지랑이들우습다내 평생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 시집 <아득한 성자>에서 ☞ 봄날, 아지랑이는 긴 겨울을 ...2012-03-29 01:00:00
- ‘ㄹ’자- 이은상평생을 배우고도 미처 다 못 배워인제사 여기와서ㄹ(리을)자를 배웁니다ㄹ(리을)자 받침 든 세글자자꾸 읽어 봅니다제‘말’을 지키려다제‘글’을 지키려다제‘얼’을 붙안고 차마 놓지 못하다가끌려와ㄹ(리을)자같이 꼬부리고 앉았소.- 이은상 ‘‘ㄹ’자’ 전문. <노산시조선집>☞ 숨 막히는 밀서를 읽듯 행간을 짚어봅니...2012-03-22 01:00:00
- 근황- 김상옥근황여윈 숲마른 가지 끝에죽지 접는 작은 새처럼,물에 뜬젖빛 구름물살에 밀린 가랑잎처럼,겨울 해종종걸음도창살에 지는 그림자처럼.-김상옥 ‘근황’ 전문, 시집 <촉촉한 눈길> ☞ 그대 근황은 어떠하신지요? 어깨 죽지 접은 새처럼 마른 가지 끝에 서 계시지 않은가요? 늘 위태롭기만 한 우리네 삶, 무겁게 내려...2012-03-15 01:00:00
- 喪家에 모인 구두들- 유홍준저녁 喪家에 구두들이 모인다아무리 단정히 벗어놓아도문상을 하고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젠장, 구두가 구두를짓밟는 게 삶이다밟히지 않는 건 亡者의 신발뿐이다정리가 되지 않는 喪家의 구두들이여저건 네 구두고저건 네 슬리퍼야돼지고기 삶는 마당가에어울리지 않는 화환 몇 개 세워놓고봉투 받아라 봉투,화투짝...2012-03-08 01:00:00
- 소원- 고은제주도 삼년생 똥도야지가 똥 먹고 나서 보는 멍한 하늘을 보고 싶으오두어달 난앞집 얼룩강아지 새끼의 빠끔한 눈으로어쩌다 날 저문 초생달을 보고 싶으오지지난 가슬 끝자락 추운 밤 하나다 샌 먼동 때뒤늦어 가는 기러기의 누구로저기네저기네내려다보는 저 아래 희뿜한 잠 못 잔 강물을 보고 싶으오그도 저도 아니...2012-02-23 01:00:00
- 반성 673- 김영승우리 식구들 우연히 밖에서 만나면서럽다어머니를 보면, 형을 보면밍키를 보면서럽다.밖에서 보면버스간에서, 버스 정류장에서병원에서, 경찰서에서……연기 피어오르는동네 쓰레기통 옆에서. ☞ 나도 누군가에게 ‘우리 식구를 우연히 밖에서 만나면/서럽다’고 했더니 그 말뜻을 잘 못 알아듣더군요. 다들 잘 먹고 잘 사나...2012-02-16 01:00:00
- 11층- 최석균밀리다보니 벼랑베란다라고 불러야 하나대청마루쯤으로 여기고바깥 구경을 하며 바람을 쐰다물을 정수기에 걸러 마시듯이바람도 온전한 바람이 아니고방충망과 정화기로 거름 바람이다어쩌다가 물과 바람마저걸러서 들이켜는 길까지 왔을까겁도 없이 저녁마다 올라와아침마다 뛰어내리는아찔한 벼랑☞ 이 도시의 곳곳에 ...2012-02-09 01:00:00
- 대보름- 송창우일곱물뭍 간 누이는동지섣달에도 오지 않았다어머니는 부뚜막에 앉아흉이라 업이라생손을 앓는 저녁쇠똥 숯불 휘날리며막배 떠난 선창가 헤매 다녔다고향 가는 길이다동구 밖 돌아가는 갈대숲오늘은 내가어머니 간을 빼러 간다갈잎들흔들리고 있구나떨고 있구나☞ 돌아오는 월요일은 정월 대보름입니다. 제 직장이 있는 ...2012-02-02 01:00:00
- 신발- 이기인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얘야, 돈벌레는 잡지 마라 돈벌레는 돈을 갖다주는 벌레란다물을 먹은 벽지가 힘없이 떨어지던 날옛날 집주인의 벽지에서 연꽃이 한 송이 주욱 벌어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움찔움찔, 기어나온 돈벌레꽃잎 속에 숨어 있는 돈벌레, 요놈을 어찌할까요, 어머니발바닥도 많은 놈이, 어이어이 도망쳐야 ...2012-01-26 01:00:00
- 마징가 계보학- 권혁웅1. 마징가 Z기운 센 천하장사가 우리 옆집에 살았다 밤만 되면 갈지자로 걸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고철을 수집하는 사람이었지만 고철보다는 진로를 더 많이 모았다 아내가 밤마다 우리 집에 도망을 왔는데, 새벽이 되면 계란 프라이를 만들어 돌아가곤 했다 그는 무쇠로 만든 사람, 지칠 줄 모르고 그릇과 프라...2012-01-19 01:00:00
- 밥의 도덕성- 김 륭밥이 온다 하루도 빠짐없이 꼬박꼬박밥그릇 가지고 공갈치지 말라고 퉁퉁 불어터지는 짜장면과 짬뽕의 자유분방한 슬픔에 대해 짜장면을 시키면 짬뽕이 먹고 싶고 짬뽕을 시키면 짜장면이 먹고 싶은 거짓 없는 사랑에 대해 질질 침 흘리지 말라며쥐뿔도 개뿔도 없이 방귀뀌지 말라고 가끔씩 프라이팬을 들고 설친다고급...2012-01-12 01:00:00
- 새들의 페루- 신용목새의 둥지에는 지붕이 없다죽지에 부리를 묻고 폭우를 받아내는 고독, 젖었다 마르는 깃털의 고요가 날개를 키웠으리라 그리고 순간은 운명을 업고 온다도심 복판,느닷없이 솟구쳐오르는 검은 봉지를꽉 물고 놓지 않는바람의 위턱과 아래턱,풍치의 자국으로 박힌 공중의 검은 과녁, 중심은 어디에나 열려 있다 둥지를 ...2012-01-05 01:00:00
- 겨울 강가에서- 안도현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강은,안타까웠던 것이다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몸을 바꿔 흐르려고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그런 줄도 모르고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강은,어젯밤부터눈을 제 ...2011-12-29 01:00:00
- 계단이 존재하는 곳- 이수명계단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계단을 생략하고 계단을 끌어내리고 아이들이 놀고 있다.계단이 존재할 곳은 어디인가계단끼리 부딪쳐 구부러지는 것이 즐겁기만 하다. 굽은 표면 위에서 구부러지는 아이들.아이들의 불가능한 배열로 계단은 공평해지고누구의 입김이 와서 그을음이 이토록 연약하게 걸려있기에 아이들이...2011-12-22 01: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