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청소부에게 - 강호인
지평선 맞닿은 하늘 질펀한 노을이나술 취한 바람결이 흩고 가는 노란은행잎언제나그런 서정만그대 몫이 되게 할까형체 없는 그림자야 미리 쓸지 못하지만노동의 신성함을 온몸으로 증명하는그대의 빗자루 끝에다놓고 싶은 이 시대…….사랑의 보습 꽂고 꿈밭 가는 이웃 속엔생선살에 뿌려지는 소금 같은 약속이 있듯...2017-11-16 07:00:00
유모차 - 김연동 붉게 물든 서편 하늘 노을이 타는 길로폐지 실은 유모차에 할머니가 끌려간다구겨진 신문지처럼휜 삶도 접어 얹고,황혼을 높이 나는 꿈꾸는 새가 되어마지막 일력까지 태우고 싶다지만,적멸에 이르는 길섶산그늘이 짙어온다☞한 편의 문학 작품을 통하여 감동(희로애락을 포함한)을 하거나 피하고 싶은 현상을 마주치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후자에 속하고 있습니다. 유아들의 전유물인 유모차에 폐지를 실은 할머니의 휜 허리처럼, 구겨진 신문지처럼, 휘어진 삶도 접어 얹은 할머니가 끌려가다시피 가고 있다니. 시인은 궁핍한 삶을 ...기자명 기자 2017-11-09 07:00:00- 저문 가을, 은행나무 - 옥영숙
그곳은 지상에서 가장 오래된 선방으로피붙이 하나 없고 집 없는 노후도뜻 모를 도시의 소음도화두로 삼는다틈틈이 법문 듣고 참선하는 눈빛들바람 잦으면 죽비소리 하늘을 흔들고얼마나 큰 형벌인지황등을 밝혀 든다난해한 잡념으로 뒤척이는 가지마다육신의 때를 벗는 씨알 같은 땀방울은선승(禪僧)의 깨달음일까...2017-11-02 07:00:00
- 가을 산 - 김진희
마른 추억 검불 되어 활활 타는 불이다가슴 깊이 묻어 둔 심지 휘이익 당기면불두덩 달아오르는내 안의 야생마여온 산야 헉헉대며 무법천지 내달리는짐승들 이글거리는 눈포효하는 소리, 소리불타는 한 생애의 꿈불불불☞ 일반적으로 시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선험적인 고시조부터 시인지 시조인지를 분간하기 어려...2017-10-26 07:00:00
가을편지 - 서일옥
그대에게 가는 길멀고도 너무 멀어노오란 꽃잎 한 장강물에 띄웁니다혹여나 가슴에 닿아꽃이 되어 피라고무너져 내려 앉던그 날의 시간 위에마음 앞서 밀려오는그리움을 적습니다사랑이 불꽃으로 피는이 가을을 적습니다☞ 가을 서정이 가득 들어있는 시조입니다. 게다가 시인의 서정까지 품은 이 작품은 낭만적이기까지 합니다. 왜 가을이면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강렬해지는 것일까요? 그것들을 치유하느라 그리움이란 그리움을 죄다 불러내어 가을편지를 쓰게 되는지요? 가을을 맞이한 그대도 그러할 테지요? 대중가요 ‘가을엔 ...2017-10-19 07:00:00
가을 의자 - 김복근 여태껏걸었으니여기 좀 앉아 봐라내려오는 길, 가늘게 비가 내리는데,그립다 말도 못하고 눈물은 고이는데,☞ 한 편의 시조를 통하여 가을을 만납니다. 더욱이 제목대로, 시인이 이끄는 의자에 앉고 싶어졌습니다. 그것도 가을이란 의자에 말입니다.작품은 첫머리인 4음보로 구성된 초장부터 무작정 말을 건넵니다. 하지만 그냥 던지는 말 붙이기 아닙니다. 머리, 꼬리 다 뗀 말이지만, 고단한 삶을 살아온 우리에게 ‘내, 너 마음 다 안다’식의 한없이 다정하기만 합니다. 그리고는 한 박자 쉼을 주면서도 주절거리지 않고 중장, 종장...2017-10-12 07:00:00
구절초 2 - 김정희
사람아먼 사람아엇갈린 길목에서봄여름 기다려도돌아오지 않더니이 가을 풀 초롱 들고어느 결에 왔느냐☞ 구절초를 사람에게 잇대고 있다니. 그것도 늘 엇갈린 ‘먼 사람’에게로. 봄여름을 내내 기다렸건만 돌아오지 않더니 이 가을에 풀 초롱을 들고 왔다고 한다. 이 얼마나 지극한 기다림과 섬세함이 묻어 있는가? 스쳐 오가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먼 사람을 끝없이 기다릴 줄 아는 시인의 다함없는 마음이 전해져 온다. 구절초는 쑥부쟁이와 비슷한 꽃 모양이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피는 시기도 비슷하여 혼동하는 경우...정민주 기자 2017-09-28 07:00:00
지금, 남천南川은- 김만수
푸른 하늘 흰 구름이고도 젖는남천졸졸졸그 소리 않고세월은 흘러가는어쩌랴,한 시대 돌아그 이름 지우고 있다*남천 : 창원공단으로 흐르는 개천☞ 주거지역과 공단지역이 분리되어 있어 계획도시라 일컬어지는 창원시, 이전에는 남천이 흐르고 논밭이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창원을 기억하고, 남천을 알고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시인은 그래도 남천을 기억하고 이렇게 작품 속에다 들앉혀 놓고 있다.남천은 말 그대로 남쪽으로 흘러가는 물길이다. 남천은 맑기가 그지없다. ‘푸른 하늘 흰 구름 이고’ 있다고 하였으니. ...2017-09-21 07:00:00
양귀비 - 공영해 비린 생 핏빛 유혹 지체 놓은 귀비貴妃라 해도할머닌 피는 족족 꽃잎을 따버렸다떼어야 정을 떼어야 잡초로나 산다시며밤마다 뼈를 갉는 송곳 아픔 생각하면거두어 베갯머리 약으로나마 묻어두고넉 잠 든 누에들처럼 깊은 잠을 청할 텐데고단한 삶의 고비 잠시 헛디딘 생각고개 든 자존으로 꽃 대궁도 불 지르며마성의 붉은 입맞춤 할머니는 등 돌렸다☞ 이 작품의 소재가 된 양귀비는 5~6월 사이에 전국 각지에서 한해살이 또는 두해살이로 자라는 식물이다. ‘날것 또는 햇볕에 말려 사용하는데 많이 쓰면 몸에 해로운 약재’라고도 ...2017-09-14 07:00:00
[시가 있는 간이역]대 - 김교한 맑은 바람 소리 푸르게 물들이며어두운 밤 빈 낮에도 갖은 유혹 뿌리쳤다미덥다 층층이 품은 봉서 누설 않는 한평생☞ 시인의 일생이 고스란히 들어있음으로 감히 읽혀졌습니다. 이 시조에 나오는 ‘미더운 대나무의 한평생처럼’. 그렇습니다. 시와 사람이 함께 가는 작품을 쓰기란 어떤 경지에 이르러야 하며, 얼마만 한 깊이가 있어야 할지, 어중간한 이력으로는 아무리 짐작해도 도무지 아득하기만 합니다. 시인은 젊은 시절부터 시작된 교사로서의 삶과 시조시인으로서의 한결같음이 작품 속에 그대로 녹아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2017-09-07 07:00:00
남강의 가인들이여 - 이처기 강물에 흘러가는 건 유등불만 아니다낭창낭창 남인수 노래 밤물 젖어 흐르고이봉조 색소폰 울림도 우수에 젖어 간다강물 잠겨 우는 건 호국사 종만 아니다이재호 오선지가 떠오르다 잠기더니목풍금 두드리면서 정민섭도 울며 간다☞ ‘애수의 소야곡’, ‘가거라 삼팔선’, ‘이별의 부산 정거장’, ‘나그네 설움’, ‘불효자는 웁니다’, ‘경상도 아가씨’, ‘산장의 여인’, ‘대머리 총각’, ‘육군 김 일병’ 등등의 노래는 그때 그 시절마다 삶의 애환을 어루만져주었지요. 남강에다 탯줄을 대거나 기댄 진주의 가인들이 있어 지금도 어딘가에서 ...2017-08-24 07:00:00- 차표를 끊어 드리고 - 김우태
물레를 돌리는가 싶으면어느새 빨래를 두드리고방아를 찧나 싶으면 깻단을 틀고밭 매는가 싶으면 마늘종 뽑고나무하는가 싶으면어느새 저녁 다 지어놓으시더니손발이 너무 빨라늙기도 저리 빠르셨나!집에 가고 있다고 전화라도 할라치면찬찬히 오라고 몇 번씩 다짐받고는정작 상 차려놓고 동구 밖 기다리던 사람어...2017-08-10 07:00:00
- 자전거 도둑 - 눈의 창고 김승강
그가 내 앞을 지나가면서눈으로 내 자전거를 훔쳐갔다도둑은 도둑을 알아보는 법이다나는 첫눈에 그가 자전거 도둑인 걸 알아봤다나는 그동안 많은 자전거를 훔쳤다내가 훔친 자전거들은내 눈의 창고에 쌓여있다그가 내 자전거를 훔쳐갔지만내가 훔친 자전거의 주인들이 나에게 그랬듯이나는 그를 용서할 수밖에 없...2017-08-03 07:00:00
비 오는 날 - 김용복
우산이 없는 나는구부린 허리로처마 밑을기웃거리는데길섶의 은행나무는의연毅然한 자세로비를 맞는다시련 앞에초연超然한 나무 곁에서부끄럽다나의작은 가슴이 ☞ 장마로 인한 피해가 있었으나 지금은 매일 비가 왔으면 할 정도로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오늘의 시는 제목도, 내용도, 비가 내릴 때의 정경도, 나아가 시인의 심상까지도 군말 없이 아주 단순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치열한 삶을 살아왔음을 3연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 여러 세월을 거쳤기에 이제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는...2017-07-27 07:00:00
시집 - 이우걸
시집이란 한 시인의 울음이 사는 집이다슬프게 울거나 기쁘게 울거나우리는 그 울음소릴 노래처럼 읽곤 하지만가슴에 품어보면 한없이 정겹고떼어놓고 바라보면 어쩐지 짠해 오는불면의 밤이 두고 간아 뜨거운 문장들☞ 새소리를 두고 서양에서는 노랫소리로, 우리나라에선 울음소리로 표현한다고 합니다. 이를 일러 한이 많은 정서를 가진 민족이기 때문이랍니다. 위의 작품을 대하면서 왜 새소리를 떠올렸을지 하고서 잠시 의아했지만, 아마도 시인은 정서적으로 한이 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나 봅니다. 시인은 평소에도...2017-07-20 07: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