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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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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통영서 유소년 축구선수 가르치는 김호 전 국가대표팀 감독

돌아온 왕년의 축구스타
고향 꿈나무에 ‘열정 패스’

  • 기사입력 : 2011-09-20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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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축구인생이 고향 통영에서 시작된 만큼 고향 후배들에게 노력하는 축구, 기술의 축구를 가르치고 싶습니다.”

    통영이 낳은 훌륭한 축구인 가운데 대한민국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명수비수 김호(66) 전 국가대표 선수.

    그가 고향 축구후배들을 위해 귀향한 지 2년이 흐른 지금 통영유소년축구클럽은 물론 통영중학교, 통영고등학교 축구팀의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다. 현재 경남리그 2위인 통영중학교와 3위인 통영고등학교는 이번 가을 전국대회를 앞두고 훈련에 여념이 없다.

    지난달 31일 오전 6시 통영시 봉평동 통영중학교 운동장에는 백발을 휘날리는 노신사가 젊은이 못지않게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었다. 미국월드컵대표팀 감독을 역임하고,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1995~2003) 시절 13차례 우승의 금자탑을 세운 ‘축구계의 야인’ 김호 감독이 지난 2009년 6월 대전시티즌 감독을 끝으로 고향 통영으로 귀향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고향 통영으로 귀향

    김 감독은 대전시티즌 감독을 끝으로, 가족들을 서울에 남겨놓고 홀로 귀향해 통영유소년축구클럽 총감독을 맡고 있다.

    김 감독은 2009년 2월 12일 통영고등학교 명예졸업장을 같이 받은 진의장 전 통영시장과 의기투합,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학생들을 위해’ 통영유소년축구클럽을 창단하고 총감독을 맡았다.

    김 감독은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유소년축구 꿈나무들과 함께한다. 유소년들에게는 기술훈련보다는 공을 다루는 기초훈련과 체력향상 훈련에 중점을 둔다. 물론 축구인, 나아가 사회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도덕성과 협동심도 가르친다.

    매주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오전 5시부터 7시까지 통영중학교 운동장에서 통영중학교와 통영고등학교 선수들을 대상으로 전술훈련을 한다.

    김 감독은 “이기는 축구를 하기 위해서는 남보다 3배 많이 노력해야 한다. 기술축구를 하려면 시야를 넓히고 상대가 어떤 행동으로 나올지 염두에 두고 킥이나 패스를 해야 한다”고 선수들에게 강조한다.

    “유명한 선수는 그냥 되는 게 아니다. 남이 놀 때 같이 놀면 절대로 이길 수 없다. 하루 이틀의 노력이 나중에 큰 변화를 나타낸다. 통영축구의 이름이 알려질 때 지금 노력하는 축구 꿈나무의 이름도 자연스레 알려지게 된다”고 주문한다.

    “아니야, 축구도 농구같이 섬세하게 해야 돼. 길게 패스할 것인지 상대 수비나 공격수를 보면서 해야지.” 이따금씩 킥이나 패스를 잘못하는 선수들을 직접 불러 편안한 동네 할아버지같이 지적하고 있었다.

    오후에는 종합전술훈련을 하고 야간에는 개인 기술훈련에 치중한다. 이 훈련에는 ‘김호 사단’의 이기범 전 국가대표선수가 통영중·고교 감독들과 함께 땀을 흘리고 있다.

    현재 김호 감독이 가르치는 학생들은 통영유소년축구클럽 소속의 학생들과 무료지도를 받는 선수들까지 500여 명에 달한다.


    ▲화려한 축구인생 뒤의 훌륭한 스승

    김 감독은 두룡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으로 축구를 시작했다. 키도 크고 육상선수를 할 정도로 운동에 대한 재능이 있었다. 초등학교와 통영중학교에서는 센터포워드로 활동했고 성적도 좋았다. 그러나 통영에는 고등학교 축구팀이 없었다. 물론 객지로 나갈 수 있었지만 여러 가지 형편이 여의치 않아 축구부가 없는 통영고등학교로 진학한다. 하지만 초·중학교 시절 잡음 섞인 라디오 방송을 통해 흘러나오는 국가대표팀과 외국 대표팀간의 경기를 어른들 틈에서 귀를 세우고 들으면서 가슴속에 키운 국가대표선수의 꿈을 접을 수 없었다.

    통영고등학교 1학년 때 동래고등학교 출신으로 통영지역 축구발전에 공헌해 온 김영기(1990년 작고)씨의 노력으로 김 감독은 동래고등학교로 전학하게 된다.

    김 감독은 동래고등학교에 전학한 이후 축구인생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온다. 당시 동래고등학교 감독인 안종수(1977년 작고) 전 국가대표선수를 만났고, 안 감독과의 만남을 통해 포지션이 센터포워드에서 오른쪽 풀백으로 바뀌게 된다. 해병대 제대 이후 제일모직에서 본격적인 축구수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도 안 감독이었다.

    안 감독의 지도를 받은 김 감독은 1965년 국가대표선수로 발탁됐으며 이후 부동의 오른쪽 풀백으로 9년 동안 태극마크를 달았다. 김 감독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하얀목련’이다. 스승이 보고 싶고 아른거릴 때 하얀목련을 부른다.





    김호 전 국가대표팀 감독이 통영중학교에서 축구를 가르치고 있다.



    ▲기술축구로 프로축구 최다우승 감독 우뚝

    김 감독은 아마추어 시절은 물론 프로축구 무대에 있을 때 따라다니는 닉네임이 많았다. 고졸 감독, 만년 야당, 아마추어 최다우승 감독(9차례), 프로축구 최다우승 감독(13차례), K리그 최다승 감독(188승) 등이 그것이다. 만년야당은 대한민국 축구발전을 위한 대쪽 같은 직언을 아끼지 않은 탓에 붙은 별명.

    그의 성공에는 특별한 비결이 있을까? 국가대표선수 시절 일본 공격수의 발을 묶으려고 철저한 준비와 노력을 한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나머지는 무엇일까?

    김 감독은 독일 유학시절 기술축구를 배웠다. 차범근 선수가 독일에서 활약할 당시였다. 우리나라는 체력우선주의가 지배할 때였다. 김 감독은 “독일은 기술부터 가르치는 것을 보고 내가 배웠던 낡은 축구를 후배들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각오로 축구화를 도끼로 잘랐다”고 했다.

    그는 “현재 한국축구로는 일본을 절대 이길 수 없다”며 “지도자부터 아이들에게 기술축구를 가르쳐야 하는데 여전히 체력만 강조하고 있다”고 했다. 또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공간축구 개념을 도입했다. 미드필더 간격을 좁히고 허리에서부터 상대를 조여가는 압박축구가 그것이다. 1994년 미국월드컵 당시 처음으로 공간축구를 구사했다. 당시에는 좋은 성적(2무1패)은 아니였지만 이후 공간축구가 우리나라 축구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영원한 축구인으로 남고 싶다

    ‘항상 희생하는 자세로 살자’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김 감독은 요즘도 틈나면 K리그를 자주 본다. 지난번 일본에서 열린 한·일전도 참관했다. 승부의 세계는 떠났지만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서는 노력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할 각오이다.

    그 길은 여러가지 있겠지만 “언제나 포근하고 꿈을 주는 아름다운 고향 통영에서 후배들을 지도하는 것도 한 길”임을 잊지 않고 있다.

    그는 “축구와의 끈을 어찌 놓을 수 있겠냐”며 “좋은 팀과 선수가 있으려면 좋은 지도자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이 일을 하고 싶다”며 웃어 보였다.




    ☞김호 감독= 1944년 11월 24일 통영에서 태어났다. 두룡초등학교, 통영중학교, 통영고등학교 1년 중퇴, 동래고등학교 졸업. 키 177㎝, 몸무게 80㎏, 부인 최영숙씨와 2남 △선수 경력 = 제일모직(1964~68년) △국가대표(65~73년) △지도자 경력=동래고 감독(75년), 한일은행 감독(83~87년), 현대 호랑이축구단 감독(88~91년), 미국월드컵대표팀 감독(92~94년), 수원삼성 블루윙즈 감독(95~2003년), 대전시티즌 감독(2007~2009년) △수상=국민훈장 석류장. 98~99 한국프로축구 감독상. AFC선정 이달의 감독상(97년 8월, 99년 8월)


    글·사진=신정철기자 sinjch@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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