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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7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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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대한민국 명장 박기열(두산중공업 터빈생산기술팀 직장)

“땀냄새 밴 현장은 내 삶터… 나는 기능인이다”

  • 기사입력 : 2011-09-27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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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기열 직장이 두산중공업 터빈공장에서 신고리원자력발전소에 들어갈 로터 샤프트를 살펴보고 있다.
     
     

    대한민국 발전의 원동력인 기능과 기능인들이 홀대받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꿋꿋이 기능인으로서 외길을 걸었고, 대한민국 명장에까지 오른 이가 있다.

    바로 두산중공업 터빈생산기술팀에서 직장을 맡고 있는 박기열(56) 명장이다.



    개발의 달인

    취재하면서 만난 박기열 명장에게는 ‘개발의 달인’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싶다.

    세계 최대 담수화설비와 원자로 등 최첨단 설비를 생산하는 두산중공업에서도 그는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증기발생기 가공공법과 프로그램 개발에 참여하면서 세계 최고 담수설비 부품의 국산화에 기여했다. 원자로 내부 구조물을 국산화시키는 데도 일조했다. 박기열 직장은 발전기 로터 국산화 담당자였다.

    컴퓨터를 이용한 제조방식인 CAM(computer aided manufacturing) 시스템에서 필수인 포스트 프로세서(POST PROCESSOR)를 자체개발해 5억원의 비용을 절감하기도 했다.

    프로그램 개발 이후 동의공업대학 박상봉 교수와 함께 ‘최신 CAD/CAM 시스템’을 출간했다. 고졸 생산직인 그가 함께 만든 이 책은 대학 교재로 채택돼 화제가 됐다. 월간 ‘프레스’ 기술지에 3년간 CAM 이론과 실무에 대해 연재를 하기도 했다.



    박 직장이 오퍼레이션 패널을 점검하고 있다.



    광양 소년, 서울을 꿈꾸다

    박기열 직장의 고향은 전라남도 광양. 지금은 발전했지만, 그가 살았던 곳은 당시 벽촌이었다.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셨고, 둘째아들인 그에게도 농사꾼의 길밖에는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했는데 집이 가난하니 더 이상의 진학은 포기하라고 하셨죠. 일주일 정도 고등학교에 보내 달라고 시위 아닌 시위를 했습니다.”

    아버지가 내놓은 타협안은 농고였다. 어차피 농사를 지을 테니 농업기술을 배우라는 것이었다. 그는 순천에 있는 공고에 진학하길 원했다. 그중에서도 기계과를 지원하고자 했다. 다시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친척 어른의 도움으로 순천공고에 갈 수 있었다. 졸업 후에는 서울에 있는 동양기계라는 회사에 들어갔다.

    “기계과에 가서 기술을 배우면 평생 배 곯지 않겠다 싶어 지원했죠. 그리고 큰물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서울로 갔습니다.”



    31년 외길의 시작

    첫 직장은 병역특례업체여서 그곳에서 8년을 다녔다. 그러나 회사가 창원으로 옮기면서 그도 따라왔고, 자연스레 창원에 정착하게 됐다. 그리고 두산중공업(당시 한국중공업)에 경력직으로 입사했다. 1981년, 그의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그는 올해가 정년이다. 31년간 두산중공업에서 일하면서 터빈공장을 떠나본 적이 없다. 넓디 넓은 터빈공장 곳곳에 그의 흔적이 남지 않은 곳이 없다.

    박기열 직장과 함께 터빈공장을 둘러보는 동안 마주치는 직원들마다 인사를 건넨다. 단지 상급자가 아니라 현장을 지킨 ‘선배’이자 기능인의 별인 ‘명장’ 박기열에게 보내는 인사인 것이다. 천장 크레인이 움직일 때마다 울리는 ‘즐거운 나의 집’ 음악이 그의 삶과 딱 맞아떨어진다. 31년 지켜온 현장이 그에게는 ‘즐거운 나의 집’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마흔이 다 돼서는 가공기술부로 옮겼다. 컴퓨터를 접하고는 당황했지만, 후배들과 같이 교육을 받았고 그의 ‘무한도전’이 시작됐다.





    그의 열정이 아내를 울리다

    가공기술부로 옮긴 후 그의 앞을 막아선 것은 CAM(computer aided manufacturing). 컴퓨터를 이용해 기계나 장비를 운용하고 생산하는 것이다. 난생처음 컴퓨터를 접한 그가 결국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CAM시스템 프로그램을 개발했으니 독하게 배우고 익힌 셈이다. 그 프로그램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CAM의 핵심 프로그램인 포스트 프로세서를 개발하면서 회사에서의 대우도 달라졌다. 당시 돈으로 150만원을 현금보너스로 받았고, 제주도 3박4일 여행의 특전도 주어졌다.

    아내와 함께 제주도 호텔방에 들어서니 과일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사장님’이 보내온 것이었다.

    “아내가 바구니에 있던 편지를 읽고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더군요. 프로그램을 개발한 것, 회사에서 인정받은 것 못지않게 아내에게 자랑스러운 남편이 될 수 있어서 저 역시 행복했습니다. 30여 년을 돌아보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 명장, 박기열

    산업현장에서 20년 이상 근속하고, 해당분야 최고 수준의 기능을 보유한 기능인에게 주어지는 ‘대한민국 명장’. 그는 2004년 전산응용가공 직종 명장으로 선정됐다.

    명장에 선정되면 해당분야 최고 기능인이라는 명예와 함께 정부포상(명장휘장), 일시장려금, 동일직종에 근무하는 동안 매년 기능장려금이 지급되고, 해외산업시찰 등 각종 특전이 주어진다.

    그는 전산응용가공 직장에서는 국내 최초로 명장이 됐다.

    수많은 설비를 국산화하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한 그에게 너무도 당연한 ‘보답’인 셈이다.





    나는 멘토다

    대한민국 명장이 되면서 그의 삶은 더욱 바빠졌다. 대한민국명장회 경남지회(지회장 황해도)와 MOU를 체결한 창원문성대학에서 특임교수로 위촉받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경남과 울산, 전남지역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직업진로교육의 일환으로 특강을 하는 등 강단에 서는 일도 많아졌다. 기업체의 강의 요청도 많다.

    특히 후배 기능인을 양성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이달 초 충북 청주에서 열린 전국기능대회 경남선수단의 훈련을 맡았다. 그는 CNC밀링 직종에 출전하는 선수들을 지도했다. 지방대회와 전국대회에서 여러 차례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던 그는 실전에 대비해 후배들을 트레이닝시켰다. 이번 전국기능대회에도 심사위원으로 위촉됐다.



    굴뚝 산업의 미래는 밝다

    그는 현재 담수플랜트나 원자로에 들어가는 터빈을 만드는 곳에서 일한다.

    입사 때와는 규모나 성능이 비교가 되지 않는다. 기술은 끊임없이 발전한다.

    IT산업이 발달하면 굴뚝산업이 쇠퇴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단호히 부정한다.

    “IT제품을 만드는 것도 결국 기계입니다. 첨단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것을 만들 수 있는 기계를 다시 만들어야 하지요. IT산업이 발달할수록 기계산업은 더욱 발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청소년들 쉽게 하는 일만 하려 듭니다. 공장에 다니면 힘이 들지요. 배워야 할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1년, 2년, 5년 후 기능을 택한 젊은이는 쉬운 길을 택한 이들보다 높은 대우를 받습니다.”

    ‘미래는 밝다.’ 그가 후배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글= 차상호기자 cha83@knnews.co.kr

    사진= 성민건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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