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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국화재배로 ‘인생 2막’ 송덕정씨

국화야, 네가 있어 내가 산다

  • 기사입력 : 2011-10-18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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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일 오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감천리 마산 국화원에서 송덕정·변재선씨 부부가 마산가고파국화축제에 출품할 국화를 가꾸고 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서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서정주 ‘국화 옆에서’)

    ‘눈부신 젊음 지나 한참을 더 걸어가야 만날 수 있는 꽃/ 국화는 드러나는 꽃이 아니라 숨어 있는 꽃이다/ 느끼는 꽃이 아니라 생각하는 꽃이다/ 꺾고 싶은 꽃이 아니라 그저 가만히 바라보는 꽃이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은 가을날 국화 앞에 서 보면 안다’(김재진 ‘국화 앞에서’)

    봄·여름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들과 달리 국화는 단풍 들고 찬바람이 도는 가을이 깊어갈 무렵에야 피어난다. 무서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단아한 자태로 피어나 깊은 향기를 풍긴다. 옛 선비들은 국화를 ‘오상고절(傲霜孤節·서릿발에도 굴하지 않고 외로이 지키는 절개)’이라고 칭하며, 고고한 기품과 절개를 닮고자 했다.



    우리나라 국화 시배지(처음으로 심어 가꾼 곳)인 마산지역에서 국화에 흠뻑 매료돼 ‘인생 2막’을 연 사람이 있다.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감천리. 풍광 좋은 곳에서 다양한 품종의 국화를 키우고 있다. 다른 꽃에 비해 경기에 민감해 사라지는 품종이 허다하고, 대단지에서 상업적으로 하지 않으면 큰돈이 되지 않지만 그래도 괜찮다. 벌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 향기롭지 않아요? 그 향기와 꽃에 반해 국화를 가꿉니다.” 이 마음 하나로 그는 병마와 싸우며 지난 5년간 새 씨앗을 뿌려 왔다.

    ‘국화원’ 주인 송덕정(68)씨를 만나러 가는 건 소풍 같았다.

    남해고속도로에서 서마산 IC로 진입해 쌀재터널로 가는 4차선 도로를 달리는 동안 차창 밖으로 광려천이 시원스럽게 흘렀다. 송씨는 이 길이 닿는 내서읍 감천리 외진 마을에서 국화를 가꾸고 있다.

    2004년 첫 씨앗을 뿌린 뒤 오늘까지 이 일에 매달려 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국화를 키우고 있고, 식물 재배가 쉽지 않은 일임에도 송씨는 뜻을 꺾지 않았다. 6개월 시한부 암 선고까지 받은 그였지만 “내가 키운, 나만의 국화를 사람들에게 선보이고 싶다. 사람들이 보고 행복했으면 한다”고 했다.





    젖소를 키우던 그

    마산에서 태어난 그는 창원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강원도 대관령을 다녀온 뒤 1981년부터 젖소를 키우기 시작했다.

    낙농업에 문외한이었던 터라 그는 목장에서 보름동안 주인 밑에서 잡일을 도맡아 하며 일을 배웠고, 그 이후로도 스스로 공부하면서 많은 것을 경험하며 터득하려고 했다. 처음 젖소 12마리로 시작했지만 부지런하고 성실한 그의 노력에 점차 150마리까지 덩치가 커졌다.

    “하루 우유만 1300kg 정도를 짜낼 정도로 일이 많고 잘됐어요.”

    하지만 순탄한 행보를 걷던 그의 낙농업도 IMF의 한파를 비켜가지 못했다.

    경기 침체로 사료가격은 폭등한 반면 소값은 천정부지로 떨어져 농가 손실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97년 IMF를 맞으면서 3500원 하던 비료값이 1만원으로 급등했고, 1마리당 100만원 하던 소값은 30~40만원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더욱이 젖소는 시장에서 거래가 되지 않았지요. 시련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아내와 두 아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그는 억척같이 견뎌냈다.


    송덕정·변재선씨 부부가 관상용 국화를 다듬고 있다.


    세 번의 암 선고

    그렇게 힘들고 모질게 자식 같은 젖소들을 키웠지만 2004년 갑자기 찾아온 병마에 모든 것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찌르는 것 같이 아파 지역의 한 종합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결과, 악성으로 꼽히는 소세포성 폐암 진단이 떨어졌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당시 의사는 초기에 혈액을 타고 전이가 됐다고 했어요. 진단일로부터 6개월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했죠.”

    젖소를 내다 팔고, 축사일을 그만뒀다. 곧바로 암환자 전문 병원인 서울 원자력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칼을 대지 않고 항암치료로 종양을 제어할 수 있다는 의사의 진단에 따라 수차례 항암치료와 방사능치료 등 힘겹고 고통스러운 치료를 2년 가까이 견뎌냈다. 병세가 호전됐지만 이내 건강검진 과정에서 또다시 위암이 발견됐다.

    혹시나 모를 전이를 생각해 창원병원에서 위내시경을 받았을 때 암이 보인 것이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해 원자력 병원에서 두 차례 수술로 완치됐다. 하지만 암과 관련해 그는 아직도 조심스러운 상황이다.

    지난 2009년에도 목이 부어올라 창원의 한 병원에서 MRI를 촬영했고, 혈액을 따라 전신에 퍼질 수 있는 혈액암이라는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폐암과 위암이라는 두 차례 암 선고 이후 또다시 혈액암 판정을 받아 항암치료를 계속 받았어요. 5개월 전에 각혈이 있어 투병 치료를 받고 있지요. 건강이 염려스럽긴 하지만 국화를 키우는 데는 지장이 없어요.”



    국화로 얻은 인생 2막

    몸이 아프다 보니 좋은 공기와 운동이 생각났다. 젖소가 없는 축사는 형체만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무언가를 남기고 가야 되지 않겠냐는 생각과 건강한 노후를 떠올리며 부인 변재선(61)씨와 함께 2006년 공원을 꾸몄다. 조경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약 160㎡(50평) 규모의 비닐하우스에 300점 되는 야생화를 키우면서 다른 한쪽에는 풍란을 작품화해 가꾸고 있다.

    마산이 시배지인 국화를 함께 키우자는 부인의 말에 나머지 3900여㎡(1200평) 부지에는 국화를 재배했다.

    그는 국화를 키우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마산기술센터를 방문했고,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국화의 품종 및 개량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전남 함평군농업기술센터도 수차례 견학했다. 5년간의 재배과정에서 그는 백조, 황옥, 홍옥, 금봉 등의 다양한 국화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들었다.

    투병 중이었지만 국화를 더 아름답게 육성하기 위해 그는 더욱 많은 땀방울을 흘렸다.

    그 과정에서 구릿빛 피부에 건강도 되찾았다. 국화 모종을 키우는 데 그치지 않고, 관상 국화에도 관심을 돌렸다.

    국화 한 그루에 여러 가지 색깔의 꽃을 피게 하는 접목 분화, 한 줄기에 세 개의 뿌리가 위로 치솟은 국화 등 그의 꾸준한 노력은 관상 국화를 분화·분재해서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그 결과 지난 3회 마산가고파국화축제부터 매년 꾸준히 150점의 분재국화를 출품하고 있다. 올해도 출품 요청을 받은 상태다.

    하지만 그는 국화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국화아카데미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회원들이 국화를 가꾸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농장 부지를 무료로 제공하는 등 국화 홍보에 열정을 쏟고 있다.

    “돈을 벌어야 국화 연구와 재배를 더 체계적으로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에 그는 “돈을 벌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국화를 키우지 않았을 것”이라며 “많은 사람들에게 국화를 베풀고 싶고, 단지 그 매력을 알리고 싶다”며 소박한 꿈을 전했다.


    글= 김정민기자 isguy@knnews.co.kr

    사진= 성민건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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