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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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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경남 배드민턴계의 전설 배효연

셔틀콕 인생 50년… 생활체육 배드민턴 대모가 되다

  • 기사입력 : 2011-10-25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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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효연씨(왼쪽)가 배드민턴 동호인을 지도하고 있다.
     


    ‘지난 4일부터 17일까지 마닐라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아배드민턴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은 소녀부 단식에서 배효연, 여자성인부 복식에서 이영순 강영신이 각각 우승을 차지했다. (중략) 세계적 수준에 있는 인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을 누르고 이번 대회에 우승한 것은 한국 배드민턴 수준의 놀라운 향상을 입증해 주었다고 하겠다. 더구나 두 종목을 석권한 이면에는 출전선수 7명 중 여자 4명이 모두 마산성지여고 재학 중으로 62년 팀 창설 이후 국내대회를 석권했을 뿐 아니라 이번 대회의 여자단식에서 1·2·3위를 배효연 윤임순 한숙이 손덕숙이 차지한 것은 커다란 수확이다.’

    지난 1969년 2월 19일자 동아일보 4면 ‘핀치히터’ 코너에 ‘아주배드민턴 단복식 석권- 네 명 모두 마산성지여고 재학, 세계 제패의 계기’란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는 당시 국내 배드민턴 인구가 30여만 명이지만 등록선수는 500여 명에 불과한 여건에도 불구, 세계를 석권한 데는 지방의 한 여고 선수들이 일등공신이었다고 6단 상자기사로 보도했다. 특히 기사의 포커스는 성지여고 배효연 선수에게 맞춰져 있었다.


    ▲배드민턴계의 전설

    창원시 성산구 상남동 창원시민생활체육관 4층 배드민턴장. 이곳에 가면 경남, 아니 한국 배드민턴계의 원로이자 전설인 배효연(60·경남배드민턴협회 상임부회장)씨를 만날 수 있다.

    배씨는 지난 1966년 고1 때 배드민턴 국가대표 경남 1호로 발탁, 고교 3년 내내 국가대표 선수로 활동했다.

    그녀는 성지여중 3학년 때인 65년 전국춘계배드민턴대회에서 우승을 이끌면서 배드민턴계의 샛별로 등장, 성지여고 진학 후 68년 제4회 국제학생배드민턴대회(일본) 주니어 단·복식 우승, 69년 2월 아시아배드민턴선수권대회 주니어 단식 우승 등 국내외 대회에서 무수한 우승을 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성지여고 ‘전국체전 9년 연속 우승’의 대위업을 이끌어낸 주역이다. 2학년 때인 67년 제48회 전국체전(서울)에서 첫 우승을 하면서 성지여고가 75년까지 9년간 단 한 번도 정상을 내주지 않은 원동력이 됐다. 또한 성지여고가 황선애, 김연자, 유상희, 정명희 등 80~90년대 세계 여자 배드민턴계를 지배했던 후배들을 배출하는 발판이 됐다.



    서브 시범을 보이고 있는 배효연씨.


    ▲배드민턴 천재, 그러나 짧았던 선수생활

    마산 성지여중으로 진학하면서 배씨의 배드민턴 운명이 시작됐다. 마산 무학초등 시절부터 육상을 잘했던 배씨인 만큼 당시 이 학교 체육교사이면서 배드민턴부 코치였던 임동명(74·현 경남배드민턴협회 회장)씨에게 단번에 눈에 띄었다.

    1학년 때 발탁됐지만, 치마 입는 여학생이 뛰어다니는 것조차 꺼려하던 시절이었던 만큼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그러나 배씨의 집념에 결국 아버지 배정성(작고)씨는 2년 만에 가장 적극적인 후원자로 돌아섰다. 매일 새벽 무학산까지 아버지와 함께한 조깅 덕으로 국가대표가 될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인생의 승부처는 고교 졸업 때였다. 일본 오사카 실업팀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어린 마음에 먼 타국에서 혼자 잘해낼 자신이 없었다. 대신 부모님 곁을 떠나 서울로 유학하는 것만도 용기가 필요했다.

    배씨는 중앙대 체육교육과로 진학, 선수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나 2학년 때 학교 사정으로 팀이 해체되면서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다. 또한 졸업 후에는 대학원에 진학해 학교에 남기를 권유받았으나, 객지생활에 지친 배씨는 낙향을 결심했다.

    그해 함안여자중·고교에 부임해 7년간 체육교사로 지내다, 1980년 회사원 이종열(65)씨를 만나 결혼해 지현(33)·지항(31)씨 두 딸을 키우면서 가정주부에만 전념했다.

    “돌이켜 보면 일본 실업팀 스카우트를 제의받고 거절한 것이 가장 아쉽습니다”라고 회상하는 배씨. “그때 국내선수론 처음 외국으로 진출했다면, 내 인생은 아주 달라졌을 겁니다.”

    만약 배드민턴을 하지 않았다면 무용가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그녀는 요즘 스포츠댄스를 즐기면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대학시절엔 연극 연출에 관심이 많아 연극영화과 청강을 했다고도.
     



    ▲1992년부터 창원서 배드민턴 교실 운영

    배씨는 생활체육 배드민턴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던 1992년 창원시민생활체육관에서 배드민턴교실을 운영, 20년째 배드민턴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지난 2001년부터는 창원시 시설관리공단 직원으로 채용돼 배드민턴 동호인들에게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배드민턴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종목이고, 풍부한 운동량과 경기가 주는 재미가 큽니다. 그래서 쉽게 접근하지만, 그만큼 빨리 권태를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본과 기초를 철저히 지도함으로써 오랫동안 단계적으로 배울 수 있도록 했습니다.”

    “초보자의 경우 단시일 내에 실력을 끌어올리겠다는 과욕을 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조급성은 오히려 건강을 해치고, 실력 향상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정도가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잖아요. 조급한 현대인들에게 배드민턴을 통해 넉넉하고 여유있는 마음을, 또한 쉽게 포기하는 젊은 세대들이 지구력을 가질 수 있도록 지도해 왔습니다.”

    배씨는 배드민턴은 아무나 할 수 있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운동량이 워낙 많고, 자칫 승부에 집착하다 보면 격렬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체계적인 훈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생활체육 배드민턴 지도자 1세대로 고독감도 컸다는 그녀는 “경남에만 배드민턴클럽이 40개 정도 만들어진 데는 제 역할도 있었습니다”고 겸손히 말하며 “일류 감독, 코치는 되지 못했지만 내가 배출한 배드민턴 동호인이 1만명은 족히 넘을 것”이라며 만족했다.



    ▲배드민턴과 인생, 그리고 향후 계획은

    배씨는 모든 스포츠가 그렇겠지만, 배드민턴은 유독 인생과 닮았다고 얘기한다.

    “배드민턴인은 강자에게 비굴하지 않은, 그렇지만 항상 도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약자에게 군림하거나 무시하는 마음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

    또한 “상대방이 보고 있을 때 셔틀콕을 넘겨줘야 하듯이 항상 상대에 대한 배려심을 가져야 합니다. 심판이 없을 때는 상대 코트에 떨어진 셔틀콕의 상대방 판정을 존중하는 당당함도 있어야 하구요. 무엇보다 파트너를 존중하고, 어떤 경기라도 최선을 다하며,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특히 “배드민턴인은 비록 경기에 지더라도 비겁하게 파트너를 탓하거나 심판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패배를 내일의 승리를 위한 과정으로 삼으며, 결코 좌절하지 않아야 합니다.”

    배드민턴인으로서의 기본적인 자세와 인생을 슬기롭게 살아가는 지혜가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설명한다.

    “셔틀콕의 속도는 아이스하키의 퍽보다 1.5배 빠른 300㎞/h 이상 됩니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속도도 중력의 법칙을 이기지 못하죠. 16개의 깃털이 오므라졌다 다시 펴지면서 낙하산효과가 생겨 20m도 채 날아가지 못하고 속력이 확 줄면서 수직낙하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겸손해져야 하는 이유와 같다고 할 수 있죠.”

    그녀는 “무엇보다 5.5g에 불과한 셔틀콕이 만들어내는 변화무쌍한 궤적과 가로 6.1m, 세로 13.4m의 좁은 코트 속에서 연출되는 다양한 플레이는 인생의 축소판과 같습니다”라고 배드민턴을 정의한다.

    아직 정년이 2년 정도 남았다는 배씨에게 앞으로 계획을 묻자, 인터뷰 내내 편안했던 표정과는 달리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배드민턴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때 정식 채택된 이후 대회마다 금메달을 따내는 효자종목입니다. 또한 생활체육 종목 중 200만 명이란 가장 많은 동호인 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가슴 아픕니다.”

    “배드민턴이 명실상부한 인기종목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저의 과제입니다. 앞으로 체력이 닿는 한 코트에 남아 배드민턴의 위상을 높이고, 생활체육 현장을 지키는 영원한 배드민턴인으로 남겠습니다.”

    환갑을 넘긴 그녀지만, 코트 위에선 태극마크를 달고 뛰던 소녀 시절 자부심 그대로다.



    글= 정오복기자 obokj@knnews.co.kr

    사진= 성민건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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