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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4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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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풍년과 농사일- 강득송(시인)

  • 기사입력 : 2011-10-28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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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곡백과가 무르익은 가을 들판을 보면서 이렇게 하기까지 흘린 농부들의 피땀을 다시 되새겨 본다. 젊은 시절 고향 농촌운동에 뛰어들어 손수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왔는데 그때 일은 지금도 생생하다. 마을의 생김새가 바닷가이기에 논의 배열이 다랑이어서 천수답의 현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골짜기로부터 내려오는 개울의 힘을 얻어서 물을 공급받는데 그것도 가뭄이 길어지면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물대기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각자가 자기 논에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물싸움은 양반도 한다고 하면서 치열하게 경쟁을 하면서 물을 끌어가려고 한다. 농사가 아니라 피의 전쟁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논을 말리지 않고 한톨의 벼라도 더 생산하려는 그 의지는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작업이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논도 그 범주를 넘지 못해 항상 살벌하게 다투다가 합의를 본 것이 맨 위의 논부터 차례로 대기로 했다. 그러면 낮에는 뜨거운 태양빛에 그을리지 않아도 되고 밤에는 모기와의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을 얻은 것이다. 늘 도시에 살다가 난생처음 당시 50~60대 노인들과 마주하면서 많은 인생을 배우기도 한 일이 나에게는 좋은 경험이 된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물을 대기 위해 논에 갔더니 예상외로 거의 말랐어야 할 논에 물이 가득해 물대기 차례를 다음 분에게 넘겨주었다. 너무 신기해서 논길을 걸으면서 살펴보니까 어디서 물 흘러들어가는 소리, 즉 물 새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살펴보니 우리 논 중간쯤에 작은 구덩이가 생겨서 물이 새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때 순번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면 야단날 것이고 모른 척하고 며칠을 지나자 마침 비가 내려서 물대기 전쟁이 끝이 나고 그해 농사는 대풍을 이루었다. 그때 그분들에게 미안한 것은 새어나가는 물줄기의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이다. 얼마나 약삭빠른 사람이었는가? 하고 가을들판을 볼 때마다 이미 고인이 된 지 오래인 그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진다.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자체에서 새어 나가는 것이 많아짐을 느낀다. 어쩌면 인생 가을이 되어 좋은 열매를 내어놓을 때인데 이미 몸은 겨울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무엇보다 기억력이 그렇고 신체 부분 부분에서 새는 일이 많아진다. 그래서 화장실 갈 때에도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옆으로 새기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리고 순발력도 그렇다. 노익장을 자랑 삼아 칠순이 넘어서도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다가 사고로 이 세상을 떠난 분들도 더러 있다. 다들 나이가 많아지니 식욕까지 후퇴한다고 한다.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고 한다. 그 개울의 물처럼 인생이 점점 새어 나간다는 것이다. 이런 일을 생각하다 보니 언제 어떤 경로로 새어 나갔는지 내 정보가 새어 나가서 종종 보이스피싱을 당한다. 한번은 잘못 했다가는 거액을 사기당할 뻔했다. 요즘 와서는 그런 일들이 중요 국가 기관에서 당해 기밀이 누출된 사건이 비일비재한 것 같다. 왜 그런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인생 전체를 아니 국가 전체가 사기꾼들의 손으로 넘어갈 것이 아닌가? 광복 이후 우리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이뤘는데 이런 것들이 새어 나간다는 이야기를 접할 때 마음이 아프다. 그저 쉽게 얻은 수확이 아니다. 농민들이 농사가 수지맞지 않다고 그리고 정부 매상가격이 낮다고 벼를 모아 불태우는 일도 더러 있는데 국가 기밀까지 누출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어떻게 이룬 나라인데 한 사람의 욕심이나 부주의가 나라 일을 어렵게 만들어도 별일 없는 것같이 변명하는 일들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풍년 들판을 보면서 그때 그 노인들에게 새어나가는 물을 숨긴 일만큼 더욱 염려스러운 일에 가슴 조인다. 부디 새어나가는 일이 없는 나라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강득송(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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