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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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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씨름꾼서 버섯농사꾼 변신한 전 태백·금강장사 이희윤

왕년엔 씨름판 장사, 지금은 버섯농 장사

  • 기사입력 : 2011-11-08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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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희윤씨가 마산합포구 진전면 일암리 버섯재배사에서 수확한 ‘이슬표고’(일명 공버섯)를 들어보이고 있다./전강용기자/
    1986년 금강장사에 등극한 이희윤씨.


    외길인생을 통해 사회공동체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을 두고, 우리는 가치 있는 삶을 살았다고 존경과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한 사람이 여러 분야에 걸쳐 자신의 이상과 능력을 발현하는 경우에도 외길인생 못지않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가지 않은 길’을 통해 여러 분야를 경험하지 못하는 한계를 아쉬워했듯이, 누구나 기존의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 모험의 길을 가보고자 하는 동경을 갖고 있다.

    길지 않은 인생에 새로운 분야에 도전장을 던지기란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마냥 꿈만 꾸다가 실행도 못하고 마감하는 게 보통사람들의 인생사다. 과감히 실행하는 힘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냉엄한 프로스포츠계의 정상에 오른 후, 그 세계가 보장하는 삶을 버리고, 또 다른 분야의 정복을 위해 땀 흘리는 우직한 사나이가 창원에 있다.

    1980년대 프로씨름 선수로 태백장사와 금강장사 타이틀을 6번이나 차지했던 이희윤(49·전 현대코끼리씨름단 소속)씨가 그 주인공이다.


    프로씨름 경량급 정복하다

    ‘죽순처럼 솟아나는 씨름의 새별.’

    지난 1983년 5월 27일 대구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제2회 프로민속장사씨름대회 개막 첫날.

    만 20세의 나이로 최경량급인 태백급에서 쟁쟁한 선수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장사 꽃가마를 탄 그를 두고 언론매체는 이 같은 찬사를 쏟아냈다.

    당시 경남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이만기와 초·중·고·대학교 동기생으로서 함께 프로씨름에 입문한, 떠오르는 ‘루키’였다.

    잡치기와 안다리후리기, 앞무릎치기 등 현란한 손기술과 발기술로 라이벌들을 제압했던 그는, ‘기술씨름’의 대명사였고 보통 선수는 한 번도 하기 어려운 장사타이틀을 6차례(태백 3, 금강 3회)나 차지하면서 경량급 최강자로 한 시절을 풍미했다.

    그가 씨름과 인연을 맺은 것은 마산 무학초등 5학년 때였다.

    당시 동급생에 비해 덩치가 컸던 그는 스승의 권유로 샅바를 잡았다. 4학년 때 의령에서 전학을 온 이만기(49·현 인제대 교수)도 같은 학년으로 함께했다.

    유달리 승부욕이 강했던 그는 마산중학교와 마산상고(현 용마고), 경남대로 이어지는 선수생활 중 눈에 띄는 성적을 냈다. 그리고 명문구단인 현대중공업 코끼리씨름단에 입단, 순탄한 선수생활도 했다.

    그러나 1990년 3월, 28세의 나이로 다소 일찍 모래판과 결별했다. 당시로선 20대 후반만 돼도 ‘노장’으로 취급받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사업에선 20전20패

    모진 훈련으로 ‘골병’이 들었던 씨름판과의 이별이라 후련할 만도 했지만, 사회 초년병에게는 세상과의 더 큰 승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남에게 좀처럼 지기를 싫어했던 터라 씨름판에서는 패배를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사업에서는 족히 20전20패를 당한 것 같습니다.”

    여러 사업을 벌였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넘어져 일어나기를 10여 차례, 오기가 발동했다.

    해외로 눈을 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가 1997년이었다. 필리핀 전력처와 현지기업 간 합작을 위한 협약을 마무리하고 사업이 본격화될 즈음이었다. 필리핀 출장을 마치고 김해공항으로 귀국하는 길에 비행기 랜딩기어 고장이 발생했다. 자칫 동체착륙을 해야 하는 위기일발의 상황이었다.

    “아, 이제 모든 게 끝나는구나. 그때는 자연스레 절대자에게 의지하게 되더라구요. 한 번 더 삶의 기회를 주면, 다른 사람을 위해 의미있는 인생을 살겠다고 맹세를 했습니다.”

    다행히 랜딩기어가 빠져 큰 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날의 공포가 이씨에게는 ‘트라우마(trauma: 정신적 외상)’로 남았고, 이후로는 절대로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고 했다.


    버섯농사에 인생을 걸다

    이후 이런저런 사업에 손을 대 밥은 먹고 살았지만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불현듯 국민건강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버섯농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때가 2005년 10월이었다. 마침 당시 부친이 중풍으로 쓰러져 거동을 못하고 병석에 있었는데 ‘잎새버섯’이 면역력 향상에 좋다는 소문을 들었다. 잎새버섯은 맛도 좋으면서 면역적 약리작용이 뛰어난 기능성 식품으로 93.6%의 종양 억제율을 가지고 있어 항암효과가 높은 버섯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일본에서는 ‘식용버섯의 왕자’로 불리며 가장 인기 있는 식품 중의 하나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그때까지 재배가 되지 않고 있었다. 씨름인의 근성으로 도전해 봐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러나 전문가들조차도 국내에서는 재배가 힘들다며 만류했다. 병원 인큐베이터 수준의 습도·온도 조절과 무균실 정도의 청결성을 유지해야 하는 등 재배조건이 무척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당연히 실패를 거듭했다.

    2007년 마산시농업기술센터에 생육장을 설치하고 기술지도를 받으며 수차례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비로소 지난 2009년, ‘국내 최초 대량재배 성공’이라는 버섯농사 타이틀을 차지했다.


    "함께 농사 지을 분 없나요"

    국내 유일의 잎새버섯 재배 성공 입소문이 나자 주문이 쏟아져 들고 있다. 최근에는 표고와 송이의 교잡종인 ‘이슬표고’(일명 공버섯) 배양에도 국내 처음으로 성공했다. 수요자에게 신뢰를 줘야겠다는 판단에서 (주)GNA영농조합법인을 설립하고 ‘오른(Orne)’이라는 브랜드도 만들었다. 오른은 ‘Only Real Natural Eating’의 머리글을 딴 것으로 ‘오직 자연 먹거리를 제공하겠다’는 그의 철학을 담았다. 지난 3~6일 창원컨벤션센터에서 경남도와 창원시 주최로 열린 ‘2011경남특산물박람회’에서는 친환경 농산물 부문에서 대상도 차지했다.

    지난해 마산시 진전면 일암리 적석산 자락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2만여㎡ 규모의 배양장과 생육장을 새로 갖추고, 농장을 규모화했지만 이 정도로는 밀려드는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는 형편이다. 생육장이 지금의 10배가 넘는 20만㎡ 정도는 돼야 한단다. 당연히 자금력이 문제다. 그래서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선량한 농업투자자들의 동참을 기다리고 있다.

    “현대와 신세계, 롯데 등 백화점 등으로부터 잎새버섯과 이슬표고의 주문이 쇄도하지만 아직은 출하량이 적어 공급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로 암이나 당뇨, 고혈압 등 성인병을 앓고 있는 환자 등 약 500명을 대상으로 회원제(월 10만원)로 공급하는 실정입니다.”

    이씨는 생육장을 넓혀 국민 항암식품인 잎새버섯과 이슬표고를 싼 가격에 많은 사람들이 섭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간절한 소망인데 당장은 마음대로 되지 않아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이상목기자 smlee@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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