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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박진열 프로바둑기사

“경남서 세계 최고 기사 탄생 디딤돌 놓고 싶어”

  • 기사입력 : 2011-12-20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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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둑기사들은 대국 때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탓에 잘 웃지 않는다고 한다. 박진열 프로바둑기사가 해설용 바둑판 앞에서 살며시 웃음을 짓고 있다.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을 칠전팔기(七顚八起)라 한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서니, 그 의지가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977년 11월 파나마에서 열린 세계복싱협회(WBA) 슈퍼밴텀급 타이틀 결정전에서 2회에 다운을 4번 당하고도 다음 회에 KO승을 거둔 홍수환 선수는 ‘4전5기’ 신화의 주인공으로 30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를 추억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4전5기하기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4전5기와 7전8기가 그러한데, 17전18기하려면 몇 곱절 더 강한 의지와 피땀이 요구되는 것은 물론이다.

    경남바둑계의 원로인 프로기사 박진열(69) 8단은 서른세 살 때인 지난 1975년 18번 도전 끝에 프로기사의 반열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박 8단이 프로기사가 되는 입단대회에 처음 나선 것은 스물세 살 때였다. 그는 한국아마바둑선수권대회 경남대표로 출전해 3위에 입상하며 의기양양했다.

    내친김에 그해 열린 프로 입단대회에 처음으로 나섰지만, 예선 마지막 판에 반집으로 패하며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마산에서 직장일을 하면서도 줄기차게 입단대회에 출전했던 그는 4년 뒤 천신만고 끝에 본선 직행 자격을 얻었지만 군에 입대하면서 고비를 맞았다.




    프로바둑을 향한 그의 열정은 그러나 군에서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제대를 얼마 남겨두지 않았을 때에는 지휘관의 허락을 얻어 군복을 입고 대회에 나갔다.

    제대 후, 입단을 위한 마지막 한 판을 넘지 못하고 주저앉기를 반복할 때였다. 당시 그를 지켜보던 일곱 살 아래의 양상국 9단(당시 2~3단 추정)이 “술 한잔 하죠”라며 말을 걸어 왔다. 성적은 좋은데, 본선에서 마지막 한 판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가 궁금하다는 것이다.

    지금은 텔레비전 바둑 해설가로 잘 알려져 있는 양 프로는 그에게 대회 출전을 잠시 쉬고 절에 가서 정신적인 수양부터 해보라고 권했다.

    박 8단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는, 그해 겨울 내내 집에 칩거하며 기보 공부에 매달렸다.

    “지금은 물론이고 당시에도 프로기사들로부터 체계적인 수업을 받아야 입단할 수 있었는데, 나의 경우 그런 수업을 받을 기회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론보다는 힘으로 싸워 왔어요.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겨울 한 철 동안 기보 몇백 개를 외우다시피 했어요.”

    이듬해 7월 다시 입단대회에 나선 그는 대회 전날 양 프로와 다시 마주쳤다.

    “절에 갔다 왔어요?” 양 프로가 물었다. 그는 “예”라고 거짓말을 했다.

    프로기사가 되려면, 12명이 본선에 오른 이 대회에서 최소한 2위를 해야 한다. 그는 12명 중 최연장자였다. 나머지는 대부분 바둑에 관한 한 날고 뛴다는 10대 후반의 한국기원 연구생들이었다.

    열일곱 번 좌절하며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던 그는 한 판 한 판에 사력을 다했다. 풀 리그로 벌어진 본선에서 그는 마침내 11전 전승을 거두며 프로 입단에 성공했다. 입단 동기로 지금은 진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문명근(57) 9단은 서울에서 바둑수업을 받았었다.

    박 8단이 바둑돌을 처음 잡은 것은 마산상고(현 용마고) 재학 때였다.

    1942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그는 해방 후 마산으로 보금자리를 옮겼고, 함안, 진주를 거쳐 다시 마산으로 이사해 마산상고에 입학했다.


    “부친께서 술 도매상을 하셨어요. 동네 어르신들이 우리집 가게에 많이 놀러 오셨고, 당연히 내기바둑이 빠질 수 없었죠. 어깨너머로 바둑을 배우다가, 그분들과 대국을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9급이나 10급 정도죠.”

    그렇게 서너 달 바둑을 두다 보니, 동네 어르신들을 이기기 시작했다. 큰물에서 놀고 싶었던 그는 기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기원도 여러 군데 다녔어요. 또 센 사람이 있다면 집이든 사무실이든 어디든 찾아가 대국을 신청했어요. 물론 내가 이길 때까지 계속 바둑을 뒀어요. 사실 그분들을 못살게 굴었다고 하는 게 맞죠.”

    마산대학(현 경남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해서는 일본 유학파 출신으로 아마바둑 고수였던 학과 교수와 자주 대국을 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바둑 기량은 도내 아마바둑 최고수 수준이 됐다.

    “대학을 그만두고, 바둑 공부를 쭉 했어요. 그러다가 전국아마바둑선수권대회 경남대표로 나갔고, 또 입단대회에 출전하게 됐죠.”

    17전18기하여 프로기사가 된 그는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인 서른세 살에 결혼을 했고, 마산시 창동에서 한국기원 마산지원을 운영하며 가정을 꾸려 나갔다. 10여 년 뒤 창원시 신월동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초·중학생들을 대상으로 ‘박진열 바둑교실’을 열었다.

    “감당하기 힘들 만큼 학생들이 많이 몰렸어요. 100명을 넘기기도 했어요.”

    2003년 경남바둑협회 창립의 산파역을 했던 그는 도지사배 경남바둑대회를 창설하고, 국무총리배 세계아마바둑대회를 경남에 유치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그는 협회 창립 이듬해 LG 세계기왕전에서 이다혜 초단을 이기면서 점수제에 따라 8단으로 승단했다. 7단으로 승단한 지 7년 만이다.

    박 8단은 입단 후 수많은 대회에 나가 쟁쟁한 프로기사들과 힘을 겨뤘지만, 타이틀 획득에는 이르지 못했다.

    “지난 93년 기성전에서 이창호 당시 6단과 4강에서 만났어요. 비록 내가 돌을 던지기는 했지만, 결승에 진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아쉬움이 많이 남죠.”

    그의 마지막 꿈은 물론 ‘입신(入神)’으로 불리는 9단으로 승단하는 것이다.

    “1~2년 내에 이뤄질 가능성도 있어요. 프로바둑대회를 통해 성적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9단 승단과 함께 또 다른 바람을 갖고 있다. 아직 무관(無冠)인 제자 윤현석(37) 9단이 타이틀을 따는 것이다. 윤 9단은 마산 상남초등학교 때 박 8단으로부터 3년가량 바둑을 배운 뒤, 그의 주선으로 서울 충암초등학교로 전학했다. 한국기원 연구생이 된 윤 9단은 발군의 기량을 선보이면서 입단대회를 거치지 않고 특별입단했다.

    지금도 경남바둑협회 연구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박 8단은 “우리 협회 연구생 중에서 프로기사가 나오고, 또 윤 9단을 포함해 경남에서 세계 최고의 기사가 탄생할 수 있도록 디딤돌을 놓고 싶다”고 말했다.

    “박 8단에게 바둑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내 인생의 전부예요. 한평생 바둑만 두고, 바둑 속에서 살았으니까요. 바둑은 인생의 축소판이라 하지 않습니까. 바둑 한 판은 인생이 흘러가는 것과 같기 때문이죠.”


    글= 서영훈기자 float21@knnews.co.kr

    사진= 김승권기자 s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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