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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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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팥죽과 화해하다- 양해숙(수필가)

  • 기사입력 : 2012-01-06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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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흑룡의 해에게 염치없이 새해 소망을 빌어보기 위해서다. 새해 소망을 담으려면, 비우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새해맞이 준비는 팥죽 한 그릇이다. 전통적으로 새해를 준비하는 동짓날엔 양기(陽氣)를 의미하는 붉은 팥을 넣어 죽을 쑨다. 팥죽은 몸에 있는 나쁜 기운인 음기(陰氣)를 다스리고, 집 안팎에 뿌려 역신(疫神)을 물리쳐서 자신과 주변을 맑혀 낸다.

    언젠가 새해맞이를 위해 어수선했던 것, 막혔던 것을 비워보려고 절에 갔을 때다. 법당은 향내와 엎드린 불자(佛子)로 채워져 가득하다. 그런데 엎드려 볼 엄두도 못 내고 서 있는 난, 발밑으로부터 슬슬 한기(寒氣)가 느껴진다. 다 타지도 않은 촛불을 새것으로 바꾸시는 노 보살님, 저 칠순은 되셨을 노 보살님께서도 나처럼 한기를 느끼신 걸까. 아니면 사시는 동안 타고 있는 것보다는 새것이 더 밝고 더 따뜻하며, 더 확실한 만족을 가져다준다는 확고한 믿음 때문이셨을까.

    새것, 새것은 분명 좋은 것이다. 사물은 물론이고 어떤 이들은 사람까지도 새 얼굴을 좋아하는 것 같다. 혹시 그것은 짧은 생명력, 그 희소성 때문일까. 그런데 난 습관적으로 새것 앞에 서면 주눅이 들고, 새 얼굴을 대하면 낯가림이 심하다. 새것은 영원할 수도 없고 길지도 않은 짧은 순간의 의미, 바로 그래서다.

    앞에 놓인 팥죽을 바라본다. 팥죽에서는 김이 피어오르다가 새것이란 의미처럼 흩어지고 있다. 새로 나이를 더한다는 것, 새해를 맞는다는 것이 결코 낯설지 않은 이미 익숙해진 일인데도 한 숟가락씩 팥죽을 떠내는 내 손은 가볍게 떨리고 있다. 비우지 못한 채, 채우고는 있지만 허기와 한기는 웬일인지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밖으로 나와 하늘을 살핀다. 하늘엔 먹빛 표정만 있지는 않았다. 흐림과 맑음이 하늘이란 크기 안에 저렇듯 나란히 존재한다. 사랑과 미움이 한 곳에 있고, 받을 것과 줄 것이 모두 내 안에 있다. 양쪽의 크기가 항상 변하므로 표정을 바꾸게 되지만 결국은 내가 주고 내가 받게 되는 것을.

    묵혀 두었던 동짓날 이야기를 꺼냈다. 세월은 외모만 바꾸는 건지 생각이나 행동은 마치 한 바퀴를 돈 것처럼 제자리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인지 절실함 때문인지 오랜 세월 끼고 보던 심경대(心鏡臺)에는 미처 깨닫지 못한 내용이 적혀 있다.

    자기 성질을 참지 못하고 자기 기분대로 성질을 부리거나 폭언을 퍼부어 상대방이나 주위를 불안하고 불미스럽게 만들었는가? 악한 말투나 하는 일로 남을 깎아내리거나 짓밟고 비난하여 손해를 입히고 그로 인해 이익을 취하였는가? 입만 열면 남을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여 험담함으로써 그들에게 심리적으로나 직접적으로 손상을 미쳤는가?

    인욕(忍辱)을 항상 신조로 삼아서 모든 잘못을 스스로 해결하고 남에게 떠맡기거나 책임을 전가하여 고통을 주거나 난폭하지 않게 견뎌냈는가?

    만약 악설을 퍼붓거나 불만만 늘어놓고 인욕하지 못하면 죽어 뼈를 가는 지옥에 갈 것이니 스스로 인욕하며 타인에게도 가르쳐야 한다. 타인에게도 가르쳐야 한다는 내용을 이십 년 만에 보게 되었지만 숨이 막히고 얼굴이 붉어진다. 같은 일을 한 지 올해로 십 년, 남들은 달인이 된다는 세월을 나는 거꾸로 살고 있다.

    오후 간식은 팥죽이다. 팥죽을 쑤어 본 지 얼마만인지 새벽부터 찹쌀을 담그고 팥을 무르게 삶았다. 새알을 빚어 보려 했지만 방앗간을 가기는 어렵고, 누군가에게 들은 삶은 팥을 믹서에 갈면 손쉽게 할 수 있다던 정보와, 며칠 전 믿기 어려운 기적 같은 믹서가 있었다. 분쇄와 겸용인 믹서가 그것인데 재작년에 고장이 나서 쓸 수 없었던 것을 버리지 못하고 모셔뒀다(?). 분쇄기가 필요해서 혹시나 돌려 보았더니 분쇄기와 믹서가 도는 것이 아닌가. 아! 느낌이 좋다. 아마도, 역신(疫神)은 팥죽과 화해한 거다.

    양해숙(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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