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3월 29일 (금)
전체메뉴

[작가칼럼]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가기- 진혜정(시인)

  • 기사입력 : 2012-02-03 01:00:00
  •   



  • 내가 첫 발령을 받았을 때의 일이다. 그때 나는 4학년을 맡고 있었는데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사생대회에 아이들을 인솔해 갔다. 우리 학교가 배당받은 장소에 찾아가는 중간에 다른 학교에서 온 누군가 갑자기 눈에 확 들어왔다.

    “언니야!” 누른 콧물을 들락날락거리며 나를 반갑게 부른 사람은 다름 아닌 막내여동생이었다. 나는 뒤따라오는 우리 반 아이들이 알아챌세라 얼른 가지고 있던 돈 500원을 막내여동생 손에 쥐어주며 이 돈으로 과자 사 먹고 집에 갈 것을 당부하고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나는 괜히 공부를 잘해서 내가 사는 도시에 첫 발령을 받은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우리 형제는 딸 여섯에 아들 하나인데 장남에게 시집온 어머니는 끝까지 제사 지낼 아들이 있어야 한다며 아들 낳기를 고집하셔서 당신 나이 마흔, 내 나이 열여덟에 막내인 남동생을 낳으셨다. 때문에 내가 스물두 살에 첫 발령을 받았을 때 여섯째인 여동생은 여덟 살이었고 일곱째인 남동생은 다섯 살이었다.

    없는 집에 제사 다가오듯 한다는 속담은 우리 집을 두고 한 말이었다. 장남이었던 아버지의 수입에 비해 건사해야 할 입은 많아 사는 게 빠듯했던 우리 집은 제사가 자주 다가왔다. 제삿날만 되면 인근에 사시는 고모님, 숙부님은 물론 오촌아저씨와 아주머니들로 집안은 발 디딜 틈이 없었는데 그때마다 맏딸인 나는 막내여동생을 업고 나머지 여동생들은 데리고 대문 밖으로 쫓겨났다. 친척 어른 한 분씩 오실 때마다 이 집에는 딸들이 이리 많아서 어디에 써먹을 거냐는 둥 나중에 제사는 누가 지낼 거냐는 둥 이 집은 안팎으로 사람은 좋은데 왜 아들이 없냐는 둥 온갖 핀잔을 다 들어야 해서 어머니께서 취하신 독단이었다.

    집안의 장남이셨던 아버지께서는 첫딸이 태어난 것을 못마땅해하셔서 출생신고를 미루셨는데 둘째도 딸이 태어나고 셋째도 딸이 태어나자 아들을 낳으면 한꺼번에 하리라고 출생신고를 하지 않으셨다. 내가 입학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아들을 못 보신 아버지는 내 취학통지서가 나오지 않으니까 그제야 출생신고를 하러 가셨다. 과태료를 물고 딸 셋을 한꺼번에 올리게 된 아버지는 술도 한잔하신 김에 딸들의 생일을 마음대로 부르셨다.

    “큰딸은 여덟 살이니까 62년생이네. 62년 2월 25일.” “둘째딸은 네 살이니까 66년 6월 23일.” “셋째는 두 살 적나 세 살 적나 모르겠다. 69년 1월 19일.”

    동사무소 직원과 아버지의 합작으로 원래 음력으로 9월생인 나는 태어나기도 전인 양력 2월생으로 신고되었고 동생들도 자기들 생일과는 달리 아무 달 아무 날이나 자기 생일이 되었다. 대학을 가면서는 “취직을 해서 돈 벌 생각을 안 하고 턱도 없이 가시나가 대학 가려 한다”고 저녁마다 아버지의 술주정을 들어야 했고 시집가서 딸만 둘을 낳았을 때는 시댁 어른들과 남편 눈치를 살펴야 했다.

    첫 발령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막내여동생이 시집을 가서 둘째아이를 임신했다. 첫째가 아들이었는데 산달이 되니까 둘째도 아들이라고 병원에서 알려주었다고 했다.

    “야, 축하한다.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언니야, 나는 얼마나 간절히 딸을 원하는데 그게 무슨 소리고?” 동생은 뱃속의 둘째 아이가 아들인 것이 너무 속이 상한다며 말조차 못 붙이게 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더니 옛말 그른 것은 없나 보다. 고리타분하고 시골 출신에다 장남인 내 남편이 둘째 딸을 보면 입이 벌어지고 불면 날아갈세라 쥐면 꺼질세라 애지중지한다. 내가 딸만 둘이라고 부러워하는 사람도 생기고 딸이라도 서울에 있는 대학을 보내는 사람이 늘어났다. 이제는 여자가 큰소리치는 세상이 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합리적인 세상이 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가기가 좀 편해졌다. 명절에 같이 장을 봐주고 전을 뒤집어주는 남편이 고맙다.

    진혜정(시인)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