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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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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봄을 세우다- 손영자(시조시인)

  • 기사입력 : 2012-02-10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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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덧 입춘도 지났다. 그런데도 추위의 맹위가 대단하다. 없는 살림살이일수록 동장군이 무섭고 가난이 뼈저리다.

    기름값을 비롯해 각종 생필품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바람에 추위에 떨면서도 한 푼이라도 난방비를 아끼려는 서민의 노력이 눈물겨운 요즈음이다.

    과연 봄은 어디쯤 오고 있는 것일까? 이 추위를 물리칠 봄이 어서 오기를 기다리며 봄맞이꽃 매화를 눈앞에 그려본다. 매화가 핀다고 해 어려운 살림살이에 무슨 보탬이 되랴만 그래도 머잖아 추위가 물러가는 것만은 확실하다. 움츠렸던 어깨도 펴고 오그렸던 다리도 뻗어야지. 그런 다음 매화꽃 가지를 슬며시 잡아당겨 은은한 봄향기를 맡아야겠다. 매화가 봉오리를 맺고 꽃망울이 벌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향기로운 봄 차 한 잔, 생각난다.

    찻종지를 들고 뒤뜰로 나간다.

    이른 봄 여기저기 청매화가 다퉈 피고 있는 뒤뜰 매화밭에서 꽃송이들이 소담스레 달린 푸른색이 도는 가지 하나를 잡아당긴다. 활짝 핀 꽃도 아니다. 아직 어린 봉오리도 아니다. 활짝 피면 이미 향기를 내뿜고 있는 중이고, 봉오리는 덜 성숙해서 향기가 제대로 나지 않는다. 이제 마악 피려고 둥근 구슬처럼 부풀어 있는 꽃송이를 고른다. 그런 꽃을 골라서 찻종지에 담는다. 화로 위 청동주전자에 물이 끓으면 그 물을 따뜻할 정도로 식힌 후, 어린잎으로 만든 녹차를 넣어 울군다. 둘러앉은 서너 사람 앞마다 작은 찻잔 하나씩을 놓고 적당히 울궈진 차를 찻잔마다 두어 번 나눠서 따른 후, 그 찻물 위에 뒤뜰에서 방금 따온 매화 한 송이를 살짝 놓는다. 순간, 봉오리졌던 매화가 찻잔 속에서 활짝 핀다. 다섯 장 꽃잎이 일순에 열리고 꽃술 끝 노란 꽃밥들이 환히 드러난다. ‘팍’하고 꽃송이 터진 소리가 들린 것 같다.

    찻잔을 받쳐든다. 매화향기가 코끝에 은은하다. 한 모금 맛을 본다. 녹차향과 매화향을 입안에 잠시 머금는다. 혀끝에 감기는 어린 찻잎의 부드러운 맛 속으로 새색시 같은 봄꽃의 수줍은 향기가 배어들고 있다. 이제부터 시작되려는 새봄의 맛이다. 차를 마시는 얼굴들마다 미소가 번지고, 둘러앉은 마음들이 더욱 따사로워진다. 찻잔이 비면 꽃송이만 남은 찻잔에 다시 차를 따르고, 대나무집게로 매화 한 송이를 집어 또 찻물 위에 놓는다. 따뜻한 찻물의 온기로 꽃은 곧 활짝 벌고 매화차의 향기는 좀 더 짙어진다.

    매화 두 송이가 핀 찻잔을 들어 차를 마시며, 이런 아름다운 시간을 갖기란 앞으로도 그리 흔치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함께 차를 즐기면서 차담을 나눌 만한 벗이 있어야 되고, 꽃차는 꽃이 피는 때도 잘 맞춰야 한다. 그리고 장소도 한적한 자연 속이라면 더욱 좋겠다. 매화 중에서도 가장 향이 좋다는 포르스름한 꽃빛의 청매화가 뜰에 한창이라며, 봄 차 한 잔 같이 나누자며 불러주신 분이 새삼 고맙다.

    오후 시간, 이른 봄의 산사는 가끔 절을 지키는 청삽살이의 웅얼대는 소리 외에는 한없이 고즈넉하기만 한데, 뜰에는 소리 없이 매화가 피고 우리들은 차맛과 한담에 취하고 있다. 세 번째 매화송이를 찻물에 띄워 마시고 다식을 함께 곁들이면서 우리의 다회(茶會)는 끝났다. 세 송이의 매화꽃이 남겨진 찻잔에는 좋은 시간을 함께 하려고 청해 주신 마음과, 그 뜻을 고맙게 받으며 찾아뵙는 마음이 어울려 향기로운 차향으로 오래 배어 있으리라.

    삶이란 어찌 보면 약간의 회복과 심각한 악화의 반복이기에 이런 불가해한 삶의 카테고리 속에서 차 한 잔이 주는 안위가 반갑다. 이번 겨울이 우리의 언 발꿈치를 아리게 했어도, 강인하고 견고하게 겨울을 견뎌내 향기로운 꽃을 피우는 매화를 보며, 지혜와 의미가 충만한 새봄을 열어야 하리라.

    봄이 가까워오면 근교 여기저기에 매화가 필 것이다. 몇 송이 따서 호주머니 속에 감춘들 무슨 죄가 되랴. 그런 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매화차 한 잔 할래?”

    손영자(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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