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3월 29일 (금)
전체메뉴

[작가칼럼] 봄날은 온다- 이영수(시인·화가)

  • 기사입력 : 2012-03-30 01:00:00
  •   



  • 다시 봄이다. 아무도 날 찾지 않는데 봄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모든 것이 귀찮아지다가도 봄의 나른함 속에 숨은 생기를 무슨 꽃향기 맡듯이 기막히게 찾아낸다. 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아직도 서툴러 친한 지인 몇을 제외하곤 사람들을 잘 만나지 않는다. 느리게 살며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그 외는 나의 관심 밖이었다.

    봄비에 매화꽃이 피었다. 퇴계 선생께서는 죽음 직전에도 걱정하듯 매화분재에 물을 주었는지 자꾸 물었다고 했다. 나도 한때는 그런 매화를 키우고 싶었다가 포기해버렸다. 나는 퇴계 선생처럼 선비의 곧은 정신도 없을 뿐 아니라 너무 세속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제는 봄비가 매화를 불러냄을 거저 눈으로만 즐긴다. 나는 한동안 매화에게 준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다. 이것도 미련이다. 조만간에 꽃소식이 봄바람을 따라 다투듯이 북상할 것이다.

    그런데 꽃소식보다 먼저 내 뒤통수를 후려치며 남하하는 것이 있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자신을 선택하라며 나를 몰아세우고 있다. 하루에도 몇 통의 홍보 메시지와 설문전화를 받고 화들짝 놀라 수화기를 놓아버린다.

    모든 세상이 다 바뀌고 있는데 변하지 않고 오로지 입만 살아있는 그들이 쓸데없이 일은 많이 했는지, 또 나와서 빈말을 쏟아내고 있다. 저들의 뻔뻔함에 질려하면서도 우리는 그들만의 리그에 심판을 자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산이 세 번 바뀔 세월 동안 목숨같이 해온, 시를 쓰거나 그림 그리는 일을 빼곤, 내가 관심을 갖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오죽을 키우는 일이다. 매화의 빨리 피고 짐이 아쉬워 늘 변하지 않는 오죽에 반해 몇 년의 실패를 거듭하다 이제 겨우 죽이지 않고 키우는 정도가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만나는 지인에게 오죽에 대해 구구절절 말했다. 그런 지인 중 한 분이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소천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가슴 먹먹한 순간 영면한 김충규 시인의 시 ‘간 자의 그림자’를 떠올리며 그의 명복을 빈다.

    ‘가진 것 없으니 어둠이 근친이다 술이 핏줄이다 그렇게 살다간 큰형님은,/오십 중반도 못 넘기고 저승 갔다/간 자가 서럽나 간 자를 보내고 남은 자가 서럽나//모르겠다.// 태양이 몰핀같이,/낮 동안 통증을 잊고 지내라 다그치고/나는 아우로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썼다/어둠이 어둠과 섞여 더 질척해지는 동안/또 다른 누군가도 가진 것 없어 먼저 갈지도 모른다’

    시인과는 같은 해 문학동네로 등단한 문우였고 고향이 진주였다. 그의 시는 아픔의 시였고 먼저 간 자의 그림자를 환영처럼 보면서 몸부림치는 그리움이었다. 늘 서울에 올라가면 만나서 밥을 먹고 진주에 내려오면 만나 그간의 안부를 묻곤 했다. 그런 그가 벌써 소천이라니 이 땅의 소풍이 그리도 고단했단 말인가. 그의 해맑게 웃던 웃음이 그렇게 고통스런 아픔을 숨긴 멍울이었단 말인가. 부디 시인이여 하늘에서는 아파하지 마시게.

    오죽에 물을 주며 죽순이 올라오고 초록의 대나무가 일 년 사이 어떻게 점점 검게 변하는지, 자연의 돌고 돌아옴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보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오죽 주위를 서성거리면서 느낀다. 작은 오죽 분재 하나에도 자연의 조화가 살아 숨 쉬는데 괜히 잘 흘러가는 강바닥을 파다가 또, 어느 날 학교 폭력 근절 어쩌고 하며 아이들의 넘쳐흐르는 힘은 운동을 시켜 소진해야 한다며 체육시간을 몇 시간 늘리면 나아질 것이란 단순한 처방도 내리는 그들에게 다시 자연의 논리로 되묻고 싶다.

    왜 가만히 지켜보지 못하는가. 봄비처럼. 여름의 땡볕처럼, 가을의 단풍처럼, 겨울의 눈처럼 살다 보면, 이 땅 낮은 곳을 향하는 이들의 삶이 비록 조금씩 아프면서 제 빛깔로 빛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 봄날 꽃소식보다 먼저 공허한 정치가 황사처럼 온다. 그리운 벗은 이제 꽃피는 봄날도 보지 못한다. 안녕.

    이영수(시인·화가)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