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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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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근의 우리땅 순례 (70) 황강 17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영원한 선비’ 남명 선생 발자취 따라가며 ‘교육’을 생각한다

  • 기사입력 : 2012-04-18 01:00:00
  •   


  • 남명 조식 선생이 48세부터 60세까지 학문과 제자교육에 열중했던 뇌룡정 전경.
    ?
    남명로 입구 수령 450년 된 느티나무.
    효자비 2기가 나란히 서있는 외토리 쌍비각.
    남명선생 생가지.
    용연사.



    꽃, 꽃, 꽃…. 온 대지가 꽃밭이다.

    추운 겨울 매서운 바람을 떨치고

    매화가 피더니 봄까치꽃이

    따뜻한 흙 담장 밑을

    손톱만 한 꽃망울로 장식을 했다.

    노란 개나리가 지천으로 고개를 내밀고

    붉은 동백이 화단을 단장하더니

    흰 목련도 탐스런 꽃봉오리를 활짝 열고

    노란 산수유도 꽃을 내밀었다.

    4월의 벚꽃은 시간이 다르게 피더니

    이내 봄바람에 눈처럼 떨어져 내린다.

    화창한 봄날 집을 나서 생명이 움트는

    들판 길 위에서 잠시 교육을 생각해 본다.

    한국은 세계에서 대학진학률이

    가장 높은 나라이다. 그런데 아이들이

    가장 자살을 많이 하는 나라이다.

    교육학자 수호믈린스키는 저서에서

    “조화로운 교육은 모든 사람들에게

    깊이 숨어 있는 마음속의

    재부를 발견하는 것이다.

    교육은 바로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부여된 천품이

    모든 분야에서 자기를 가장 원만하게

    표현하도록 하는 데 있다.

    자신을 충분히 표현하는 것,

    바로 이것이 사회의 행복이며

    또한 개인의 행복이다”라고 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영원한 선비이며 위대한 교육자

    남명 조식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 나섰다.


    남명로, 외토리 쌍비

    남명 선생의 생가지를 찾아가는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토동 마을은 의령군 대의면 소재지에서 옛 도로를 따라 국도 34번 아래로 들어서면 남명로 초입이다. 남명로 입구 정자나무 아래 작은 막돌 무더기 옆에 현감 선정비 4기가 있었다. 선정비는 조선시대 현의 우두머리가 선정을 베푼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남명로를 따라 몇 걸음 옮기면 이내 양천강이 유유히 흐르는 곳에 남명교가 있다. 다리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잔잔한 강 위쪽을 보면 푸른 대숲 사이로 뇌룡정 지붕이 보인다.

    남명교를 지나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있고 아담한 쉼터 정자가 있다. 이 나무는 수령이 450년, 높이가 25m이고, 둘레는 5.3m이다. 부근에 남명로 안내판과 함께 남명 선생의 시가 커다란 바위에 새겨져 있어 옮겨 본다.

    홀로 선 나무를 읊다.//무리를 떠나/홀로 서있기에/스스로/비바람 막기 힘들겠지./늙어 감에/머리는 없어졌고/상심하여/속이 다 타 버렸네./아침이면/농부가 와서 밥 먹고/한낮엔/야윈 말이 그늘에서 쉬네./다 죽어가는 등걸에서/무얼 배우랴/마음대로 하늘에 떴다 가라앉았다 하네.

    남명로 안내판에는 선생의 약력과 생가지와 본가를 이어주는 길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효자비인 외토리 쌍비가 비각 안에 있었다. 한 채의 비각 안에 2기가 나란히 서있다. 왼쪽에는 ‘孝子里’라고 새겨져 있고, 오른쪽 것은 비문이 보이지 않는 백비이다. 효자비는 고려 말에 세워졌으며 효행을 행한 마을이라는 뜻으로 효자리라 새기고 뒷면에 효행을 기록해 놓았다.




    용암서원, 뇌룡정


    마을 아래쪽으로 방향을 바꾸면 용암서원과 뇌룡정이 있다. 서원 입구에 서면 커다란 화강암에 남명 선생이 ‘을묘(1555)년에 단성현감을 사직하며 올린 상소문’이 한자와 한글로 새겨져 있다. 시간이 걸리지만 따뜻한 봄바람을 맞으며 읽고 나니 깊게 느껴지는 바가 컸다. 지면 관계상 상소문의 앞부분 일부만을 옮겨 적었다. 꼭 답사길에 가면 전문을 읽어보기 바란다. 남명 선생의 흉상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

    ‘선무랑으로서 단성현감에 새로 제수된 조식은 진실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주상 전하께 소를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선왕(중종)께서는 신이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시고 처음에 참봉에 제수하셨습니다.(1538년임) 그리고 전하께서 왕위를 이으신 뒤에 주부로 제수하신 것이 두 번이었는데 지금 또 제수하여 현감으로 제수하시니 떨리고 두렵기가 언덕과 산을 짊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감히 황종(?) 한 자쯤 되는 땅에 나아가서 하늘의 해와 같은 은혜에 사례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임금이 사람을 쓰는 것은 목수가 나무를 쓰는 것과 같습니다. 깊은 산과 커다란 못 어느 곳에 있는 것이든 재목을 버려두지 않고 그것을 가져다가 커다란 집을 짓는 일을 이룩하는 것은 훌륭한 목수가 하는 것이지 나무가 스스로 참여할 수는 없는 일인 것입니다.-중략- 죽음을 무릅쓰고 전하께 아룁니다.’

    모두 읽고 나면 비장한 생각이 든다. 남명 선생은 48세부터 60세까지 이곳 양천변 용암서원 부근에 있는 뇌룡정에서 학문과 제자 교육에 열중했다. 뇌룡정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는 뜻으로 덕을 갖춘 사람이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묵묵히 있어도 그 덕의 교화가 사람들을 감동시킨다는 의미이니 깊고도 깊은 뜻이 있다. 정자의 본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단촐한 목조기와집으로 정면에 있는 기둥은 서원건축에서는 보기 드물게 원형기둥이다. 세월을 잊은 채 유유히 흐르는 양천강 쪽으로 작은 문이 있어 나가 보니 작은 느티나무가 몇 그루 있고 대나무가 양천강변을 따라 심겨 있었다. 봄바람에 푸른 댓잎 스치는 소리를 뒤로 하고 뇌룡정을 떠나 남명 선생 생가지로 발길을 옮겼다.


    남명선생 생가지, 용연사

    외토리 토동마을 마을회관 앞에 있는 작은 이정표를 보고 고즈넉한 마을 안으로 걸어가다 작은 오토바이를 타고 밭에 나가는 박부기(71) 김숙자(70)씨 부부를 만났다. 생가지를 물었더니 우측 골목길로 가라고 일러주고는 바쁘다고 떠났다.

    생가지에는 원래 집이 두 채가 있어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집을 헐어냈고 뒤편의 대나무들도 모두 잘라냈고 지금은 텅 비어 있었다. 문화재 안내판에는 1501년(연산군 7) 6월 26일에 이곳 외가에서 태어났다고 했으며 생가지를 복원할 것이라 했다.

    생가지를 내려와 토동마을 회관에서 보면 들판에 용연사가 보인다. 경상남도에서 발행한 2011 문화재 목록을 보면 용연사(龍淵祠)가 용연사(龍淵寺)로 되어 있어 절집으로 착각할 뻔했다. 지난번 답사를 했던 함양군 가회면 함방리 문화재자료 제320호 합천구평윤씨신도비(陜川龜坪尹氏神道碑)는 합천파평윤씨신도비(陜川坡坪尹氏神道碑)의 잘못으로 여겨진다.

    용연사는 쌍비의 주인공 이온 선생을 향사하는 곳이다. 용연사 옆에는 용연서원이 있다. 두 건물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항상 자물쇠로 잠겨 있어 월담을 하지 않으면 들어가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관리인의 연락처가 적혀있는 것도 아니다. 용연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옆에는 비각이 나란히 서있다.

    한가로움이 묻어나는 남명로를 따라 삼가면 소재지로 향했다. 토동마을을 벗어나니 길목을 지키는 작은 막돌탑이 있고 산모롱이를 지나는데 작은 비각이 있어 잠시 내렸다. 안내판은 없으나 나무창살 틈으로 보니 ‘유씨이녀정려기’가 있다. 문화류씨 자매가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게 순결을 잃을 입장에 놓이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결을 지켰다고 하여 나라에서 정려각을 세웠다고 한다. 양천을 가로지는 용계교를 지나니 한가로운 농촌풍경이 여유롭게 이어진다.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부근에는 시골이라 음식점이 없다. 의령군 대의면이나 합천군 삼가면 소재지에 합천 황토 한우식당이 여러 곳 있다.

    (마산제일고등학교 교사·옛그늘문화유산답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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