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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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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색소폰과 한평생 권종수 씨

“무대 올라 공연하고 관객 호응해줄 때 최고로 행복”

  • 기사입력 : 2012-07-10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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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색소폰 연주가 권종수 씨는 “색소폰이 인생의 거울이다”라고 한다. 색소폰 연주를 통해 불우한 어린시절을 딛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권 씨가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 모산리 자택 2층 작업실에서 색소폰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제 인생을 살고 싶다. 후회 없는 생을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누구라서 이렇게 답할 수 있을까. 흔히들 말하는 우리네 인생은 후회의 연속인데. 자칫 오만으로 여겨질 수 있음에도 지금의 인생대로 다시 살고 싶다는 말은 결국 그만큼 치열하게 살았다는 뜻에 더 무게가 실린다. 그는 바로 한때 나이크클럽의 대부로 통했고, 다섯 가지 악기를 한꺼번에 연주하는 색소폰 연주자로 명성을 날린 권종수(59) 씨다. 물론 지금도 색소폰 연주자 권종수로 통한다. 권 씨는 지난 1983년부터 13년 이상 교도소 위문공연을 하고 성금품을 전했다. 나이트클럽도 수없이 경영했고, 자선공연도 연간 2~3차례 하고 있다. 그러나 수년 전부터는 수상스포츠에 매료돼 수상스키 예찬론자가 됐다. 지난주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 모산리 그의 자택을 찾았다. 대산면 드넓은 들녘에 위치한 그의 집에 들어서자 구성진 색소폰 소리가 먼저 반긴다. 자택 2층 스튜디오에는 피아노, 드럼, 색소폰, 전자오르간, 녹음시설 등이 갖춰져 있다.


    -최고의 악사를 꿈꾸다

    아버지 재혼으로 마음 삐뚤어져

    가출 반복 등 어두운 유년시절

    1980년 색소폰 배우며 마음 잡아

    틈만 나면 악보 보고 연습


    -나이트클럽 대부로 불리다

    ‘1인 5가지 악기’ 연주로 인기

    나이트클럽 연간 2~3개 운영도

    전국서 벤치마킹 올 정도로 성업

    “업소 정리… 밤무대 인연 끊을 것”


    -음악은 내 삶의 전부

    13년 동안 교도소 위문공연

    작년 3차례 자선무대 마련도

    최근 수상스키 마니아로 변신

    “이젠 보답 차원 공연만 할 생각”



    ▲불우한 어린시절과 색소폰

    권종수 씨의 고향은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 모산리다. 그는 8세 때 모친을 여의었고, 초등 3학년 때 부친이 재혼을 하면서 마음이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13세 때 부친의 호주머니를 털어 무작정 가출, 부산으로 갔다. 큰형에게 붙들려 왔으나 또 가출했고, 창원역 구두닦이들에게 붙잡혀 구두 닦는 일을 시작했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부친에 대한 미움으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배가 고파 구멍가게에서 빵을 훔쳤고, 마산역 빈 객차에서 잠을 자다가 순찰 경찰에 붙잡혔다. 이후 어두운 생활이 지속됐다. 새어머니의 지극한 정성에 감복해 바르게 살면서 제대로 된 직업을 가져야겠다고 작심한 그는 1980년 악대부 출신의 권영수 씨 권유를 받고 드럼과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색소폰 음색이 너무 마음에 들어 색소폰에 매달렸다. 악보 보는 법을 익히고 틈만 나면 연습을 했다. 모두가 잠든 밤에도 일어나 종이를 말아서 키 위치를 그리고 손으로 짚는 연습을 했다. 죽어라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최고의 악사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왼손 새끼손가락 끝마디 뼈를 V자로 잘라 ‘ㄱ’자 형태로 다시 붙이는 수술을 했다. 왼손으로 색소폰을 불면서 오른손으로 전자오르간 건반을 치기 위해서였다. 두 악기를 동시에 연주하려면 왼손의 키 짚기가 용이해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문제아에서 연주자로 거듭났다.


    ▲색소폰으로 되찾은 인생

    권 씨는 1984년 2월 지인의 추천으로 처음 무대에 올랐다. 진해 한 나이트클럽이었다. 하지만 한 달 만에 그만두게 된다. 1인 5역, 즉 1인 5가지 악기를 동시에 연주하는 공연을 준비했는데 색소폰 연주만 하게 했기 때문이다.

    당시 충무시(현 통영시) 한 나이트클럽으로 옮긴 그는 비로소 1인 5역 공연을 시작했다. 징, 북, 꽹과리, 색소폰, 오르간을 연주하고, 노래를 하는 그의 모습은 기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를 보러 멀리서 오는 손님도 생겼다.

    그의 주가도 뛰었다. 이곳저곳에서 부르는 업소도 많아졌다.

    이때를 즈음해 그는 교도소 위문공연을 다니기 시작했고, 13년 동안 공연과 함께 성금품을 전달하는 봉사활동을 했다.


    ▲나이트클럽의 대부로 통하다

    권 씨는 1인 5역 연주뿐만 아니라 당시 연예계에서는 ‘나이트클럽 대부’로 통했다. 그가 나이트클럽을 개업하기만 하면 잘됐기 때문이다.

    그가 나이트를 경영하게 된 계기는 우연찮게 찾아왔다. 마산 합성동 골든벨 나이트클럽서 연주할 때 그의 연주에 반한 한 여성이 그에게 직접 경영해볼 것을 권했고, 당시 돈으로 선뜻 4000만 원을 빌려줬던 것이다. 마산지역 집 한 채 값이 1200만 원 하던 시절이다. 그렇게 나이트클럽 대표가 된 그는 사업이 잘돼 얼마 지나지 않아 빚을 다 갚았고, 1억6000만 원에 클럽을 팔았다.

    이를 기반으로 권 씨는 직접 공연을 하는 한편, 본격적으로 나이트클럽 경영에 나섰다. 창원, 마산, 통영, 대구, 울산, 광주, 제주도 등에서 새로 신축 개업하고 임대로 오픈했다. 연간 2~3개의 나이트를 지속적으로 경영했다. 동시에 4개소를 운영한 적도 있다고 했다.

    권 씨는 “일본서 유행하던 최신식 시설도 도입했고, 오픈하는 나이트마다 히트를 쳤다. 전국 나이트에서 벤치마킹을 오기도 했을 정도였다. 나이트클럽 천장이 열리는 무대시설도 일본에서 보고 처음으로 국내에 도입했다”고 말했다.

    권 씨는 가수 나훈아와 의형제 사이다. 1989년 12월 창원 공연을 온 나훈아 씨가 막간 휴식 중 그의 공연하는 모습에 반해 의형제를 맺자고 했던 것이다. 지난 1999년 12월에는 의형제 10주년 행사도 나훈아가 마련했다. 지금도 가끔 연락하고 지낸다고 했다.

    권 씨는 3~4년 전부터 나이트클럽 정리를 시작했고, 지금은 하나 남은 광주 모 나이트클럽을 매물로 내놓고 있다. 팔리고 나면 완전히 밤업소와는 인연을 끊을 생각이다.

    “그동안 꽤 벌었을 것 같은데, 재산이 얼마나 되느냐”는 물음에 그는 “건강이 재산이죠 뭐”라며 웃었다.


    ▲수상스포츠 제2의 인생

    권 씨는 잘나가던 시절인 1989년 첫 일본 공연에 나섰고, 업소에서 정기공연도 했다. 4년여 전에는 태국 방송에도 출연하고 업소에서 정기공연을 했다. 당시 1년 6개월 동안 전 가족이 태국에서 함께 지냈는데, 그때 수상스키와 인연을 맺었다. 수상스키를 하면서 아이들과도 아주 가까워졌다. 건강도 지키고 가정화목에도 도움이 되는 수상스키는 이제 그에게서 떼어 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반려자가 됐다.

    그는 거의 매일 자택 인근 낙동강에 설치돼 있는 수상스키 계류장으로 가서 수상스키를 탄다. 지난해에는 창원시 생체협 수상스키연합회를 결성하고, 회장이 됐다. 현재 회원 수는 140~150명에 이른다. 나이트계의 대부에서 수상스포츠 불모지의 전도사로 변신한 것이다. 무료로 강습도 하고 있다. 초보자에게는 처음 무료 시승하게 하고, 이후 배우고 나면 기름만 가져오면 된다고 했다.

    권 씨는 “부모와 자식 간에 대화가 안 된다면 수상스키를 배워라. 같이 배우면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게 된다. 서로 공감대 형성에 아주 좋다”고 예찬론을 펼쳤다.


    ▲그에게 여생은

    어려움이 닥치면 깡다구로 버텨 왔다는 권종수 씨. 그는 지난해에도 ‘권종수 색소폰 콘서트’ 이름으로 세 차례 자선공연을 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공연을 지양할 생각이다. 준비하는 시간이 너무 길고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동안 도움을 준 지인들에 대한 보답 차원의 공연은 응할 요량이다.

    색소폰 연주 연습은 요즘도 하루 1시간 이상씩 한다. 입 주위 근육이 풀어지면 연주를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음악은 인생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 씨에게는 아내(차필순·48)와 세 아이가 있다. 둘째와 셋째는 미국에 있다. 그의 바람은 아이들이 건강하고 바르게 성장하는 것이다.

    굴곡진 청년시절을 보내고 이제 남부러울 것 없는 위치에 올라선 그에게 가장 행복했던 때를 물었다.

    “무대 위에 올라 공연하고, 관중들이 크게 호응해줄 때가 최고로 행복했죠.”

    글=홍정명기자 jmhong@knnews.co.kr

    사진=김승권 기자 s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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