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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7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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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문장철 마산 창동예술촌장

“창동의 무너진 상권, 예술로 되살릴 겁니다”

  • 기사입력 : 2012-07-24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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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장철 창동예술촌장이 1950년대 마산르네상스 시절의 추억거리를 재연한 창동예술촌 마산예술흔적거리에 섰다. 문 촌장은 창동을 예술상권으로 변모시켜 부활을 꿈꾸고 있다.
    문장철 촌장이 창동예술촌에 입주한 정혜경 유리공예공방 대표와 대화하고 있다.


    6살 때 부모 이혼 후 친척 집서 자라

    중학교 때 아버지 문신 선생과 재회

    고교 때 파리 건너가 건축미술 공부

    도시디자인·경관조명 영역 넓혀



    88서울올림픽 때 귀국 조각공원 기획

    프랑스 장기체류증 포기하고
     
    국내 미술시장 뛰어들어 전국 누벼

    2년 전 귀향해 마산상권살리기 용역



    창원시 프로젝트 공모하면서

    마산 창동예술촌장 자리 맡아

    창동세계예술제 내년 목표로 준비 중

    "창동에만 있는 예술상권 보여줄 것"



    경남의 상권 1번지였던 마산 창동과 불종거리. 창동과 불종거리가 사람과 사람에 밀려 길을 지나야 할 정도로 북새통을 이룬 것이 그리 오래된 기억은 아니다. 하지만 마산 창동과 불종거리는 신흥도시 창원에 밀려 사람들과 상권이 떠나고, 급기야 젊은이들마저 마산 합성동 쪽으로 빠져나가면서 마산의 원도심지인 창동이 공동화돼 오늘에 이른다.

    마산 창동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후 서울과 부산, 파리 등지서 활동하다 중년기에 다시 창동으로 돌아온 마산 창동예술촌 문장철(59) 촌장. 어린 연어가 고향을 떠나 험난의 대양을 누비고 귀향해 또 다른 생명을 고향에서 탄생시키듯, ‘예술상권으로 도시부활’이라는 톡특한 기치와 일념으로 창동과 마산상권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문장철 촌장을 창동예술촌 골목길에서 만났다.


    ▲격동의 현장, 창동에서 태어났지요

    문장철 촌장은 세계적인 조각가 故 문신 선생의 1남 2녀 중 장남이다. 처음 문 촌장을 만났을 때 문신 선생이 살아서 창동에 다시 나타났나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풍채와 인상이 아버지 문신 선생을 쏙 빼닮아 있었다.

    문 촌장은 창동 삼성생명과 동광교회 사이 골목길 안쪽에 있던 증조부모댁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할아버지가 물려준 마산 추산동 언덕의 농원에서 자라면서 그 당시 문신 선생이 직접 만들어 유명했던 베이비골프장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문신 선생은 문 촌장의 생모인 이성숙씨와 지난 1957년 이혼했다. 문 촌장의 그때 나이는 6살.

    보헤미안 같은 아버지를 대신해 친척 아재들이 문 촌장을 키웠고, 마산 창동4거리(현 더페이스 샵과 건너편 모퉁이)에 있던 아재의 가게인 부용청주잡화상에서 어린 시절부터 술배달하면서 몰래 청주도 마시고 취해 비틀거리기도 했다.

    1959년에 불어닥친 사하라 태풍의 기억도, 1960년 3·15가 일어났을 때 불타는 창동 사거리와 남성동파출소를 철모른 채 마냥 좋다고 뛰면서 장난쳤던 기억도 뇌리에 아직 남아 있다.

    그런 문 촌장은 성호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마산중학교 1학년 때인 1965년 아버지 문신 선생을 다시 만났고, 고교 1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건너갔다.

    문 촌장은 “파리에 도착하니 아버님은 독일계 프랑스 여인인 리아(Lia)와 살면서 화랑을 운영했는데, 리아가 오늘날 유명 조각가 문신을 만든 주인공이기도 하다”고 소개했다.

    문 촌장은 파리에서 순수미술과 건축미술 공부를 하면서 예술과 도시를 접목하는 도시디자인과 경관조명 분야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자방자치단체의 프로젝트와 컨설팅 연구를 통한 프로젝트 기획사업을 많이 연구해 현재는 부산시 도시디자인위원, 부산시 시정연구위원으로 위촉돼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1995년 5월 24일 문신 선생이 타계하자마자 아버지의 작품을 한곳에 모아놓은 문신미술관(재단)에서 1년 6개월 동안 관장으로 있으면서 어릴 적 창동과 현재의 창동을 비교체험하면서 도시디자이너로서 창동 발전에 골몰하기도 했다.


    ▲몰락하는 창동 보며 불면의 나날 보냈어요

    문 촌장은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귀국하게 된다. 올림픽조각공원 조성기획서를 올림픽조직위원회에 제출해 일반직 2급 공무원으로 채용됐고, 지금도 남아 있는 서울 송파의 88올림픽조각공원이라는 대역사를 문 촌장의 기획으로 만들게 된다.

    이후 문 촌장은 프랑스 장기체류증을 포기하면서 국내 미술시장에 뛰어들었고, 국내 미술시장에서 쓴맛 단맛 다 보며 절치부심 도시디자이너로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찾으면서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문 촌장은 경남 최고 1번지를 구가하던 창동이 한순간에 무너진 것은 도심 공동화를 대처하는 준비와 의식의 문제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화려했던 옛 창동의 영광만 생각하면서 마냥 기다리는 지역상인과 주민들의 포기 상태가 더욱 처절한 상황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특히 통합창원시라는 균형발전 차원에서 더더욱 마산의 뿌리 찾기에 그 초석을 놓지 못하고 분쟁만 만들면서 급기야 ‘마산르네상스’의 기운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마산사람은 떠나고, 출향민은 돌아오지 않고, 원주민들은 마냥 그날을 기다리고, 젊은이들은 합성동으로 가고, 특별한 상권은 없어지고, 볼거리·먹거리조차 없어지면서 창동의 매력이 사라진 것이다.

    창동의 붕괴로 번민하던 문 촌장에게 창동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2년 전 중소기업청 사업으로 ‘지역상권살리기’ 정책사업 용역을 맡게 된 것이다. 이 용역을 통해 마산 원도심의 뿌리와 가치, 문제점을 조사·분석·개선할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정책용역을 수행하면서 창동에 즐비한 빈 점포를 보면서 골목 한편에서 목놓아 울어버렸다는 문 촌장은 울고 있던 그 골목길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영감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고 한다.

    문 촌장은 “함께 실사하던 중소기업청 전문가들도 창동의 몰락을 보면서 눈시울을 적실 때 저는 그 자리서 해답을 얻었다”며 “마산에는 문신도 있고, 천상병도 있고, 이은상도 있는데, 그들이 바로 여기서 태어나고 활동한 곳인데, 그들을 되살려보자는 영감. 그때 바로 이거구나 하면서 떠오른 게 ‘마산 부활의 가치와 가능성은 마산의 뿌리와 예술’이라는 해답이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마디로 예술을 통해 창동과 마산을 살려야 한다는 정답을 찾은 것이다.

    그 같은 해답을 중기청 전문가들에게 역설한 때문인지 마산지역이 중기청 지원 6개 상권살리기사업에서 전국 1순위로 선정되는 쾌거를 이뤘고, 자신이 태어난 창동으로 돌아오기 위해 가장 잘한 일이라고, 언젠가는 해야 할 임무였다고 생각하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40년 만에 돌아온 창동에 뼈 묻을 겁니다

    창동과 마산을 살리기 위해 불면의 밤을 수없이 지샌 문 촌장.

    중년을 맞은 문 촌장에게 자신의 예술역량을 만방에 떨칠 수 있는 2개의 길이 동시에 놓이게 된다.

    하나는 △중소기업청 200억 원 지원의 마산 6개상권살리기 사업 총괄매니지먼트를 준비하는 일과 △창원시 20억 원 지원의 마산 창동 빈점포 채우기를 통한 도시재생 상권살리기 프로젝트에 공모하는 두 가지의 길.

    문 촌장은 200억 원을 주무르는 자리를 포기하고 창동을 특화시키는 창원시의 프로젝트에 공모하면서 창동예술촌 촌장이라는 자리를 선택했다.

    문신미술관 활성화, 돝섬 테마파크, 통합창원시 전략사업 등 풍부한 도시디자이너 경험을 토대로 많은 정책 제안을 지자체에 전달하고, 지역 유지들과도 교감도 가지면서 수구초심해 온 결과물이 창동예술촌 촌장인 것이다.

    그런 문 촌장의 각오와 포부는 대단하다.

    ‘고향 마산에 뼈를 묻는다’는 각오로, 세계적인 창동예술촌 만들기라는 인생의 마지막 작품 창조에 예술촌 입촌작가들과 머리를 맞대며 하루하루 결실이 영그는 나날을 지휘하고 있다.

    창동예술촌은 3개 테마가 흐르는 예술인과 예술상인이 함께하는 복합 예술촌이다. 예술적 가치를 복원하는 추억골목, 창작공간, 문신예술체험 테마파크 골목이 주 골자인데, 1차적으로 50개 창작공간과 점포 등이 입주해 있다.

    문 촌장은 창동살리기는 이제 걸음마를 뗐다고 한다. 한마디로 출항했다. 창조적 도심 속의 예술촌이라는 비전과 목표를 향한 긴 항해.

    하지만 수많은 암초와 폭풍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문 촌장은 잘 알고 있다.

    입주작가들의 창작의욕을 고취시켜야 하고, 예술촌을 찾는 시민과 관광객들의 다양한 만족도도 끌어올려야 한다.

    문 촌장은 “수년간 해결하지 못한 상권 살리기는 단순 관광지나 체험골목으로 해결이 안된다”고 하면서 “어디에도 없는, 창동에만 있는 창조적 예술상권이 그 해답이다”고 단언했다.

    그래서 지역민들이 ‘이제 예술상권이 정답이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는 게 문 촌장의 주문이다.“지역공동체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이 시점에서 촌장의 역할은 보다 빠른 시일 내에 유령 같은 새로운 상권의 실체를 보여주는 일”이라는 문 촌장은 “입주작가들, 시민들, 행정기관 등 모두가 한마음으로 애착을 갖고 촌장을 밀어줘야 한다”고 당부했다.

    문 촌장은 창동예술촌이 마산예술촌으로 확장되고, 더욱이 ‘마산예술특구’로서의 기반 조성과 특별한 상권 조성의 초석을 다지는 구상을 추진하겠다고 귀띔했다. 이를 위해 세계적 예술도시 진입을 위한 ‘창동세계예술제’를 내년부터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 중이란다.

    예술특구가 마무리되는 내년 하반기에는 ‘유네스코 창조도시 네트워크’ 가입 준비를 하면서 창원시의 글로벌 명품문화예술도시라는 국제도시브랜드 강화에도 매진하겠단다. 창원시에서도 마산의 도시브랜드 제고와 원도심 재생에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고 있어 행정의 소신과 지원이 고맙다고 문 촌장은 강조한다.

    숱한 상처를 안고 이제 부활을 위해 걸음마를 뗀 창동예술촌. 중년의 촌장이 고향에서 뼈를 묻겠다고 자신만만해 하는 창동예술촌. 촌장과 작가들과 시민들과 행정기관이 어우러져 창동의 무너진 영화를 예술로 복원하는 창조적 예술역량이 기대된다.

    글=조윤제 기자 cho@knnews.co.kr

    사진=김승권 기자 s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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