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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을 가다] 작가와 떠나는 경남산책 ⑧ 송창우 시인이 찾은 통영 비진도

작가와 떠나는 산책- 송창우 시인이 찾은 비진도
잘록한 허리… 부드러운 곡선… 새하얀 속살… '미인도'

  • 기사입력 : 2012-07-26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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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영 비진도는 안섬과 바깥섬이 백사장으로 연결돼 마치 위에서 보면 두 섬이 장구 모양을 하고 있다.
    내항마을에 있는 빨강 지붕이 푸른 바다와 대조를 이룬다.
    비진도 숲에는 팔손이 나무와 같은 난대성 수목이 많다.
    관광객들이 여객선에서 갈매기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비진도에도 해녀들이 있고, 해녀민박촌도 있다.


    통영에는 섬이 많다. 통영 바다에는 526개의 섬들이 점점이 박혀 빛난다. 하늘과 바람과 파도는 천고의 세월을 거치며 바다 위에 천태만상의 섬들을 빚어놓았다. 시인 정지용은 미륵산에 올라 대자연이 빚은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문필로는 묘사할 능력이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만중운산 속의 천고절미한 호수’라는 한 표현을 남겼으니, 통영바다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선경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그 천고절미한 호수의 한가운데에 비진도가 있다. 푸른 수면 위로 두 개의 둥근 섬이 봉긋 솟았는데 섬과 섬 사이로 모래톱이 생기며 하나로 이어졌다. 그래서 지도에서 보면 비진도는 흡사 아령이나 장구를 닮았다. 사람들은 두 개의 섬을 안섬과 바깥섬이라 부른다.

    비진도 가는 길은 매물도 가는 길과 겹친다. 그래서 같은 배가 운항되는데 비진도까지는 40분쯤 걸리고 매물도까지는 한 시간 20분쯤 걸린다. 배는 하루에 세 번 떠난다. 배를 타고 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소매물도로 간다. 소매물도의 등대섬이 개방되기 이전까지는 비진도를 찾는 이가 많았지만, 요즘은 소매물도가 대세다. 그래서 요즘 비진도는 좀 외로운 섬이 되었다.

    11시에 통영여객선터미널을 출발한 배는 도남관광단지를 지나며 속력을 높인다. 나는 2층의 선미에 앉았다. 뒤쪽으론 아름다운 통영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양쪽으론 한산도와 산양면의 풍경들이 잇따라 펼쳐진다. 간간이 비가 흩뿌리는 날씨에 산은 부드럽고 만은 더 깊다. 한산도의 끝자락을 지나고 다시 용초도와 연대도 사이를 지나온 배는 안섬 내항마을에 잠시 들렀다가 바깥섬에 있는 외항마을 선착장에 나를 내려놓고 떠났다.

    비진도 해수욕장이 있는 외항마을. 선착장은 바깥섬에 있고 마을은 안섬에 있다. 선착장에서 마을까지 가는 길은 채 10분이 걸리지 않지만, 바깥섬을 한 바퀴 둘러보고 가면 족히 두 시간은 걸린다. 바깥섬엔 제법 우뚝한 외산(312m)이 솟아 있고, 외산 꼭대기는 신선들이 구름을 타고 내려와 놀았다는 선유대다. 오늘처럼 하늘이 낮고 구름이 산을 휩싸고 있는 날은 망망대해의 바다를 만나기는 어려워도 신선을 만날 가능성은 높다.

    바깥섬엔 비진도 산호길이 있다. 한 사람이 지날 만한 조붓한 길은 대나무 숲을 지나, 동백나무와 사스레피나무 그늘을 지나 산으로 이어진다. 인적이 드물었던 숲은 원시림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데 오래된 나무들에는 콩짜개덩굴이 자라고 있고 축축한 길섶에는 큰천남성들이 기이한 꽃을 밀어올리고 있다. 꽃은 흡사 독사가 머리를 쳐들고 있는 것만 같은데, 모양처럼 천남성은 옛날 사약의 재료로 쓰였던 맹독성의 무서운 풀이다.

    옛날 한이 많은 이들이 천남성 가루를 가슴에 품고 다녔다고 했다. 아마 섬사람들 중에도 삶에 지쳐서, 외로움에 지쳐서 천남성 가루를 가슴에 품고 이 길을 올랐던 이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산의 8부 능선쯤 비진도의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바위에 앉으면 당장에 죽고 싶었던 사람들도 마음을 되돌리게 된다. 그냥 깨끗이 잊어버리기에는 삶의 자리가 너무 아름답다.

    안섬과 바깥섬을 잇는 길은 새하얀 백사장과 검은 자갈밭을 동시에 품고 있다. 그 길을 사이에 두고 바다는 서로 가까워질수록 비췻빛으로 빛나고 멀어질수록 코발트블루로 빛난다. 비진도는 달리 ‘미인도’로도 불리는데, 이곳에서 보면 그 까닭을 알게 된다. 잘록한 허리, 부드러운 곡선, 새하얀 속살. 미인은 속살이 훤히 내비치는 비췻빛 주름치마를 입고 치마 끝에는 하얀 레이스를 달았다. 파도가 일 때마다 새하얀 레이스가 나풀거린다.

    그리고 섬사람들은 해변 끝자락에 원색의 지붕을 올리고 산다. 빨강, 파랑, 주홍의 지붕들은 비췻빛의 바다와 새하얀 백사장과 초록의 난대림과 어울리면서 강렬한 이미지를 전해준다. 꾸밈도 없고 섞임도 없는 순수한 날것이 지닌 원초적 아름다움이라고 할까. 통영 화가 전혁림의 원색들은 어쩌면 저 섬사람들의 지붕에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지붕 아래의 삶은 치열하고 열정적이다. 그러나 밀물에는 견디기 힘든 외로움이 삐꺽 문을 열고 들어오기도 한다. 원색의 지붕들은 한 가지씩 상실의 아픔을 품고 있는데, 바다에 나가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고, 사라호 태풍에 휩쓸려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고, 어느 날 보따리를 싸고 뭍으로 도망가버린 그리운 이름들이 있다. 그들은 마치 해무 속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섬들처럼 잊었다 싶으면 불쑥불쑥 떠오른다. 섬에서 산다는 건 그런 그리움을 견디며 스스로 섬이 되어 가는 것이다.

    선유대에 오르면 한려수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매물도, 욕지도, 연화도, 두미도, 연대도, 용초도. 수많은 섬들이 또한 해무 속에 잠겨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새로운 섬 하나가 나타났다가는 사라진다. 그 섬들 중에는 내가 잃어버린 섬도 있다. 사람은 없고 흔적만 남은 수포마을을 지나 비진암을 지나 다시 외항으로 돌아왔을 때는 날이 개고 있었다. 햇살은 백사장 쪽에서 빛나고 자갈밭 쪽에서 어두워진다.

    비진도로 놀러온 사람들은 주로 백사장에서 놀고 섬에서 사는 사람들은 주로 자갈밭에서 산다. 자갈밭 쪽 해변에선 몇 명의 해녀들이 물질을 하고 있다. 검은 잠수복을 입고 오리발을 흔들며 바다 속으로 사라진 해녀들은 한참 후에 물 위로 불쑥 머리를 내민다.

    그럴 때마다 ‘호오이 호오이’ 숨비 소리를 내는데, 그것은 숨을 참고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사람들만이 낼 수 있는 혼의 소리다. 그 소리는 때론 너무 처연하여서 마음을 아프게 한다.

    외항마을을 돌아가면 내항마을로 가는 길이 나온다. 숲 사이로 난 길은 30분쯤 이어지는데 산책하기에 아주 그만이다. 비진도의 숲은 난대림이다. 동백나무, 후박나무, 생달나무, 참식나무, 개비자나무, 팔손이나무들이 자란다. 난대림의 상록잎들은 초록이 짙고 빛나는 잎을 가졌는데 잎사귀들마다 튕기는 햇살이 눈부시다. 참식나무는 한창 열매들을 매달고 있는데, 반지르르 윤기 나는 열매가 또한 비췻빛이다. 이 열매는 여름을 지나며 점점 붉은 물이 들고 가을에는 마침내 루비처럼 빛날 것이다.

    난대수목들 중에 비진도를 대표하는 것은 팔손이나무다. 넓은 잎사귀가 손바닥을 닮았는데 손가락이 여덟 개거나 아홉 개다. 이 팔손이나무의 북방한계선이 바로 비진도다. 비진도에는 키 큰 나무들 아래 팔손이나무들이 자생하는 숲이 있는데, 천연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되어 있다.

    내항마을은 외항마을의 풍경에 견주자면 좀 소박한 마을이다. 15년 전쯤 나는 이 마을 뒤쪽에 있는 비진도 분교엘 다녀간 적이 있다. 그때 그네를 타며 바다를 바라보던 기억이 오래 지워지지 않아서 다시 분교를 찾아갔는데, 그네는 그대로 있고 아이들은 없다. 교문 입구에는 1023명의 졸업생을 끝으로 올해 3월 폐교가 되었다는 아쉬운 안내문만 붙어 있다.

    막배는 내항마을 선착장에 4시 40분에 온다. 이 막배를 놓치면 파란대문이 유혹하는 해녀민박집에서 밤바다 소리를 듣고, 해삼에 소주 한 잔을 하고, 다음 날 아침 일출을 볼 수 있다. 그대라면 어떻게 하시겠는가? 불현듯 섬으로 떠나고 싶은 날들이 있다. 흔들리고 싶고, 약간은 멀미를 하고 싶고, 막배를 놓치고 싶은 날. 살다 보면 그런 날들이 있다. 그럴 때 비진도로 한번 떠나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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