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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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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을 가다] 작가와 떠나는 경남 산책 ⑨ 배한봉 시인이 찾은 얼음골과 밀양

얼음골서 무더위 식히고 영남루서 밀양아리랑 불러보네
가만히 있어도 온몸에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날 얼음골 가는 길목 곳곳엔 물놀이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

  • 기사입력 : 2012-08-02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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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 최고 누각 중 하나인 밀양 영남루.
    여름 피서객에 인기 있는 긴늪에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다.
    밀양시 산내면 남명리 얼음골 결빙지. 동행한 얼음골 관리소장의 협조를 받아 철망을 걷고 가까이서 살펴보니 초록 이끼가 덮인 바위 사이에 흰 얼음이 있다.
    얼음골 주차장 옆 구름다리 아래 계곡에서 피서객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다.
    얼음골에서 왼편으로 10분 정도 가면 나오는 수가마불 폭포가 시원한 물을 쏟아내고 있다.


    이보다 더 시원할 수 없다. 암석들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너들지대에서 냉기가 흘러나온다. 한여름 폭염 속인데도 자연이 만든 찬바람은 에어컨을 세게 틀어놓은 것 같다. 아니 에어컨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차고 맑은 바람이다. 온몸 흐르는 땀이 금세 서늘하게 식는다. 결빙지 바위틈에 하얀 얼음이 꽁꽁 얼어 신비감을 더해 주는 경남 밀양시 산내면 남명리 얼음골이다.

    얼음골은 천혜의 자연 냉장고. 별명은 청개구리 골짜기. 너덜지대의 바위틈에 여름이면 얼음 얼고 겨울이면 얼음 녹는 희한한 골짜기라서 그렇다. 한자로는 빙곡(氷谷), 또는 찬바람이 나온다고 해서 풍혈지라 불린다. 세계에서 우리나라와 미국, 일본에서만 발견된다.



    잎 하나 까딱 않는

    30 몇 도의 날씨 속

    그늘에 앉았어도

    소나기가 그리운데

    막혔던 소식을 뚫듯

    매미 울음 한창이다.



    계곡에 발 담그고

    한가로운 부채질로

    성화같은 더위에

    달래는 것이 전부다.

    - 박재삼, <혹서일기> 부분



    가만히 있어도 온몸에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혹서기 7월 말. 더위의 기세가 얼마나 센지 폭염경보까지 내려졌다. 낮 기온이 38도를 웃돈다. 뉴스에선 일사병 환자가 속출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삼복 중에도 냉장고만큼이나 찬바람을 뿜어내는 곳, 발을 담그면 온몸 시려지는 계곡물이 절로 떠올라 시인 박재삼 선생의 시 <혹서일기(酷暑日記)>를 중얼거리며 밀양 얼음골 찾아간다. 얼음골 생각만으로도 벌써 몸이 시원하다.

    밀양시내에서 산내면 쪽으로 빠져나가면 이내 긴늪의 솔숲, 기회송림이 보인다. 기회송림에는 피서객들이 쳐놓은 알록달록한 텐트가 즐비하다. 긴늪에는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다. 다시 24번 국도 울산방향 밀양대로를 24km 정도 가다 남명삼거리에서 얼음골 방면 좌측으로 향하면 이내 얼음골 입구 주차장이다.

    얼음골 주차장 옆 구름다리 아래 수위 낮은 곳에서 가족단위 피서객들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얼음골을 거쳐 온 차가운 얼음물이 철철 흘러내리는 계곡. 물빛이 어찌나 맑은지 멀리서도 바닥이 훤하게 들여다보인다. 다리를 건너 숲길로 들어서면 벌써 공기의 느낌이 다르다. 후끈거리던 주차장의 시멘트 복사열 대신 숲의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얼음골로 가는 길목 곳곳에 주민들이 좌판을 펼쳐 얼음골 파란사과를 팔고 있다. 밀양 얼음골은 조석 기온차가 커서 사과 맛 좋기로 유명한 곳. 사과를 한 봉지 사들고 10분쯤 오르니 천황사라는 작은 절이 있다. 법당인 대광명전에는 통일신라시대 때의 석불좌상(보물 제1213호)이 모셔져 있다. 좌대 둘레에 11마리의 사자상이 새겨진 것이 특징이다. 절간 마당 한쪽에 만들어진 음수대에서 한 바가지 물을 들이켠다. 달다. “오가는 행인 더위에 지쳤는데/ 시원한 물을 길가에서 만났네/ 조그만 샘물 온 나라를 적시니/ 두 번 절하고야 맛볼 수 있네.” 이규보 선생의 <시원한 샘물[寒泉]>이라는 시가 실감나는 순간이다.

    천황사 입구부터 해발 600m 얼음골까지는 너덜지대이다. 돌계단을 따라 얼음골을 향해 오를 때는 사부작사부작 느린 걸음으로 가야 한다. 걸음걸음 소름이 돋을 듯한 냉기가 부딪쳐 온다. 역시 얼음골이다. 찬 계류에 손을 넣어본다. 동행하던 김영근 얼음골관리소장은 1분쯤 있으면 그 진가를 알 수 있을 것이라며 껄껄 웃는다. 1분은커녕 그 반도 안 지났는데 손끝이 시려 마비되는 느낌이다. 계곡 물의 온도는 평균 5도 정도. 인내심 강한 사람도 손을 담그고 2분 이상 견디기가 어렵다.

    어느새 얼음골 결빙지다. 결빙지에는 훼손을 방지하기 위한 철제 보호대가 둘러쳐져 있다. 결빙지 앞에서는 관광객들이 한겨울에나 볼 수 있는 얼음을 살펴보기 위해 기웃거리고 있다. 이곳에 와서 바위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려 있고 바닥에는 두꺼운 얼음이 깔려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철제 보호대로 결빙지를 막아놓아 얼음을 가까이서 볼 수 없다. 얼음이 있는 곳 역시 만약에 있을지 모를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철망으로 덮어 놓았지만, 자세히 보면 바위틈새의 얼음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다.

    이곳 얼음골은 천연기념물 제224호로 지정되어 보호받는 귀하신 몸이다. 약 1만㎡ 규모로 해발 1189m의 천황산 북쪽 중턱에 있다. 얼음골 터줏대감 김영근 소장의 협조를 받아 씌워놓은 철망을 걷고 가까이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촉촉하게 젖은 초록 이끼가 덮인 바위 사이에 흰 얼음이 있고, 낙엽 몇 장이 흩어져 있다. 결빙지 바위틈에 놓아둔 온도계는 섭씨 0도를 가리키고 있다.

    밀양 얼음골 얼음은 3월 중순께 얼기 시작해 빠르면 7월 말, 늦으면 8월 초까지 유지된다. 4월부터 시작되는 우기에 맑은 날이 많고 더위가 심할수록 더 많이 얼고 더 오래 유지되는데, 올해는 비가 자주 와서 예년보다 얼음이 적게 언 편이다. 삼복더위를 보내고 처서(處暑)쯤 되면 얼음골 바위 틈새의 냉기가 점차 줄어들고, 주변 기온과 비슷해진다. 얼음골 주변 계곡은, 겨울에는 물이 잘 얼지 않고, 오히려 바위틈에서 따뜻한 기운이 올라와 고사리와 이끼가 새파랗게 자라는 신비한 이상기온지대이다. 근래에는 한반도 미기록 이끼류가 이곳에서 발견돼 생태계의 중요 연구지로 주목받았다. 밀양 얼음골의 여름철 결빙현상은 워낙 특이한 일이라 아직까지도 그 신비에 대한 정확한 답을 찾지 못했다. 여러 설이 있지만, 너덜을 이루는 화산암이 겨울에는 냉기를 저장하고 여름에는 온기를 저장해 여름에는 겨울의 냉혈을 내뿜고 겨울에는 온기를 내뿜는 사이클을 반복하고 있다는 재생기 효과(Regenrator effect)로 설명되기도 한다.

    동·서·남 삼면이 기암절벽으로 둘러싸여 절경을 이룬 밀양 얼음골을 체험한 뒤 주변의 비경을 여행하는 재미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얼음골에서 왼쪽으로 10분 정도 가면 ‘가마볼’ 협곡이 나온다. 흘러내린 계곡물에 의해 우뚝 솟은 거대한 절벽 두터운 암반이 깎여나가 계곡이 마치 가마솥을 걸어놓은 아궁이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오른쪽에는 암가마불 폭포, 왼쪽에는 수가마불 폭포가 수십미터 높이에서 시원한 물을 쏟아 내린다. 계단이 많아 걷기 불편하다고 짜증냈던 사람도 안 왔으면 후회할 뻔했다고 말할 만하다. 얼음골 근처에 있는 호박소와 오천평 바위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왔던 길을 되돌아 나오면서 밀양강변의 월연정을 거쳐 우리나라 최고의 누각 중 하나인 영남루를 살펴본다. 아랑낭자의 전설이 깃든 아랑각이 영남루 아래 강기슭에 있다. 그래. 밀양은 자연과 문화가 숨 쉬는 아름다운 고장. 얼음골에서 한여름의 폭염을 씻고 와 밀양강가에 앉았으니, 내가 밀양사람이라면 오늘 같은 날은 밤하늘의 달과 별을 술잔에 띄우고 강바람을 안주 삼아 영남루 야경에 흠뻑 취하였으리라.

    밀양은 아리랑의 고장. 강 건너 영남루 솔밭에서 누가 밀양아리랑을 부르는 것 같다. 기왕 밀양 왔으니 기괴한 나무가 있다는 위양못에 들렀다 가야겠다고 걸음을 옮기며 나도 따라 불러본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조옴 보오오소~” /글·사진●배한봉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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