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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3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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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왕·신하 예복 장식물 ‘후수(後綬)’ 공예가 임지은 씨

“한올 한올 한국 美를 엮고 전통 맥을 잇습니다”

  • 기사입력 : 2012-08-28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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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통 매듭공예가 임지은 씨가 창원역사민속관 옆 창원마루에서 당상관의 후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임지은 씨가 창원역사민속관 내 연지화공방에서 자수노리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미술협회 잠시 근무하기는 했지만

    결혼 후엔 평범한 주부로 살았어요

    아이 교실 환경미화 도우면서

    잠재된 예술적 재능 발견하게 됐고

    매듭공예 배우러 대전까지 찾아다니며

    노리개 매듭기법 열정적으로 배웠죠


    매듭 분야서 어느 정도 경지 올랐을 때

    망수기능 전수자인 장순례 선생 만나

    1년간 서울 오가며 ‘후수공예’ 배웠어요

    우리네 삶의 모습과 닮은 매듭공예

    요즘 젊은이들 힘들다고 꺼려해요

    지역 대학에 전공학과 신설했으면…



    우연하게 접한 분야를 천직(天職)으로 여기고 몰입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보통사람들이 힘들다며 꺼려하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다.

    창원시 의창구 사림동 ‘창원의 집’ 부근에 매듭공방을 열고 20년 넘게 전통 매듭공예가의 길을 걷고 있는 임지은(50) 씨가 바로 그와 같은 부류의 ‘예인(藝人)’이다.

    임 씨가 외곬으로 천착하고 있는 분야는 전통 매듭공예의 한 분야인 ‘후수(後綬) 공예’.

    조선왕조를 다룬 사극을 보면 문무백관들이 입고 나오는 의례복 뒤쪽에 폭 25㎝, 길이 50~70㎝ 남짓으로 늘어진 레이스 모양의 대형 장식물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후수다.

    후수는 왕이나 신하들의 예복 뒤에 달았던 품계를 나타내는 표지이면서도, 품위를 더해주는 장식물이었다.

    특히 수많은 망수(網綬: 가는 실로 엮은 줄) 매듭이 모여야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탄생될 수 있기에 은근과 끈기, 정성, 공력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대는 바뀌었고 지금의 젊은이들 중에서 이를 배우려는 경우는 거의 없다. 힘들다는 사실 때문이다.

    “돈이 되는 일이 아니니 다음 세대 어느 누구도 이어받으려 하지 않아 걱정입니다. 무엇보다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고요. 그래서 저라도 후수를 널리 알려야겠다는 의무감을 느꼈고, 그게 도리라고 생각해 20년 넘게 무소의 뿔처럼 이 길을 걷고 있습니다.”

    지난 25일 오후 창원의 집 인근에 최근 문을 연 창원역사민속관 민속기념품 공방에서 임 씨를 만나 후수공예가로서 살아가는 보람 등 인생역정을 들었다.


    ◆중학교 시절, 예사롭지 않았던 손재주

    많은 유명인들이 그러하듯, 임 씨도 애시당초 시골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결혼해서는 한동안 평범한 주부의 길을 걸었다.

    1962년 창녕군 영산면의 한 가정에서 1남 4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나 만년교 옆 비석에 파인 총알 구멍을 흙으로 메우는 놀이 등을 하면서 유년기를 보냈다.

    예술과의 작은 인연은 중학교에 들면서다. 미술실 부서활동으로 그림과 사진, 공예품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처음이었다. 당시 지도교사로부터 ‘보통 아이들보다 색감이 뛰어나고 손재주가 있다’는 평을 들었던 게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됐다.

    철공소를 경영하면서 다양한 기구를 만들었던 아버지 손재주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겼다.

    학교를 졸업하고 요리학원 강사로 잠시 일하다 부산미술협회로 옮겨 근무하기도 했으나,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리면서 한동안 평범한 여인네로 살았다.

    그러다 한번은 둘째 아이 초등학교를 방문해 색색의 조형으로 교실 환경미화를 도왔는데, 뜻밖에 담임교사로부터 미적 감각을 인정받으면서 3년간 계속하게 됐고, 아이들과 한지공예와 동판화 등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잠재돼 있는 예술적 재능을 발견하게 된다.

    그즈음, 계속 평범하게만 살 것이 아니라 장차 자식들로부터 존경받는 엄마가 돼야겠다는 생각에 매듭공예에 입문해 틈틈이 공부를 했다. 이어 큰아이가 대학에 들어갈 무렵부터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면서 본격적인 정진을 하게 됐다.


    ◆‘노리개’와의 만남, 인생을 바꾸다

    매듭공예를 배우는 과정에서 접하게 된 한복 장식물 ‘노리개’는 평범하게 살아왔던 임 씨의 가슴에 흥분과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임 씨의 나이는 31세. 다른 일상에는 관심이 없을 정도로 노리개 만드는 일에 열정이 솟구쳤다. 노리개는 매듭기법을 알아야 만들 수 있었기에 참스승을 만나기 위해 사방을 수소문했다.

    하지만 경남에서는 매듭기법을 가르쳐 주는 곳이 없었다. 그러던 중 대전에서 활동하는 ‘노리개 공예가’ 박용순 선생을 우연찮게 만나게 됐다. 배움에 대한 열정은 공간적 제한도 장벽이 되지 못했다. 대전까지 새벽차를 타고 다니면서 열심히 배웠다. 선조들의 과학적인 매듭기법에 점차 매료되기 시작했다.

    매듭공예는 정신 집중과 바른 자세를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란 사실도 알게 됐다. 꼬인 실을 정리하고 마지막 모양새를 마무리하는 모든 과정이 바른 자세를 요구했고, 운명처럼 느껴졌다.

    명주실 올을 꼬는 것부터 시작해 합사해 물을 들인 후 술을 달아 장식하는 것까지 모든 과정을 손으로 시작해서 손으로 끝맺는 인고와 정성의 과정이었다.

    임 씨는 “매듭공예를 하면서부터 활달했던 성격이 조용하고 차분하게 변하더라”고 했다.


    ◆궁중공예의 길로 들어서다

    매듭공예 분야에서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을 즈음, 궁중공예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는다.

    서울에서 망수기능 전승자 장순례 선생을 만난 것이 계기였다. 선생은 1989년 ‘국조오례의’와 ‘대한예전’의 기록과 자료를 수집해 고종을 비롯한 조선시대 왕들의 후수를 국내 최초로 복원했고, 선조의 여섯째 사위인 전창군 유전량과 영친왕비의 후수도 되살려낸 후수공예의 대가였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1년 동안 창원에서 새벽차를 타고 수차례 오르내렸다. 그때마다 스승은 제자를 위해 맛있는 볶음밥을 손수 만들어 주실 정도로 애정으로 가르쳐 주었다.

    특히 스승은 “후수공예를 열심히 해라. 남의 얘기는 3일뿐이다. 필요없는 말은 듣지 말고 꾸준히 정진하라”고 용기를 주기도 했다. 이즈음 임 씨는 한 차원 높은 공부를 위해 명지대학교 산업대학원 전통공예 최고지도자 과정을 수료했다.

    스승이 무형문화재 후수장 지정을 눈앞에 두고 건강 악화로 지난 2008년 11월 유명을 달리하면서 더 큰 책임의식을 느끼게 됐다. 어쩌면 후수공예의 맥이 끊길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더욱 매진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됐고, 창원 사림동 공방에서 오늘도 정진을 계속하고 있다.


    ◆지방대학에 매듭학과 생겼으면

    임 씨는 지난 2007년 전통공예의 전승 발전의 필요성을 느끼고 창원시공예협회를 주도적으로 설립, 지난해 6월까지 초대 회장을 맡아 일했다.

    지난해 11월에는 전통 매듭공예가로서 외길 20년을 평가받는 ‘왕의 후수 & 전통매듭전’을 창원 성산아트홀에서 개최했다.

    보통의 전통 매듭공예가라면 어마어마한 양의 출품작 때문에 평생 한 번도 열기 어려운 전시회였기에 박완수 창원시장과 김일태 창원예총 회장, 중요무형문화재 조대용 염장 등 많은 분들이 축하와 격려를 해주었다.

    개인전을 연 이후 욕심이 하나 생겼다면 다양한 작품을 창조할 수 있는 매듭공예를 통해 ‘장신구 전시회’를 한 번 더 개최하는 것이다.

    임 씨에게는 소망이 하나 더 있다.

    매듭공예는 씨실과 날실을 수없이 교차시키고 꼬아서 독특한 문양으로 재창조하는 ‘인내의 예술’이기에 젊은이들이 쉽게 뛰어들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역 대학에 전공학과를 신설하고 인재를 양성해 길을 열어 주는 것이다. 경남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전통공예에 대한 열정이 꽤 높은 만큼 지역 대학에 전통공예를 정식으로 배울 수 있는 ‘전통공예학과’가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매듭은 실을 엮어가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공예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가 되어주는 삶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작품에 몰입하면서 고독도 함께 나눌 수 있어 참 좋습니다. 주위에 따뜻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에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글=이상목 기자 smlee@knnews.co.kr

    사진=전강용 기자 jky@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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