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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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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천천히 와’라는 말- 손영희(시인)

  • 기사입력 : 2012-08-31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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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천히 와’라는 이 시를 마음속에 오래 품고 있을 때가 있었다. “천천히 와/천천히 와/와, 뒤에서 한참이나 귀울림이 가시지 않는/천천히 와//오고 있는 사람을 위하여/기다리는 마음이 건네준 말/천천히 와//오는 사람의 시간까지, 그가/견디고 와야 할 후미진 고갯길과 가쁜 숨결마저도/자신이 감당하리라는 아픈 말/천천히 와//아무에게는 하지 않았을, 너를 향해서만/나지막히 들려준 말/천천히 와.” -정윤천, <천천히 와> 전문

    여기서 ‘천천히 와’라는 말은 내가 너에게 내 시간을 나눠주겠다는 무언의 약속이며 당신을 오래도록 사랑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사랑한다는 말 대신에, 밥도 잘 챙겨먹으라는 말 대신에 하는 말이 ‘천천히 와’인 것이다. 약속 시간에 늦는 친구에게 왜 빨리 안 오느냐고 벌컥 화를 내는 대신에 ‘천천히 와’라고 문자를 보내고 보면 친구에 대한 사랑이 뭉클하게 전해져 올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천천히 와’라고 해보라, 그 말 속에는 역설적이게도 어서 보고 싶다는 뜻이 담겨 있고 허둥대다 사고 내지 말고 무사히 안전하게 오라는 뜻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된다. 남의 시간을 내 리듬에 맞추려고 허우적대는 현실에서 내가 가진 시간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겠다는 말,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 ‘천천히 와’,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인가.

    나는 빨리 걷는 사람이었다. 빨리 걸어야 남보다 많은 것을 보고 빨리 걸어야 해설사의 말을 한마디라도 더 들을 수 있을 것 아닌가, 운전대를 잡으면 시속 100km는 너무 느리기만 했다. 밥도 빨리 먹었다. 얼른 먹고 다른 일에 몰두해야만 모든 일이 잘 굴러가는 것만 같았다. 할 일은 너무 많고 시간은 늘 모자랐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흘리고 가는 것들이 많아졌다. 그러던 내가 조금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3년 전 장애인복지관 문학동아리분들과 만나고 나서였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한 달에 두 번 만나 시를 공부하기 시작한 것이 벌써 3년 전이다. 지체장애 3급인 A 씨, 정신지체 장애를 가진 B 씨, 그리고 장애를 가진 자녀를 둔 어머니, 이들을 도와주기 위해 오신 자원봉사자를 포함해 매번 오시는 분이 전부해야 10명 내외다. 이분들과 만나면서 나도 모르게 ‘천천히’라는 말을 내 스스로에게 다짐시키게 됐다. 이들과 함께하면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속을 드러내는 일이 참 힘들다는 것과 그들이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어떻게 써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재촉하지 않고 등을 토닥여 줬을 뿐이다. 그렇게 해서 작년 겨울에 조그만 작품집도 만들어졌다.

    어느 날 이분들과 문학기행을 가게 됐다. 나는 평소 습관대로 차에서 내려 풍경을 감상하며 화장실에 갔다와 보니 그때서야 차에서 휠체어가 내려지고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봉사자들이 그들의 보폭에 맞춰 휠체어를 밀고 가방을 들어주고 그들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며 따라오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됐을 때 배가 고프다는 생각에 아무 생각 없이 식당에 들어가 식탁 앞에 앉았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서야 같이 화장실에 갔던 그들이 서로서로 부축하며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얼굴이 붉어졌다.

    이들과 보폭을 맞추려면 좀 더 천천히 걸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몇 발자국 걷다 되돌아보면 그때서야 땅을 짚고 일어서는 그들이었다. 나는 이들에게서 천천히라는 말의 의미를 배웠다.

    손영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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