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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을 가다] 작가와 떠나는 경남 산책 ⑮ 배한봉 시인이 찾은 의령 충익사

나는 그곳에서 평화주의 시인 곽재우를 만났다
의병탑 둘러보고 충익사로 가는 길에 저항시인 떠올려

  • 기사입력 : 2012-09-13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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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병박물관 로비에 있는 붉은 도포를 입고 백마를 탄 곽재우 장군상.
    의병탑
    충익사
    충익사에 있는 500살 된 모과나무.


    시청률 20%를 넘기며 기염을 토한 종방(終放) 드라마가 있다. ‘각시탈’이다. 각시탈 애청자들은 오랜만에 애국심을 무한자극한 드라마였다는 반응을 보였다.

    일제의 탄압 속에 고통 받는 조선민족의 모습이 너무 적나라해 가슴을 쥐어뜯으며 드라마를 봤다는 사람도 있다.

    항일 드라마로 손꼽히는 것이 각시탈이라면, 항일 의병장으로 손꼽히는 이는 곽재우 장군(1552~1617)이다.

    곽재우 장군은 우리에게 홍의장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의병장으로 전투에 나설 때는 천강(天降)이라는 별호를 썼다. 왜군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장수라 칭한 것이다.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공(忠翼公)이다. 곽재우 장군을 모신 사당 충익사는 의령군 의령읍 중동리, 남산을 휘감아 흐르는 의령천 강변에 의병탑, 의병박물관과 나란히 있다.

    의병탑을 둘러보고 충익사로 가면서 나는 저항시인 한용운과 윤동주를 떠올린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라며 3·1운동을 주도한 만해 한용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기도한 영원한 청년 시인 윤동주. 곽재우 장군은 그런 만해나 윤동주보다 삼백 년 앞선 대선배 시인이다.

    나는 충익사 앞을 흐르는 의령천 강변에 서서 잠시 의병장이 아니라 시인으로서의 곽재우를 생각한다.

    시인과 의병장. 문(文)과 무(武). 이 가파른 대비 속에는 험난한 한 시대가 만든 비극이 있다.

    난세를 만났을 때 시인은 무릇 어떠해야 하는가. 온몸을 던져 질곡의 시대를 건넌 수많은 시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본다. 예나 지금이나 강에는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 한 사내의 마음이 흐른다.

    오락진애중(誤落塵埃中)

    혼탁한 세상을 살다 보니

    삼천수백발(三千垂白髮)

    흰 머리카락만 길게 드리워졌다

    추풍야국향(秋風野菊香)

    가을바람에 들국화 향기 그윽하여

    책마귀강월(策馬歸江月)

    달밤에 말을 달려 강정으로 돌아왔다

    -곽재우 <귀강정(歸江亭)>



    충익사 사당에 들어선 나는 사념을 떨치고 경건히 묵념한다. 시인이기도 한 윤재환 충익사 관리사무소장은 곽재우 장군, 그리고 그 휘하 17장령(將令)과 무명의병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고 소개한다. 충익사 경내에는 사당을 중심으로 충의각, 유적정화기념비, 기념관 등이 있다. 연못도 있다. 잘 정비된 경관이 아름답고, 500살이나 잡순 모과나무(경상남도 기념물 제93호)와 우람한 배롱나무, 대나무 등 여러 수목이 어우러져 경건함을 더하고 있다.

    500살 모과나무 아래 서서 하늘을 본다. 짙은 초록빛 모과들이 시퍼런 하늘과 맞닿아 눈길을 아찔하게 한다. 혼이 있다면 이 나무에 장군의 초록빛 모과 같은 마음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없었다면,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신선’(종일무우변시선<終日無優便是仙>)이 되기를 바랐던 청년 곽재우는 의병장이 아니라 누군가를 애틋하고 간절하게 기다리는 모과향을 가진 시인이 되지 않았을까.

    의병박물관에 들어서자 붉은 도포를 입고 백마를 탄 곽재우 장군상이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듯 위엄 있게 서 있다. 사실 임진왜란이나 일제 치하의 역사를 생각하면 슬프다. 슬픈 정도가 아니라 아프다. 일본은 아직도 독도 망언과 성노예 강제 동원에 대한 반성 없는 역사관을 되풀이하고 있고, 파시즘적 천황제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평화는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이지만,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지 못하는 자들은 평화를 힘의 논리로 파악한다. 그것이 군사력이든, 경제력이든, 정신력이든. 제국주의자들이 말하는 평화는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의 말대로 약자의 목을 조르면서 “조용히 해. 평화를!”이라고 윽박지르는 가짜 평화다. 진정한 평화는 진성성을 갖고 세계를 끌어안을 때 온다.

    “역사는 아와 피아의 투쟁”이라 했던 신채호 선생의 말이 생각난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는 역사의 힘이 만든 결과다. 드라마 ‘각시탈’이 시대의 아픔과 분노를 재연해 보여준 창조된 영웅이라면, 백전백승의 곽재우 장군은 무장투쟁으로 불가능한 역사를 가능한 역사로 바꿔 새롭게 써낸 민족 투혼의 상징이다.

    장군이 사용하던 칼과 갓끈, 사자철인, 명나라 왕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벼루와 팔각대접, 말안장(보물 제671호, 곽재우 유물 일괄) 등을 살펴보고 박물관을 나온다. 맑은 의령천을 가로지른 잠수교가 한낮 햇볕을 받아들여 유난히 반짝거린다. 충익사 서쪽, 구름다리가 있는 수변공원도 한 폭 그림처럼 아름답다.

    충익사에서 20번 국도를 타고 창녕 방향으로 가면 곽재우 장군 생가가 나온다. 생가 마을 세간리에는 장군이 북을 매달아 쳤다는 나무 현고수(懸鼓樹, 천연기념물 제493호)가 있다. 지나는 길목에 있는 장군의 승첩지 정암진의 솥바위도 볼만하다.

    의령에서는 매년 의병의 날인 6월 1일에 장군을 기리는 추모제를 올리고 있고, 장군 탄신 기념 다례제가 있는 10월에는 다례제와 함께 ‘천강문학상’ 시상식을 충익사 경내에서 갖는다. 천강문학상은 곽재우 장군의 충의정신 함양 및 문학의 저변확대를 위해 2009년에 제정했다. 올해 수상자는 시 부문에 최은묵(대전시 동구) 씨, 소설 부문에 홍이레(경기도 성남시) 씨 등이다.

    불운한 한 시대의 물줄기를 바꾸는데 온몸을 바친 충익공 곽재우 장군. 충익사 일대를 돌아보고 나오는데 의병장 곽재우가 아니라 시인 곽재우를 만나고 나온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기념관에서 읽었던, 장군이 ‘선배시첩(先輩詩帖)’에 남긴 칠언율시 때문일까.



    비현비지우비선(非賢非智又非禪)

    현인도 지인도 아니요 선승도 아니지만

    서식강간절화연(栖息江間絶火烟)

    강가에 살며 익힌 음식 먹지 않는다

    후인약문성하사(後人若問成何事)

    후세 사람들이 무얼 했느냐고 묻는다면

    종일무우변시선(終日無優便是仙)

    종일 걱정 없으니 바로 신선이었노라 말하겠다

    -곽재우 <종일무우변시선(終日無優便是仙)>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곽재우라는 한 인간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떠했을까?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평화를 위해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질 때마다 이 시가 떠오르면서 울컥 가슴이 북받쳐 오르고 마음이 숙연해진다.

    그래. 평화는 시에 있다. 무기도 밥도 나오지 않지만 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힘도 그 마음의 움직임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나와 나, 나와 너, 나와 사회, 나와 세계, 그 확장된 시적 인식이야말로 평화로 가는 첩경이다. 익히지 않은 음식만 먹으며 침략주의자들에 저항하는 의병장이 됐으나 내면으로는 신선을 꿈꾸며 살았던 초월적 평화주의 시인, 난세를 살아낸 한 시인의 숙명에 대한 생각이 돌아서는 내 발목을 붙잡고 오래 놓아주지 않았다.

    /글·사진= 배한봉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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