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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4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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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헤치’와 지역축제 다이어트- 허충호(논설위원)

전시형 축제보다 지역주민 자발적 참여 ‘헤치형’ 축제로 키워야

  • 기사입력 : 2012-09-21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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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치(해치)’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바쁜 논농사를 마치고 수확까지 끝낸 60년대 말 10월의 어느 날. 당시로서는 사치스럽게 느껴질 한가로움이 밀려든다. 뙤약볕 아래서 논농사에 밭농사까지 도맡아 해낸 억척 아지매 몇 명이 웬일로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동네를 휘젓고 다닌다. 모두 한결같이 외쳐대는 말이 있다. “헤치 가자!”

    ‘아지매 분대’가 온 동네를 도는 동안 그 수는 점차 늘어나고, 그렇게 사람들이 모이면 울긋불긋 한복을 차려입은 아지매 군단은 어디론가 몰려간다. 몇몇 아지매의 손에는 노란색 막걸리 주전자가 여럿 걸렸다. 거꾸로 엎어 머리에 인 칠기밥상에는 필시 음식물이 들었음직한 보따리가 가득하다. 아지매들은 그렇게 왁자지껄 소리를 내며 동네를 빠져 나간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필자에게 그 모습은 ‘뭔가 흥겹고 즐거운 일’로 각인됐다. 아지매들이 외쳐댄 ‘헤치’는 소풍(消風)이라는 뜻이다. 헤치 장소는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계곡일 수도 있고 강가일 수도 있다. 날이 저물어 어둑어둑해질 무렵, 얼큰하게 취한 아지매들의 모습이 동네 어귀에 실루엣처럼 나타난다. 머리와 손에는 빈 주전자와 빈 접시 가득한 빨간 고무대야와 칠기밥상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들렸다.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서로 쳐다보는 얼굴에는 웃음과 얘기가 끊이지 않는다. 엄마를 찾아 달려온 동네 꼬마들의 머리를 툭 치기도 하고 실없이 웃기도 한다. 그렇게 밤은 깊어가고 아지매들의 소풍은 끝이 난다. 그러고 동이 트면, 다시 고단한 일상이다. 힘든 농사일과 가사에 지치고 찌든 아낙들은 그들만의 헤치를 통해 지금말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세월이 흘러 헤치는 사라지고 거창한 이름의 축제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헤치와 축제는 규모면에서 비교가 될 일이 아니지만 사람들이 모여 즐긴다는 공통점이 있다.

    경남도가 우수 문화관광축제 활성화를 위해 시군 유사축제를 다이어트한단다. 지원 축제를 현재의 20개에서 8개로 줄이고, 우수 축제 지원 금액은 늘린다. ‘명품’을 발굴하기 위해 시군 간 경쟁을 유도하려는 속셈이다. 도 지원 시군 대표축제 중 3년 연속 대표축제로 선정된 경우 3년 후 지원 대상에서 제외하는 명예축제 제도를 도입해 신생 우수축제를 발굴하고 육성한다는 계획도 포함돼 있다. 도가 이같이 축제 경쟁력 강화에 나서는 것은 경남을 찾는 국내외 관광객이 크게 늘고 있는 것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관광객이 늘고 있는 것과 발맞춰 진짜 돈 되는 축제를 키워보자는 의미다. 사실 지역마다 무수한 축제가 있지만 주민들이 진정 기다림 속에 맞는 축제는 몇이나 될까. 자치단체장들마다 새로운 축제를 기획하고 행사 규모도 키우고 있지만 돈 들인 만큼 효과도 있고, 주민화합도 기대할 수 있는 축제는 사실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옥(玉)은 있다. 지난 7월 말 현재 도내를 찾은 관광객은 2103만 명에 이른다. 이들 중 유료관광지를 찾은 이는 전년 동기보다 102만 명 감소한 반면 시군 축제장을 찾은 수는 479만 명 늘었다. 시군축제를 찾은 관광객들이 늘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남들과 차별화한 축제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선사시대 공룡을 주제로 한 고성공룡엑스포나 강물에 떠다니는 등불이 장관인 진주유등축제, 건강에 대한 호기심과 본능을 자극하는 하동야생차문화축제나 산청한방약초축제, 전란을 테마로 한 통영한산대첩축제, 지역특산물을 십분 활용한 창원 가고파 국화축제 등은 그런 축제들 중 일부로 본다.

    이제 전시형 축제의 시대는 끝났다. 지역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관광객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헤치형’ 축제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어릴 적 한번 따라가 보고 싶었던 헤치, 그래서 함께 즐기고 싶은 축제, 그게 살아남을 수 있는 축제다. 경남도가 이왕 축제 다이어트를 할 요량이면 헤치를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모두의 뇌리 속에 오랫동안 남을 수 있는 헤치형 축제를 키우는 일, 그게 축제 다이어트의 목표가 돼야 한다.

    허충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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