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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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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박성미 구필(口筆)화가

세상은 ‘입으로 그린다’에 주목하지만 나는 ‘그림’으로 세상에 주목받고 싶다

  • 기사입력 : 2012-10-02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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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탐스럽게 피어난 해바라기를 즐겨 그린다는 박성미 씨가 아파트 내 작업실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마산의 어느 갤러리에서였다. 갤러리 안으로 휠체어를 탄 여인이 불쑥 나타났다. 얼핏 보기에도 팔다리를 마음대로 가눌 수 없는 중증장애를 가진 여인. 그녀는 진지하게 그림을 감상하고 있었다. 마침 여자를 알아본 사람이 그녀를 소개했다. “이쪽은 구필화가 박성미 씨.” 구필? 입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다시 돌아다본 그녀의 휠체어 곳곳에는 물감 자국이 선명했다.

    ▲ 나도 나를 잘 모른다

    서른둘 성미 씨에게 최초의 기억이라 할 만한 것은 5살 때 창원의 한 시설에 맡겨졌다는 것이 전부다. 그곳에서 23년을 지냈다. 따라서 부모는커녕 어떻게 장애가 생겼는지조차 모른다. 그녀가 가진 장애는 뇌병변 장애. 뇌병변은 팔다리의 기능 저하로 혼자서는 생활을 해나가기 어려운 장애다. 임신중이나 출산과정에서 바이러스나 약물 등에 노출되어 생긴다고 알려져 있다. 성미 씨도 활동보조인의 도움을 받아야만 옷도 갈아입고 외출도 하고 목욕도 할 수 있다. 약간 어눌하지만 언어기능은 문제가 없다. 내가 누구인지, 물어볼 데 하나 없는 근원적 고독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신체의 불편함. 보통사람도 견디기 힘든 이 무거운 짐을 성미 씨는 너끈히 짊어진 듯 보였다. 물론 서러움도 많았다. “장애 정도가 덜한 시설원생들은 간단한 부품조립 작업이 가능해서 돈을 벌 수 있어요. 하지만 저는 작업을 못 하니 언어 폭력을 많이 당했어요. 돈도 한 푼 못 버는 게 뭐가 그렇게 하고픈 게 많냐면서. 가끔은 저만 따돌리고 다들 외출하기도 하고요. 제가 중증장애다보니 데리고 다니기가 힘이 들었겠죠.”

    ▲ 해바라기를 그리다

    15살 때 미술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은광학교를 다녔는데, 미술실에 가서 수시로 그림을 그렸다. 일과시간이 엄격하게 정해진 시설 내에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화가’를 꿈꿨다. 또 그녀에게 꿈을 심어준 한문주, 이운기 선생님도 만났다. 한 선생님은 3년 동안 성미 씨를 도맡아 그림을 가르쳤고 이 선생님은 대학진학의 꿈을 심어주었다. 그런 고마운 분들 덕분에 창신대 실용미술디자인과에 진학해 그림 공부를 계속했다. 그녀는 푸릇푸릇한 줄기 위에 탐스럽게 피어난 해바라기를 즐겨 그린다. “사지가 제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으니까… 어릴 때부터 하늘을 날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했어요. 혼자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다 볼 때가 많았는데, 화단에 핀 해바라기도 저랑 똑같은 모습으로 하늘을 보고 있더라고요. 그때 느낀 묘한 동질감이 강렬한 이미지로 각인됐어요.”

    ▲ 독립을 꿈꾸다

    사실 전국적으로 활동하는 구필화가의 수를 일일이 따져본다면 생각보다 적지 않다. 하지만 경남에서는 성미 씨가 유일하다. 따라서 그녀의 존재는 장애인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이기 마련. “기관장이나 기업체 사장이 시설에 오면 저를 불러다 한껏 치켜세웠어요. 보통사람도 하기 힘든 예술을 하는 장애인이라면서. 그런데 정작 공모전에 작품을 내겠다, 그림을 더 배우겠다 하면 완전히 무시했어요.” 시간이 흐르자 가슴 아픈 깨달음이 찾아왔다.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를 시설 홍보에 이용하는구나, 이렇게 있으면 제자리걸음이겠구나 하고.” 이때부터 그녀 혼자만의 엑소더스가 시작됐다. 마산에 있는 장애인여성연대의 도움을 받아 한달 생활비는 얼마나 드는지, 집은 어떻게 구하는지, 지자체가 제공하는 서비스는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 알아봤다. “인권이라는 개념을 그때 생전 처음 알았어요. 나도 인간으로서 무엇을 요구하고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을요.” 그녀의 첫 보금자리는 창원 중앙동의 허름한 상가를 개조한 작은 오피스텔이었다. 꿈에 그리던 독립 후 가장 좋은 점은 언제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 창작열에 몸이 달뜨던 시설에서의 날들과 진정 작별이었다.

    ▲ 입으로 그림 그리기

    현재 성미 씨는 오피스텔을 떠나 쾌적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주택공사에서 짓는 아파트 정보를 꼼꼼히 알아보고 준비해 지난 10월에 입주했다. 방 한 칸은 작업실로 만들어 깊은 밤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고 작업을 한다. 1시간 동안 열심히 그리고 잠깐 쉬는 과정을 반복한다. 보통 사람도 한 자세로 장시간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는 것은 고문에 가까운 일. 작업 후엔 어디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이 온 몸이 아프다. “제 그림에는 밑그림이 없어요. 붓을 뻗을 수 있는 거리나 힘에 한계가 있으니까 짧은 선이나 점으로 형태를 만들죠.” 그녀는 캔버스를 책상에 눕히고 휠체어에 앉은 채 상체를 숙여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린다. 붓이 닿지 않은 부분은 캔버스를 조금씩 회전시켜 가며 그린다. 섬세한 터치감을 살려주는 힘은 오른쪽 어금니에서 나온다. 즉, 붓대 끝을 어금니로 물고 구강으로 붓을 운용하는 것. 실제로 그녀가 가진 붓 끝에는 대부분 특수제작된 골무가 끼워져 있다. 골무에 새겨진 무수한 이[齒] 자국의 성과로, 성미 씨는 2006년과 2011년 2회에 걸쳐 개인전을 가졌다. 특히 작년에 열었던 개인전에서는 13점의 작품이 팔리는 성공을 거두었다.

    ▲ 구필화가라 불리고 싶지 않다

    그림을 향한 열정을 좌절시키는 난관이 닥쳐 올 때마다 마음을 거듭 다잡았다는 성미 씨. “반대하는 사람이 생기고, 애처롭다는 눈빛이 많아질수록 점점더 오기가 생겼어요. 고집스럽게 밀고 나갔더니 나름대로 길이 생기더라고요. 캔버스를 무상으로 보내주시는 화방 사장님과도 연결되고, 직접 오셔서 그림을 가르쳐주시는 이근은 선생님도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도 꾸렸고요.” 지난봄 성미 씨는 3년의 열애 끝에 결혼을 했다. 그야말로 새댁이다. 신랑은 장애인 모임에서 만난 임채철 씨. 지체장애를 가졌지만 팔다리 기능에는 별 문제가 없는 그는 성미 씨의 든든한 후원자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더니 ‘입으로 그린다는 사실 말고, 그림 자체로 주목받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는 성미 씨. 살짝 수줍게 웃음짓더니 덧붙이는 소망이 하나 있다. 언젠가는 꼭 패러글라이딩을 하고 싶다는 것. 그녀의 그림 속, 해바라기와 함께 목이 꺾일 듯 올려다보던 그 드넓고 푸른 하늘에서 말이다.

    글=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사진= 김승권 기자 s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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