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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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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을 가다] 작가와 떠나는 경남 산책 (18) 배한봉 시인이 찾은 '창원 용지호수'

하늘을 보자, 가을의 푸름으로 빈마음을 채우자
햇빛에 반짝이는 호수 물결은 일상에 지친 마음 씻어주고
호숫길 걷다보면 세상 떠난 '용지못의 시인' 황선하 떠올라

  • 기사입력 : 2012-10-18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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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원 용지호수는 가을이 되면 연꽃 핀 호수와 호수 뒤편 나지막한 언덕에 우거진 가을숲이 잘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호수 안쪽에 있는 물레방아.
    호수 가운데 있는 휴게소.
    호수 옆 언덕에 있는 창원대종각.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산책길.




    어느덧 가을이다. 나뭇가지 끝에서 눈부신 가을볕이 부서져 호수의 물결 위로 쏟아지고 있다. 나지막한 언덕이 감싸 안고 있는 창원 용지호수. 산책하기 좋은 둘레길 벤치에 연인이 손을 잡고 앉아 밀어를 속삭이고 있다.

    가을은 다정하게 속삭이기 좋은 계절. 나뭇잎을 흔드는 소슬바람 소리가 마치 한 편 시를 읊조리는 것 같다. 가을은 시의 계절이라는 말이 딱 맞다. 굳이 시인이 아니더라도 한 잎씩 이제 막 단풍 들기 시작하는 나무를 붙잡고 우리는 무슨 말이든 자꾸 건네고 싶어진다.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박인환, ‘세월이 가면’ 중에서



    용지호수는 사방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다. 나무 아래 곳곳에 벤치가 놓여 있고, 가을 나무는 호수와 잘 어울린다. 호수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 나무는 그리움이고 쓸쓸함이고 청춘을 돌아보게 하는 얼굴이다. 그래. 나뭇잎이 떨어져 사라져도 나무는 늘 제자리에 있듯, 내 가슴에 그의 눈동자가 있는 한 사랑은 가도 간 것이 아니다.

    초록의 시간에서 돌아와 호수 물빛에 얼굴을 비춰보는 나무처럼 가을이 되면 우리는 적막해지고 깊어진다. 자기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다. 햇빛에 반짝이는 호수 물결은 사색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손이 되고, 일상에 지친 마음을 씻어주는 위로의 말씀이 된다.

    용지호숫길을 걸으며 나는 황선하 시인(1931~2001)을 떠올린다. 황선하 시인은 용지호수 뒤쪽 롯데아파트에서 살았다. 생전에 평생 시집 한 권이면 족하다고 하더니 정말 시집 ‘이슬처럼’ 한 권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말년에 간암 투병을 하면서 수시로 용지호숫가를 산책했고, ‘용지못에서’라는 제목으로 30여 편의 연작시를 썼다. ‘용지못의 시인’이라 불러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이곳 어디 양지바른 곳에 그의 시비(詩碑) 하나 서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루하루 물 높이가 낮아지는

    못물에

    하르르 떨어져 내리는

    버들잎 셋.

    떠나는 여름의 작별 인사말.

    한 잎은

    너를 사랑한다는 말.

    한 잎은

    너와 헤어지게 되어 가슴 아프다는 말.

    한 잎은

    내년 여름에 다시 보자는 말.



    -황선하, ‘용지못에서-떠나는 여름의 작별 인사말’



    수련과 노랑어리연, 부들, 줄, 갈대, 물억새 같은 수생식물이 용지호수 물면을 마치 한 폭 그림처럼 만들고 있다. 호수 기슭에 물고기들이 무리지어 다니는 것이 보인다. 거위 몇 마리가 키 큰 수초를 심어 만든 인공섬 주위에서 여유롭게 헤엄을 치다 간혹 길게 목을 뽑아 행인들의 눈길을 끌어당기곤 한다.

    호수를 한 바퀴 휘돈 뒤 물레방아와 용지휴게소 중간쯤에서 나는 언덕을 오른다. 오솔길이 내 발걸음에 앞서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난다. 소나무와 상수리나무, 편백나무 등이 있어 간단한 삼림욕을 하기에 딱 좋다. 채 익지 않은 도토리를 찾아 왔는지 어린 청설모 한 마리가 두리번거리다 잽싸게 소나무를 타고 달아난다. 언덕 정상부에는 창원대종각이 있다.

    용지호숫가에 서면 내가 호숫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호수가 나를 데리고 산책시킨다. 금세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용지호수는 용지공원의 한 부분이지만 때로 용지공원이 용지호수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밤 8시와 9시에는 용지호수에서 음악분수를 구경할 수 있다. 워터스크린, 레이저 영상이 어우러져 밤하늘을 수놓는 환상적인 음악분수쇼가 이곳 용지호수에 시민들을 가득 불러 모은다. 한겨울을 제외하고는 계절별로 약간 다른 시간차를 두고 하루 두 차례 공연한다.

    용지호수 동남쪽의 도로 건너편 공원에는 ‘새영남포정사’가 있고, ‘고향의 봄’ 작가 이원수 노래비가 있다. 또 불모산에서 발굴한 고려 불탑 불모산동사지 3층석탑을 원형으로 복원해 세워 놓았다. 용지호수에서 롯데아파트 쪽 샛길로 걸어가면 카페촌을 만날 수 있다.

    당장에 닥친 일들과 엉킨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우리는 종종 마음의 여유를 잃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삶이다. 그러나 그럴 때 잠시 용지호수로 가자. 이때 용지호수는 창원에 있는 용지호수가 아니라 당신 마음에 있는 용지호수다. 용지호숫가에 서서 하늘을 보자. 그 눈부신 가을의 푸름으로 빈 마음을 채우자. 우리 삶을 치유시키는 진짜 약은 전부 공짜다. 억눌러 놓았던 그리움, 서러움의 먹장구름을 뻥 뚫고 나타나는 청명한 하늘을 보자.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서정주, ‘푸르른 날’



    며칠 전, 22년 만에 옛 친구가 연락을 해왔다. 서점에 들렀다가 내 시를 보고는 인터넷 검색을 해서 연락처를 알았다고 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엔 이렇게 놀랍고도 가슴 설레는 일도 생긴다. 호숫가를 걸으며 하늘을 본다. 에메랄드빛 하늘을 가로질러 흘러가는 흰 구름이 22년 전 그 친구의 얼굴을 동그랗게 그렸다가 네모지게 그렸다가는 단풍잎 모양으로 손을 흔든다.

    그래.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나 오늘 저녁에는 청년시절로 돌아가 서럽도록 사무치게 긴긴 편지를 쓰리라.

    /글·사진= 배한봉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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