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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4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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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거두어 주지 않는 죽음- 조민(시인)

  • 기사입력 : 2012-10-19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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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뿔싸! 고양이 머리를 갈았다. 로드킬당한 길고양이다. 머리끝이 쭈뼛 선다. 진저리가 쳐진다. 완전 으깨어졌겠지.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나친다. 쌩! 하고 앞만 보고 달려간다. 모른 척하고 바쁜 척한다. 어쨌든 저 으깨진 죽음을 거두어 줄 형편은 못 되니까. 아니다. 좀 더 솔직해지자. 나는 용기가 없다. 저 죽음을 만질 손이 없다. 하필이면 내 앞에 누워 있을 게 뭐람. 더럽고 싫다. 무섭다. 내 무서움에는 이유가 없다. 죽음에 이유가 없듯이.

    설마, 누군가가 치워 주겠지, 죽음이니까. 설마, 누군가는 거두어 주겠지, 주검이니까. 아니면 하다못해 저 주검 위에 흙이라도 한 뭉텅이 뿌려주겠지. 젖은 모래 두어 삽이라도. 홱! 뿌리면 그만이다. 자, 이거나 먹고 떨어지거라.

    고요하다, 길이. 그렇게 많은 죽음을 먹고도 길은 아무 말 없다. 조용하다. 사실 길은 상관없다. 주검의 액체가 깨진 수박인지 참왼지 호박인지 으깨진 고양인지 개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어차피 고양이나 수박이나 개나 호박이나 그게 그거니까. 사람들도 관계치 않는다. 차량 통행만 무난하게 잘되면 그만이고 혐오물질은 치우면 되니까.

    길고양이는 어디로 가는 길이었을까? 먹이를 구하기 위해 가던 길이었을까? 먹이를 구해 돌아오는 길이었을까? 살기 위해 선택한 길이 무덤이 되었다.

    결국 삶과 죽음은 같이 산다. 삶을 담보로 해서 죽이고, 죽음을 담보로 해서 사니까. 그래서 삶의 현장은 살육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끝도 없고 시작도 없고 계절도 없고 정해진 시간도 없는 살육의 비엔날레다. 시장에서, 학교 운동장에서, 마트에서, 집 마당에서, 공장 안에서, 햇빛 속에서…. 숱한 생명이 살기 위해서 숱한 생명을 죽인다.

    태어나자마자 마취 없이 송곳니가 뽑히고 꼬리가 잘려나가는 돼지새끼들, 태어나자마자 어미젖 한 번 못 빨고 격리 수용되는 젖소새끼들, 인공 수정으로 생겨나 인공 부화기에서 태어나는 치킨들. 태어나자마자 분쇄기에 던져지는 수컷 병아리들, 태어나기 전부터 고기였고 어미도 고기였으니, 고기에게 송곳니와 꼬리와 어미젖이 무슨 필요가 있겠나? 살만 찌면 된다. 새끼와 알만 많이 낳으면 된다. 햇빛도 금기, 풀밭도 금기, 진흙 모래 목욕도 금기다. 아니, 딱 한 번 햇빛을 보기는 한다. 도살장에 가기 위해 트럭에 옮겨지는 그 순간만! 아이러니하게도 빛이 어둠이 되는 순간이다.

    고양이와 토끼, 너구리는 어떤가!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진다. 그들은 동물이 아니다. 모피다. 가죽 코트다. 신상 잇백이다. 신상 슈즈다. 신상품을 위해 소돔과 고모라가 기꺼이 부활한 것이다. 수백 마리의 흰 토끼가 철장에 갇힌 채 꼼짝없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높이 쌓은 수백 개의 철장 계단이 바벨탑처럼 하늘을 찌른다. 토끼 한 마리 한 마리가 계단 하나다. 죽음의 계단이다. 흰 모피도 안다. 몸이 꽉 낀 채 갇혀 있는 철장이 마지막 계단임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그대들은 들어 보았나, 수백 마리의 철장 토끼가 두려움에 떨면서 우는 소리를!

    저녁 해를 받으며 집으로 간다. 햇빛이 따뜻하다. 길도 깨끗하다. 고양이는 온데간데없고 완전 떡이 된 털뭉치만 있을 뿐이다. 고요함의 잔혹! 지금쯤 모란 시장도 서부시장도 조용하겠지. 어디선가 누구는 닭모가지 비틀다가 장례식장에 조문을 가고, 토끼 가죽 벗기다가 갓 태어난 아들 얼굴을 보러 가겠지. 피땀과 삶의 현장에 살육이 산다. 삶과 죽음이 함께 산다. 이것이 생활의 발견인가!

    조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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