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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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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마산 ‘창동예술촌 방송’ DJ 맡은 이영범 씨

창동거리에 들려주는 음악 이야기, 바로 그의 목소리다
1970년대 창동 다운타운서 유명한 청년 DJ로 날렸죠
결혼하면서 그만뒀지만 음악 열망은 남아 있었어요

  • 기사입력 : 2012-10-23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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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창동예술촌에는 매일 오후 1시가 되면 거리에 잔잔한 음악과 중저음의 목소리가 흐른다. DJ(디스크 자키) 이영범(55) 씨의 ‘창동예술촌 방송’ 시간이다. 1976년 창동 다운타운에서 소녀팬을 이끌고 다니던 열아홉 살의 청년 DJ였던 이 씨. 그가 30여 년이 지나 오십줄의 나이로 창동으로 돌아와 다시 마이크 앞에 선 사연을 들어봤다.


    ▲ 20대, 인생의 절정기 다운타운 DJ

    “창동은 내 청춘이 모두 담긴 곳이에요.”

    1970년대 중후반 마산 창동은 젊음과 예술의 도시였다. 음악다방과 DJ는 도심의 유행을 이끌었고, 많은 젊은이들은 그곳에서 사랑과 열정과 고뇌를 이야기했다. 이 씨는 그곳에서 꽤 유명한 DJ였다. 러브레터와 초콜릿, 도시락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여성 팬들도 있었다. 게다가 고등학교 때 기계를 전공한 덕분에 음향기기를 설치하고 음질을 체크하는 일까지 가능했기에, 음악다방에서도 그를 선호했다.

    이 씨는 “당시 DJ는 그 자체로 인기가 있었어요.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연예인이라고 생각해서 팬하고는 연애는 금지였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피해다니고 그랬지요”라며 웃음지었다.

    즐거웠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악을 매일 접할 수 있었고, 좋아하는 음악을 사람들과 나누고 이야기하고, 또 이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적성에 딱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음악다방의 시대는 길지 못했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오디오와 CD가 보급되기 시작했고, 음악 전문가게도, DJ라는 직업도 점점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밥벌이가 안되는 직업을 길게 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결혼을 하면서 이 씨는 DJ를 그만뒀다.


    ▲ 50대, 놓쳤던 꿈을 찾아 다시 창동으로

    이 씨는 가장의 역할을 다 하기 위해서 취직에 사업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그렇게 36년을 DJ가 아닌 평범한 아버지로 살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늘 음악에 대한 열망이 남아 있었다고 했다.

    그는 늘 음악을 곁에 두고 살기 위해 노력했다.

    “한순간도 음악을 잊고 살지 않았어요. 계속해서 음악을 공부하고, 유명하고 귀한 LP판을 구하러 전국으로 다녔죠. 언젠가는 다시 DJ로 돌아가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기회는 우연히 왔다. 2007년 그의 여동생이 창동에 민속주점을 오픈하면서 그에게 가게에서 DJ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의한 것이다.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는 사장인 여동생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가게 위치를 옛 다운타운의 중심이었던 창동 쪽샘 골목 일대로 정하고, 7080시대의 분위기로 가게 인테리어와 DJ박스를 꾸몄다.

    그렇게 DJ로 다시 돌아와 첫 진행을 하던 그날, 그는 “목소리는 다소 늙었지만 다시 DJ박스 안에 앉는다는 게 너무 기뻤다”며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온 것 같았다”고 당시의 기분을 소회했다.

    손님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이 씨는 금세 창동의 명물이 됐고, 그의 진행을 듣기 위해 가게를 찾는 손님이 줄을 이었다. 그의 DJ박스는 사람들에게 묘한 감동을 줬다. 7080세대는 진한 추억을, 다음 세대에게는 이색적인 즐거움을 줬다. 그의 신청함 구멍에 초콜릿을 넣어주는 팬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구구절절한 사연을 편지에 적어 주는 사람도 있었고, 신청한 음악을 들으며 하염없이 우는 손님들도 있었죠. 가장 기억에 남는 손님은 3대가 같이 온 가족이었어요. 할아버지와 7080세대의 아버지, 그리고 20대의 젊은이가 와서 음악과 제 이야기를 들으며 서로 공감하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이 있었어요.”


    ▲ 내 직업은 창동 DJ입니다

    그는 현재 창동예술촌 방송을 진행한다. 매일 오후 1시부터 오후 3시까지 창동 거리에는 그가 들려주는 음악이야기가 잔잔하게 울려퍼진다. 창동 사거리 전광판에는 그의 방송 모습까지 생중계된다.

    방송을 진행하는 장소는 여전히 여동생 가게다. DJ박스 앞에 캠코더를 놓고, 그 모습을 인터넷 방송인 아프리카 TV를 통해 생중계하면서 채팅도 한다.

    대본은 없다. 2시간 동안 그는 DJ박스 속에서 혼자 자연스럽게 음악과 이야기를 이어가고, 인터넷으로 신청곡을 받고, 음반을 찾고 음악을 틀어준다. 한시도 쉴틈이 없는데도 목소리와 움직임에 여유가 느껴지는 것이 그의 저력이다. 대화의 주제는 날씨와 건강, 그리고 창동의 소소한 소식이다.

    이 씨는 “작가도 없고, 인터넷에서 신청곡을 받아주는 보조도 없어요. 저 혼자 1인 3역을 하는거지요.(웃음) 조금 힘들긴 하지만 보조를 둘 만한 여유가 없으니깐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재미가 있으니깐 하는 거지요. 여력이 되면 계속하고 싶은데….”

    사실 그는 경제적인 이유로 앞서 진행했던 창동 상인방송도 한 번 중단했던 아픔이 있다. 지난 2011년 창동상인회와 방송을 시작했지만 DJ 외에 다른 수익이 없었던 그는 결국 생계 때문에 상인회 방송을 9개월 만에 접고 창동 업소에서 일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창동은 내 젊음의 흔적이 있는 곳이라 애착이 컸고 당시 반응도 아주 좋았다”며 “상인회에서도 노력을 많이 했는데 그만두게 돼 많이 아쉬웠지만 경제적인 사정상 어쩔 수가 없었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얼추 1년 만인 지난 9월, 창동예술촌이 조성되면서 다시 마이크를 잡게 된 이 씨. 그는 이제 이 방송을 가능한 아주 길게 끌어가는 것이 꿈이다.

    이 씨는 “지금은 7080 전통 DJ가 사라진 시대”라며 “사람과 사람이 직접 음악과 소통하는 이 좋은 문화를 후세대에도 길게 이어져서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 창동 한구석에 옛날식 음악다방과 같은 쉼터가 생기길 바라고 있다.

    “지금 여동생 가게는 개인 상업공간이잖아요. 이곳 말고,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소통할 수 있는 공간 하나 마련되면 정말 좋겠어요. 청소년들도 DJ문화를 체험하고, 나이 든 사람은 옛 추억을 감상하는 서로 공감하는 그런 공간이 생겨서, 거기서 DJ를 하고 싶은 게 제 바람이지요. 지자체나 뜻이 있는 단체나 사람들이 이런 공간을 만들면 좋지 않을까요?”

    이 씨는 그러한 공간이 생기면 그가 평생 모아온 LP판 3000여 장과 CD, 뮤직비디오 등도 모두 기증할 의사를 밝혔다.

    “저는 늘 저를 DJ라고 소개합니다. 죽을 때까지 DJ였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제가 마지막 DJ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할 수 있을 때까지 DJ를 하고 싶고, 또 그 문화가 계속 이어져서 후세대에 계속 남는게 제 꿈이지요.”

    글=조고운기자

    사진=성민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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