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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을 가다] 작가와 떠나는 경남 산책 (20) 송창우 시인이 찾은 산청 남사예담촌

가을날 수백살 된 고목들이 들려주는 마을 이야기
강물·기와집·회화나무 ‘풍경의 삼박자’ 갖춘 남사마을

  • 기사입력 : 2012-11-01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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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청 남사예담촌 이씨고가 입구에 300살 된 회화나무 두 그루가 양쪽 담장가에서 ‘X’자로 교차해 있다. 선비들이 회화나무의 본성이라 칭송해온 자유분방한 기상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최씨고가 입구 ‘ㄱ’자로 꺾인 돌담길에 회화나무 한 그루가 직선의 긴장감을 무너뜨려 주고 있다.
    하씨고가의 600년 넘은 감나무.
    사효재의 530살 향나무.
    최씨고가 안채와 넓은 마당.




    내겐 자주 보아도 늘 새로운 풍경들이 있다. 마을을 끼고 돌아가는 강물, 높은 담장 너머에 선 큰 기와집, 그리고 하늘로 치솟아 오른 푸른 회화나무. 내 고향 가덕도에는 없는 풍경이다. 말하자면 전형적인 반촌의 풍경인데, 내륙 곳곳 그런 마을들을 찾아 자주 여행을 다녔어도 여전히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반촌에 들면 입구에서부터 나는 살짝 기가 죽는다. 어릴 적 양반의 자손이라고 늘 강조하던 아버지의 말씀과는 다르게 내 피에는 반촌의 추억이 전혀 없었다는 듯이.

    산청군 단성면 남사마을은 그런 풍경의 삼박자를 제대로 갖춘 마을이다. 사수천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흘러가는 곳에 여드레 낮달처럼 앉은 마을. 예담촌이라 새로 덧붙인 이름 그대로 예쁜 돌담길이 있고, 미로 같은 돌담길이 끝나는 곳엔 어김없이 마당 넓은 집에 뿌리 깊은 나무가 산다.

    남사마을 여행은 이번이 세 번째다, 첫 번째는 지리산 가는 길에 황톳빛 돌담길에 반해서 들렀고, 두 번째는 혹시 빈집 있으면 한철 세 들어 살아볼까 싶어서 들렀다. 그리고 오늘은 마당 넓은 집 뿌리 깊은 나무들이 보고 싶어서 찾아온 길이다. 남사마을은 오래된 옛집들만큼 해묵은 나무들이 많다. 그중 가장 유명한 나무는 이씨고가로 들어서는 돌담길에 X자로 서 있는 두 그루 회화나무다.

    회화나무는 반촌을 상징하는 나무다. 고대 주나라의 조정 뜰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고, 각각의 나무에 한 사람씩의 정승이 앉아 조정일을 논했다고 해서 학자수 또는 출세수로 불린다. 옛 신분제의 관점에서 보자면 백성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에 회화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가문의 영광과 출세의 염원을 품고 양반집 뜰과 서원에 깊은 뿌리를 내렸다. 그런 열망이 어디 양반에게만 있었을까마는 반상의 구별이 엄격한 사회의 대다수 민중들에겐 결코 회화나무의 꿈이 허락되지 않았다.

    이씨고가 입구의 두 그루 회화나무는 300살 된 나무다. 양쪽 담장가에서 자라 허공에서 X자로 교차한 이 두 그루 회화나무는 선비들이 회화나무의 본성이라 칭송해온 자유분방한 기상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야말로 멋대로 자랐으되 멋이 있는 나무다. 다른 나무들이 모두 단풍이 드는데도 여전히 푸른빛을 간직하고 있다. 회화나무는 봄날에 새순이 가장 더디 나온다. 그래서 가장 늦은 가을까지 푸르다. 뭇 나무들이 새순을 다툴 때에도 경쟁하지 않고, 뭇 나무들이 나뭇잎을 버릴 때에도 조급해하지 않는다. 그저 타고난 본성대로 좀 늦게 시작하고, 좀 늦게 꽃을 피우고, 좀 늦게 잎을 떨군다. 회화나무에서 세속적 출세의 염원을 지우고 나면, 무릇 학자가 지녀야 할 본연의 모습이 보인다.

    본받을 덕이 많기로는 감나무도 빠지지 않는다. 옛 선비들은 감나무가 문무충절효(文武忠節孝)의 오절을 갖춘 나무라 예찬했다. 감나무 잎사귀는 넓어서 글씨 연습을 하기에 좋으므로 문(文)이 있고, 나무가 단단하여 화살촉 만드는 재료가 되기 때문에 무(武)가 있으며, 열매의 겉과 속이 똑같이 붉어서 표리가 동일하므로 충(忠)이 있고, 치아가 없는 노인도 홍시를 먹을 수 있으니 효(孝)가 있으며,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까지 열매가 가지에 달려 있으므로 절(節)이 있다는 것이다.

    남사마을엔 감나무가 많다. 아니 이 나라 어느 마을에 감나무 없는 마을이 있으랴. 그 수많은 감나무들 중에 가장 오래된 감나무가 하씨고가의 뒤뜰에 있다. 이 나무는 630살쯤 되었는데 감나무 앞에 세워져 있는 비석에는 ‘文孝公敬齋先生手植枾木(문효공경재선생수식시목)’이라 새겨져 있다. 경재선생은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인데, 일곱 살 때 어머니의 자애로움을 기리기 위해 심은 나무라 한다.

    밑동에 뚫린 큰 구멍 속에 오랜 세월을 담고 있는 하씨고가의 감나무는 600년이 넘는 세월을 지나고도 이 가을에 붉은 감을 매달고 있다. 이 오래된 감나무 주위에는 이제 스무 살쯤 된, 손자의 손자의 손손손손손자 감나무들이 또 풍성하게 붉은 감을 매달고 있다. 날씨가 춥고 비바람이 거세면 도깨비가 나와서 지켜주었다는 믿기지 않는 얘기가 이 늙은 나무 앞에 서니 믿어진다. 의심 많은 나그네의 마음도 단번에 사로잡는 나무니 마을 사람들이 이 감나무에서 효를 배우고, 이 감나무의 수세로써 마을의 길흉화복을 점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씨고가엔 감나무보다 더 오래 산 매화나무도 있다. 남사마을엔 집집마다 오래된 매화나무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하씨, 최씨, 정씨, 이씨, 박씨 다섯 문중을 대표하는 다섯 그루의 매화나무가 있는데 오매불망(五梅不忘)이라 부른다. 하씨고가의 매화나무는 그중 가장 나이가 많다. 670살쯤 되었는데 고려시대의 문신인 원정공 하즙이 심었다고 해서 원정매로 불린다. 인근 단속사지의 정당매와 남명 조식 선생이 산천재 마당에 직접 심었다고 전해지는 남명매와 더불어 산청 삼매의 하나다. 그러나 아쉽게도 몇 년 전 나무의 본줄기는 말라죽고 뿌리에서 나온 새 가지들이 오랜 나무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부디 강건하게 잘 자라서 천수를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집 뒤뜰에 일찍이 매화 한 그루를 심었더니

    추운 날씨에 꽃이 아름답게 나를 위해 피었구나.

    밝은 창문 앞에 주역을 읽고 향을 피우고 앉았으니

    이 세상의 근심 걱정이 아주 잊을 만하네

    - 원정공 하즙의 매화시



    최씨고가의 매화나무를 만나러 가는 길은 남사마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골목길이다. 담쟁이들이 붉게 물든 돌담길은 ㄱ자로 꺾어지면서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데, ㄱ자로 꺾어지는 곳에 마중 나온 회화나무 한 그루가 직선의 긴장감을 무너뜨려준다. 최씨고가의 매화나무는 230살쯤 된 홍매화인데 굵은 가지의 한쪽이 사라지긴 했지만 아직 기운이 성하다. 오매 중 나머지 세 그루는 모두 100살 안팎인데 정씨고가에는 정씨매가 있고, 이씨 문중의 서재인 남호정사에는 이씨매가 있다. 그리고 박씨매는 사수천 건너 니구산 산자락에 있는 이사재에 있다.

    오래된 매화나무들은 가을날에도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기품을 뽐내지만, 매화나무가 가장 아름다운 때는 엄동설한을 이기고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때다. 내년 2월쯤 매화꽃이 필 무렵에 다시 찾아와서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고고한 매화향기에 실컷 취하리라.

    남사마을엔 그 밖에도 오래된 나무들이 많다. 사효재 마당에는 530살의 향나무가 용틀임을 하며 하늘로 솟아 있고, 사양정사에는 120살의 배롱나무가 있고, 이웃한 선명당 마당에는 220살의 단풍나무가 있다. 향나무 아래에선 조상의 은덕을 생각하고, 배롱나무 아래에선 청렴결백하게 살며 이웃을 살피고, 단풍나무 아래에선 붉게 물든 단풍을 보며 잠깐 시름을 잊고 살아보라고 심은 것이다. 남사마을 오래된 나무들이 전해주는 이야기가 이 가을에 더 아름답게 빛난다.

    글·사진= 송창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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