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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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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을 가다] 작가와 떠나는 경남 산책 (22) 유홍준 시인이 찾은 지리산 둘레길 제4구간

단풍 든 산자락 늦가을 비에 젖어 ‘몽환의 세계’
함양 의중마을서 동강마을 잇는 길

  • 기사입력 : 2012-11-15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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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양군 마천면 의중마을에서 휴천면 동강마을에 이르는 지리산 둘레길 제4구간. 낮게 둘러쳐진 안개에 쌓인 산골마을 정경이 수묵화 같다.
    빗속을 걷고 있는 둘레꾼.
    둘레길 옆으로 흐르는 엄천강.
    엄천강과 조화를 이룬 지리산 자락.
    떨어진 잔가지가 둘레길에 쌓여 있다.
    조용한 산골을 달리는 버스.
    늦가을 곱게 물든 단풍.




    늦가을 비가 내리던 지난 토요일, 지리산 자락엘 갔다. 막 추수를 끝낸 빈 들녘이며 단풍 든 산자락은 추적추적 늦가을 비에 젖어서 아름다웠다. 그 젖은 풍경은 몽환의 세계였고 잠시 현실 밖의 세계였다.

    지리산 둘레길 제4구간. 함양군 마천면 의중마을에서 휴천면 동강마을에 이르는 외롭고 서글픈 길. 낮게낮게 안개가 둘러쳐진 그 지리산 산자락의 풍경들은 한 폭의 수묵정원이었고 하나같이 애틋하고 눈물겨웠다. 헐벗어져 가는 그 풍경은 머잖아 고립과 단절의 계절이 오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칠선계곡 초입의 의탄교를 지나 서암정사를 지나 벽송사를 지나 하염없이 엄천강을 따라 걷는 길은 쓸쓸했다. 길가에는 젖은 낙엽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늦가을 비가 오는 날 홀로 지리산 자락을 걷는다는 건 거의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하는 짓. 아니다, 그건 고민이 많은 사람이 하는 짓이었고 이런 방법으로밖에는 자신을 추스르지 못하는 사람이 하는 짓이었다. 그런데 지난 토요일 나는 그 짓을 하고 왔다.

    지리산 둘레길 제4구간은 엄천강을 따라 자꾸자꾸 인간의 마을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사실 엄천강은 강이라기보다는 계곡에 가까웠다. 좁고 가파르고 물살이 셌다. 좁고 가파르고 물살이 센 강을 만든 건 산. 그것은 강의 의지가 아니었다. 엄천강은 그렇게 마천에서 휴천을 지나 유림을 지나 금서를 지나 생초를 지나 경호강을 만나고 남강을 만나 낙동강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마천(휴천)은 춥고 거칠고 황량한 지리산 북부지역이다. 그곳은 지리산 남부능선과는 매우 다르다. 그 지역은 멸망한 옛 가야가 재건을 꿈꾸며 절치부심하던 마지막 희망과 절망의 땅이기도 했다. 가까이 왕산이 있고 가야의 마지막 왕이었던 양왕의 구형왕릉이 있다.

    천년에 또 천년이 지났어도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가야인. 나라를 잃은 자들의 막연한 어떤 기질 같은 것이 아직도 그 지역 사람들에게는 있다. 신라인도 아니고 백제인도 아닌 주변인 혹은 경계인. 나는 그런 기질이 그 지역 사람들의 특징이고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모름지기 사람의 기질은 그곳의 산세를 닮는다.

    휴천은 시인 허영자의 고향이고 김종직의 지리산 기행록 ‘유두류록(遊頭流錄)’의 고장이다. 돌아보니 삼십여 년 전의 일이다. 낡고 오래된 버스를 타고 나도 그 첩첩산중 오지 길을 따라 간 적이 있었다. 첩첩…. 첩첩산중이란 말의 실체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것은 겹겹이 둘러싸여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궁지에 갇힌 자의 심경 같은 것. 다가올 내 인생의 첩첩산중(?)을 나는 그때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일까?

    텅 빈 토요일 오후. 만추의 지리산 풍경을 적시며 가을비는 쉬지 않고 내렸다. 단풍은 죄다 젖었고 안개는 도무지 걷힐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 풍경을 걷는 자의 마음은 더욱 선명했다. 물에 잠긴 돌처럼. 비에 젖은 단풍잎은 감추어 두었던 제 빛깔을 있는 대로 드러내 보였고 그것은 햇빛 아래에서는 감히 보지 못한 색깔이었고 문양이었다.

    그것은 익숙하고도 전혀 색다른 경험! 패망한 옛 왕조의 길을 더듬어 내려가는 여정과 가을걷이를 끝낸 산골의 논밭들이 주는 느낌은 쓸쓸했다. 사람이 사는 집들은 외로움이 무서워 하나둘 모여든 형식으로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지리산 마을은 예외 없이 모두 다 그런 형국이었다. 산골의 집과 집은 서로를 기대 위로하고 위무하고 있었다. 나는 그 마을과 마을을 오래 내려다보았다.

    쓸쓸함의 실체는 오래 들여다보고 견디는 것이었다. 늦가을 산골의 논과 밭도 그랬다. 그것들도 텅 빈 채 무언가를 견디고 있었다. 홀로 터벅터벅 산길을 걷는 자가 짊어진 짐은 15ℓ짜리 배낭만이 아니었다. 왜 이렇게 세상살이가 벅찰까? 비옷을 입은 몸은 자꾸만 무거워지고 착잡해지고 있었다. 가능한 한 멀리 떠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회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떠나온 곳은 지금 여기, 결국 내 고향과 가까운 곳.(내 고향은 산청 생초다.) 결국 인간은 제 말뚝을 뱅뱅 돌다가 죽고 마는 것일까?

    나의 늙은 어머니는 지금 요양병원에 계신다. 잘 아시다시피 어머니는 고향이다. 어머니는 구심점이다. 어머니가 병들어 요양병원에 계시니 자연 구심점이 없어져버렸다. 형제들과의 관계도 예전 같지가 않고 중구난방, 제각각 제 주장대로 제 팔을 흔들고 산다. 어머니가 안 계시면 피붙이들마저도 이렇게 서서히 멀어져 가는 것이구나 싶다.

    용유담을 지나 운서를 지나 하염없이 걸어 내려가는 길, 저기 퇴락한 집 한 채가 보인다. 뒤뜰에 빨간 알전구 수백 개를 매단 감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저 집, 저 감나무는 어머니 같다. 아름다운 건 항상 눈물겹고 애틋하다. 지금은 자취마저도 찾을 길 없는 어느 가계(家系)의 애환과 애증을 나는 잠시 떠올려 본다.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 산 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맞아. 그 집에 살던 사람들은 정이 많은 사람들이었고 눈물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명절이 찾아오고 한 잔 술을 마시면 이 노래를 불렀다. 그 사람은 내 삼촌이고 고모고 누이였다. 옛집과 옛 논밭과 옛 언덕을 모두 잊어버리고 그들은 지금 무슨 수로 살고 있을까?

    이제 고향을 말하는 자는 정신이 나간 자다. 더 이상 고향 같은 건 없다. 유행가에도 고향은 사라졌고 문학작품에서도 고향은 사라졌다.

    어느 시인은 <언젠가 제가 살았던 곳에 다시 돌아와 사는 사람들은 성자가 아니면 폐인>이라고 했다.

    나는 하염없이 뒤에 오는 것들에 밀리고 밀려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 흘러가는 것이다. 시원(始原)을 버리고 하염없이 흘러가는 것이다. 저 머나먼 바다를 향해,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강물은!

    겨울엔 되도록 말을 많이 안 하는 게 좋다. 최근에 나는 <겨울 산골에서는 말을 많이 하면 내년 봄에 씨앗이 안 난다는 속설이 있다>고 썼다. <굳게 입을 다물고 있으면 강해진다>고 썼다. 그래. 어머니가 아파도, 고향이 잊혀져도, 굳게 입을 다물고 있자. <주먹을 오래 쥐고 있으면 단단해진다>고 어머니는 어린 나에게 가르치셨다.

    이 겨울이 지나면 어머니도 주먹을 꼭 쥐고 일어나실 거다. 꼭!

    PS : 그날 나는 비옷을 입은 한 무리의 가족 둘레꾼을 만났는데 그들이 무척 낯설고 신기하고 이상했다. 나는 혼자였고 그들은 무리(가족)를 이뤄 걷고 있었던 것이다. /글·사진=유홍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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