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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4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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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홍시(紅枾)’라는 계절- 김남호(시인·문학평론가)

  • 기사입력 : 2012-11-16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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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시는 과일이 아니다. 홍시는 계절이다. 이 지상에서 가장 찬란한 계절이면서 가장 쓸쓸한 계절이고, 누구나 이 계절에 살면서도 아직 이름을 붙이지 못한 계절이다. 이 계절에는 심하게 바람이 분다. 폭풍처럼 그리움이 불고, 방향을 가늠할 수 없도록 황홀함이, 쓸쓸함이, 외로움이 순서 없이 막무가내로 분다. 가끔은 가슴 한쪽이 붉게 물크러지는, 더러는 호흡까지 곤란해지는 ‘흉부외과’적 통증이 괴질처럼 수반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서둘러 머플러로 목을 감싸고 마스크로 입을 가려보지만 소용없다. 이 계절에 대한 내성이 생기는 순간 이 계절은 물크러진 홍시처럼 떨어지고 없기 때문이다.

    이때는 한반도(韓半島) 어디를 가든 감나무마다 산기슭을 환하게 밝히고 있고, 빈집 울타리 안에는 늙은 감나무가 무수한 등을 매단 채 오래전에 집 떠난 주인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 ‘마당 깊은 집’은 예외 없이 감나무마다 잎은 다 떨어지고 주렁주렁 감만 매달려서 폭죽처럼 터지고 있다. 감나무 폭죽 아래로 젊은 시절의 어머니가 바가지에 저녁쌀을 퍼 나오신다. 사각사각 밥 안치는 소리가 들리고, 푸우푸우 뜸 드는 소리가 들리고, 붉은 백열등 아래 식구들이 둘러앉아서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집 감나무는 감이 시원찮았다. 해걸이라도 하는 해에는 울타리 너머로 길게 팔을 뻗쳐와서 우리 식구를 대놓고 조롱하던 이웃집 감나무의 도발을 견디기 힘들었다.

    “따 먹고 싶은 유혹과/ 따 먹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마찰하고 있는 발열 상태의 필라멘트/ 이백이십짜리 전구를 백십에 꽂아 놓은 듯/ 이 겨울이 다 가도록 떨어지지 않는/ 십오 촉의 긴장이 홍시를 켜 놓았다/ 그걸 따 먹고 싶은/ 홍시 같은 꼬마들의 얼굴도 커져 있다”(최종천의 시 ‘십오 촉’ 중에서).

    그때, 이웃집 감나무에 매달린 홍시를 올려다보던 내 얼굴에도 ‘유혹’과 ‘금기’ 사이에서 발갛게 불이 들어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홍시’라는 계절은 여름 가고 가을 오듯이 천연스럽게 찾아왔고, 낙엽을 주워 책갈피에 꽂을 나이가 됐을 때는, 그 계절이 가슴속에까지 스며들어서 도무지 잠들 수가 없었다. 아른아른 터질 듯한 그 ‘홍시가슴’은 내버려둘 수도 껴안을 수도 없는, 폭탄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사춘기는 지나가고, 밥그릇을 찾아 떠도는 동안 감나무 아래서 할머니도 떠나가고, 아버지도 떠나갔다, 조율시이(棗栗枾梨)와 홍동백서(紅東白西) 사이에서 가끔 그 붉었던 기억을 더듬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노래방에서 이 계절을 다시 만났다.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자장가 대신 젖가슴을 내주던/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눈이 오면 눈 맞을세라/ 비가 오면 비 젖을세라/ 험한 세상 넘어질세라/ 사랑 땜에 울먹일세라/ 그리워진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나훈아의 노래 ‘홍시’ 중에서).

    이 노래를 목이 메어서 2절까지 제대로 부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가 중년이 되었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처연하게도 우리는 모두 가슴이 뻥 뚫린 관흉국(貫胸國)의 백성임을 깨달았다.

    지난 11월 2일부터 4일까지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공원에서 ‘제14회 악양대봉감축제’가 열렸다. 축제장에는 가슴이 뻥 뚫린 사람들로 붐볐다. 그들은 하나같이 붉은 심장을 감나무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아 놓고 행사장을 떠났다. 틀림없이 그들은 귀로에 막걸리 한두 잔씩 걸쳤을 것이고, 풀풀 홍시 냄새를 풍기면서 집 근처 노래방에서 구성지게 목을 꺾으며 ‘홍시’를 불렀을 것이다. 뚫린 가슴이 곶감처럼 한 줄에 꿰인 채, 목 놓아 이 계절을 보냈을 것이다. ‘홍시’라는 붉디붉은 계절을.

    김남호(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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