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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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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진해 명동서 43년 해녀 생활 임옥자 씨

예순한 살 진해 해녀가 부르는 ‘희망가’

  • 기사입력 : 2012-11-20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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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원시 진해구 명동의 유일한 해녀 임옥자 씨가 바다에서 채취한 해삼과 미역을 들어보이고 있다.
    임옥자 씨가 바닷속으로 들어가기 전 손을 흔들고 있다.
    바다에서 해삼을 채취하고 있다.



    진해에도 해녀가 있을까? 문득 떠오른 생각에 수소문에 나섰다. 있었다. 제주도 해녀 출신의 47년 경력자라고 했다. 지난 주말 오후 창원시 진해구 STX조선해양을 지나 명동을 찾았다.

    진해해양공원 전망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명동마을 바로 앞의 작은 섬 동섬과 해양공원 내 퇴역 군함이 눈길을 끈다.

    슈퍼 여주인에게 명동어촌계장 집을 물었다. 해녀 임옥자(61) 씨의 남편(이봉은·62)이 현재 어촌계장이기 때문이다. 여주인이 바로 옆의 2층 단독주택을 가리켰다.

    1층 현관 문을 두드리자, 임 씨 부부가 반긴다. 인사를 건네고, 해가 저물면 추워져 바닷물에 들어가기 불편할 것 같아 먼저 사진 촬영을 제의했다. 여름날 태풍 영향으로 바닷속이 뒤집혀 한 달가량은 작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잠수복을 입은 임 씨를 따라 마을 앞 포구로 갔다. 임 씨네는 배 2척(3.23t 효성2호, 1.20t 범열호)을 보유하고 있다. 배에 오른 임 씨는 수경과 장갑, 오리발, 4㎏ 무게의 납덩이 벨트를 갖추고 부이와 그물망을 챙기더니 바로 뛰어들었다. 겨울 초입의 차가운 날씨에도 망설임이 없다.

    사진기자가 연신 셔터를 누른다. “촤르르 찰칵, 촤르르 찰칵.” 임 씨는 이왕에 채취 작업을 해보자는 것인지 연신 자맥질이다.

    “여보, 해삼 봐요. 제법 크죠? 다음 주부터 작업해도 되겠어요.” 임 씨가 해삼을 번쩍 들어보이며 수경 너머로 해맑게 웃는다. 그렇게 30여 분 만에 해삼을 꽤나 잡았다.

    남편 이 씨는 “아내가 잠수를 하고 나면 머리가 아프다고 하고, 기침을 자주 해 걱정스런 마음에 이제 그만두라고 하지만 고집스럽게 계속하고 있다”면서 “노동력이 없어질 때까지 하려고 한다는 제주 해녀들의 특성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온 임 씨가 다시 옷을 갈아입는 사이 이 씨는 부엌에서 잡아온 해삼을 후다닥 손질해 내놓는다.


    ▲ 제주도 해녀, 뭍에 오르다

    임 씨는 제주도 제주시 한림읍 옹포리 출신이다. 바다가 놀이터였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는 우뭇가사리, 오분자기 등 채취법을 배웠다. 5남매 중 장녀인 그녀는 초·중학교 때 농사일로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동생을 업고 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가정형편상 중학교 3학년 중퇴를 한 그녀는 해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장녀로서 돈벌이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더 악착같이 일을 배웠고, 그만큼 실력도 늘었다.

    중 3 때 물질을 시작했으니 올해로 만 47년이 되는 셈이다. 진해에서만 만 43년의 세월이다.

    “옛날에는 잠수복도 없고 납덩이만 차고 들어가, 겨울에는 물질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러다 1969년 초에 잠수복이 나왔고, 1975년부터 지금처럼 잠수모에 오리발, 장갑 등 일체를 갖춘 것으로 기억한다. 젊은 날 해산물이 많이 나던 시절에는 하루 3~4시간 작업하면 일당벌이 했지만, 지금은 물량이 많지 않아 하루 5시간 이상 작업을 할 때가 많다.”

    임 씨는 18세인 1968년 10월 처음으로 20여 명의 젊은 해녀들과 인솔자를 따라 진해를 찾았다. 제주는 판로가 많이 없어 육지에 오면 돈을 좀 더 벌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합류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임 씨는 철마다 진해와 제주를 오가며 생활했다. 진해에 오면 일행과 방을 잡아놓고 일했다. 그러던 중 진해 명동이 고향인 남편 이 씨와 눈이 맞았고, 24세이던 1975년 2월 결혼해 정착했다. 그리고 1남3녀를 낳고 다들 건실하게 키워냈다.


    ▲ 바다는 삶의 터전이자 인생 그 자체

    “바다는 내 인생의 최고이자 삶의 터전이다. 남한테 돈 빌리러 갔다가 그냥 돌아오면 그 맘이 어떻겠어. 그러나 바다에 들어가면 무엇이든지 있고, 다 돈이다. 돈 떨어지면 바다에 들어가면 된다. 2~3시간 일하면 10만 원씩 버니까. 남의 집에 가서 일할 필요가 없었다.”

    임 씨에 따르면 진해 명동 앞바다는 황금어장이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해삼과 전복, 피조개, 돌미역 등 각종 해산물이 엄청 많이 났다. 하지만 신항만조성 공사와 인근에 조선 관련 대기업들이 들어선 이후 그 많던 전복도 사라졌다고 한다. 임 씨는 얘기 중에 9년 전 마지막으로 채취한 것이라며 전복 7개를 내밀었다. 그 이후로는 전혀 안 난다고 했다.

    다음 달 초순부터는 돌미역 채취 시즌이다. 이곳 돌미역은 12월부터 다음 해 4월 초순까지 채취하며, 하루에 20㎏들이 망태 15~25개를 채취해 망태당 2만 원에 마산어시장 등에 넘긴다. 돌미역 채취가 끝나는 4월 중순부터는 고둥이나 해삼 등을 채취해 판다.

    특히 진해 돌미역과 돌해삼은 최고 품질로 정평이 났단다.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구입하러 올 정도였다. 전복도 크고 품질이 좋아, 10여 년 전만 해도 통영에서 자개농을 만드는 나전칠기 장인이 직접 와서 1년에 한 자루씩 사갔다.

    옆에 있던 남편 이 씨는 아내의 물질 솜씨가 최고라고 했다. 처녀 때 제주에서 온 해녀 20~25명 중 단연 돋보였다고 칭찬이다.

    임 씨는 더 이상 해녀를 하려는 이가 없어 안타깝다고 했다. 50대 이하 해녀는 한 명도 없고, 대부분이 50대 중반, 60·70대다. 배우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임 씨에게 바다는 인생 그 자체다. 여느 해녀들도 그렇겠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그날까지 계속할 생각이다.


    ▲ 나잠어업 허가증 없어 보상 한푼 못 받아

    임 씨의 마음속에는 지금도 사라지지 않은 큰 응어리가 자리하고 있다.

    지난 1997년 신항만 건설에 따른 피해보상 당시 20년 이상을 진해 명동에서 해녀로 활동했음에도, 나잠어업허가증이 없다는 이유로 단 한 푼의 보상도 못 받은 일이다.

    당시 임 씨 내외는 그런 허가증이 있는 줄도 몰랐고, 어디서 만들어야 되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보상팀에서는 지역 어촌계에 공문을 보냈다고 했지만 어촌계장은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답답한 심정에 시청에 하소연했더니 어촌계장을 고발하든지 둘이서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얼굴을 붉히기는 했지만 마을 사람을 고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부경대 용역조사팀에 하소연했고, 나잠어업허가증이 없으면 원보상은 안 되지만 생계비는 나올 거라며 시청을 찾아가라고 했다. 새벽부터 시청, 도청을 찾아다니고 국선변호사도 만나서 탄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시 부경대 교수에게 전화해보니 700만 원 보상생계비 다 나갔다고 해 시청 보상과에 갔지만 이미 집행이 끝났다면서 손을 내저었다고 했다.

    그러나 발빠르게 나잠어업허가증을 만든 인근의 한 해녀는 자신보다 경력이 짧음에도 수천만 원의 보상을 받았는데, 허가증이 없다는 이유로 한 푼도 보상 못 받은 것이 지금도 너무 억울한 심정이라고 토로했다.

    너무 속상한 마음에 모 방송 프로그램의 시청자고발 코너 출연도 생각했지만 남편의 만류로 접었다고 했다. 임 씨는 마을 인근의 조선 관련 대기업들로부터도 허가증이 없다는 이유로 보상을 못 받았다고 덧붙였다.

    1999년 말 나잠어업허가증을 취득한 임 씨는 “당시 공무원이나 용역조사팀이 현장을 돌면서 제대로 실태조사를 하지 않고 책상머리에서 처리하는 바람에 저 같은 사람이 진짜 억울한 일을 당했다”며 원망스런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 남은 소망은 자식들 잘 사는 거지

    임 씨에게 바다는 청춘이자 고향이다. 제주도 해녀 출신답게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물질을 할 생각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한 해 한 해 움직임이 다르지만. 요즘은 물질을 할 때 물구나무를 많이 서서 그런지 머리가 아프고, 기침도 자주 하는 편이다. 하지만 뭍으로 나와서 좀 지나면 나아지기에 다시 또 물질을 나선다고 한다.

    앞으로 바람을 묻자, “별 거 있나. 자식들이 몸 건강하고 화목하게 잘 사는 것이제. 그거밖에 더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임 씨는 이어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난다면 부잣집 자식으로 태어나서 못다한 공부도 하고, 하고픈 일도 하면서 재미있게 살고 싶다”고 했다.

    글= 홍정명 기자 jmhong@knnews.co.kr
    사진= 성민건 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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