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3월 29일 (금)
전체메뉴

[작가칼럼] 한 잎의 여자- 천융희(시인)

  • 기사입력 : 2012-11-23 01:00:00
  •   



  • 단풍! 초록에 지쳐 단풍이 든다고 했던가. 화려한 꽃의 뒷배경밖에 되어 보지 못했던 잎사귀들의 서러운 대반란이라고 했던가. 어쨌거나 11월의 하순을 달려오며 전국의 단풍축제 물결이 시들해졌다. 아니 곧 나목의 계절이 오고 있다. 시린 저 가지 끝에 한 잎 간당간당 달린 낙엽을 보며, 떨어져 소복 쌓인 낙엽을 밟으면서 나는 시골에 홀로 된 팔순 노모를 떠올리게 된다. 창원에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군 단위에 살고 계시는 어머니. 객지에 사는 자식들의 염려는 동일할 것이다. 끼니는 제대로 챙겨 드시는지, 관절은 어떠한지, 보일러는 잘 돌아가는지 등등. 자식 걱정하는 부모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말이다.

    이 가을 노모를 생각하며 한 편의 시를 발표한 적 있다.

    “떨어져,/ 마른 잎사구 같은 여자/ 바람에 온 몸을 뒤척인다/ 평생 가지 끝 매달려/ 바스락 소리가 몸에 배인 여자/ 한 번도 불태워 보지 못한 / 生의 뒤끝이 한켠으로 말려있다/ 떨군 한 잎으론 물들지 못해/ 낙엽끼리 합류되는 -노모정/ 그곳에 가면/ 말라 비튼 계절이 밀봉되고 있다” 얼마 전 창원 단풍거리 축제 때 부쳐 시화전에 내걸었던 ‘낙엽’이라는 졸작이다. 낙엽의 깊은 속성을 말하려다 보니 노모를 배치시켜 본 것인데 고령사회에 있어 겪어야 하는 그들의 고독감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선진국의 경우 고령사회로 변하는 데 상당 기간이 소요되며 그에 대한 준비도 체계적이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성장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고령사회가 이루어져 20년 정도밖에 걸리지 않을 것으로 본다.

    최근 독거노인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노인문제로 떠오르는 빈곤과 질병. 그보다 더 큰 과제는 홀로 남아 견뎌야 하는 그들의 ‘고독감’일 것이다. 고독이 큰 원인이 되어 치매에 이르고 끝내 노인요양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는 모습들을 흔히 보아온다. 농사일에도 손 될 수 없는, 그렇다고 손자손녀들을 돌봐 줄 수도 없는 팔순 노인들. 그들을 밖으로 불러내어 햇볕을 쬐게 하고 장소를 마련해서라도 보다 먼저 사람을 쬘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눈빛을 마주하고 몸을 부비며 서로를 아우르는, 그곳이 바로 노인정 또는 노모정이 아닐까.

    요즘 그곳 노모정(老母亭)에 훈훈한 치맛바람이 불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치맛바람이라면 흔히 자식을 학교에 맡겨둔 어머니들의 극성스러운 활동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 아닌가. 눈만 뜨면 아침 한 술 뜨고 옹기종기 노모정에 모여 점심도 나눠 드시고 심심풀이 화투도 치시며 때로는 노래도 춤도 배워 장기자랑도 다니시는 그들에게 자식들이 다녀가는 것이다. 낮에 안부전화를 드리면 노모는 종일 집을 비운 채 계시지 않는다. 아니 낮에 집에 계신다는 것은 몸이 편찮아 바깥 출입이 어렵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밤이 되어 전화 연결이 되면 어느 집 아들이 와서 오리탕을 사주고 간 이야기, 오늘은 또 누구네 딸이 와서 바람을 쐬어 주더라, 국을 끓여서 보냈더라, 목도리를 한 장씩 주고 갔다 등등 흥겨운 목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참 흐뭇한 자녀들의 치맛바람이다. 남겨져 홀로 외로울까 봐 서로 잘 어울려달라는 부탁인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 달라고 전화번호도 남기고 간다는데 한쪽 벽에 자녀들의 비상연락처가 삐뚤삐뚤 새겨져 있다고 한다.

    단풍이 아름답다 하였는가. 이 계절 한 잎으로 주장하지 못해 켜켜이 몸을 쌓은 몇 잎의 노모들. 그 푸렀던 여름 한 생의 테두리를 바스라트리며 잎맥만 도드라져 또 하루를 넘기고 있는 저 한 폭 풍경! 눈시울 붉어지도록 아름답지 않은가. 그렇지 아니한가! 감정이 삭제되고 절차만 남아 계절을 접고 있는 저 낙엽에 대해, 우리들의 노모에 대해.

    더 추워지기 전에 부는 바람에 등 떠밀려 나도 길을 떠나야겠다. 보일러 기름통도 한 번 두드려 보고 지난봄 수술한 무릎도 만져드리러 그리고 시장에 들러 떡 몇 되 맞춰 우리 엄마 잘 부탁한다고 쓰윽 내밀고 올 모양이다. 모아 놓은 십 원짜리 동전도.

    천융희(시인)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