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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을 가다] 작가와 떠나는 경남 산책 (25) 유홍준 시인이 찾은 사천 가화천

역사를 알고 강을 바라보면 시선이 달라진다
가화천이 낙남정맥 자르고 낸 물길인 것도 모르고…

  • 기사입력 : 2012-12-06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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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천시 축동면 가산에서 바라본 사천만과 사천시내. 사천만 너머 멀리 사천의 대표적인 명산 이구산과 와룡산이 보인다.
     
    남강댐의 홍수 조절을 위해 만든 가화천 배수갑문.
    공룡화석이 발견된 내동면 유수리 가화천 구간.
    조선 영조 때 우조창이 있었던 사실을 나타내는 가산 조창진 푯말.





    진주 진양호 물박물관 앞에 섰다. 나는 오늘 진양호에서 출발, 사천만 쪽으로 흘러가는 가화천 물길을 따라 가산오광대의 발생지인 사천시 축동면 가산리까지 가 볼 참이다.

    가화천은 고작 10㎞가 조금 넘는 물길. 그리 길지 않다. 하지만 많은 이야기가 산재해 있는 곳이다. 어젯밤 ‘가화천 화석’이라고 검색해 보았더니 위키백과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가화천(加花川)은 진주 남강의 진양호에서 발원하여 사천시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진양호에서 흘러오는 수로가 생긴 이후로 홍수기에 남강의 배수로 역할을 한다. 하천변에는 공룡 화석이 분포하고 있다. 내동면 유수리의 진주 유수리 백악기 화석산지는 천연기념물 제390호로 지정되어 있다.’

    진양호에는 두 개의 수문이 있다. 진주 시내를 거쳐 낙동강 쪽으로 흘러가는 것이 하나요, 댐이 위험수위에 도달하면 사천만 쪽으로 방류를 하는데 그것이 또 하나다. 그런데 그 물길이 인간에 의해 강제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사실 이 물길은 낙남정맥 100여m를 자르고 강제로 낸 물길이다. 나동 공원묘지 조금 못미처 지금의 유수교가 있는 자리, 거기가 낙남정맥이 잘려나간 자리이다. 구한말 마지막 진주관찰사 황철이 부임해 있던 시절, ‘영남춘추’의 기록에 의하면 ‘남강홍수를 방지함에는 일거양득의 좋은 방법이 있으니 사천만으로 절하(切下)하는 것이다. 이는 치수와 8000정보의 비옥한 토지를 얻게 한다’라는 내용이 있다.

    남강의 홍수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었고, 식민통치 시절 이른바 통강(通江)정책의 일환으로 남강댐 계획이 입안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26년 공사가 시작돼 해방과 전쟁을 겪으면서 중단됐다가 1962년 다시 시작해서 7년 반 만인 1968년 완공되었으며 그 인공호수를 우리는 진양호라 부른다.

    진양호는 3억1000만㎥의 저수용량을 가진 인공호수이다. 하류지역의 수해예방과 전력 생산, 서부경남의 식수원이라는 다목적을 이룬 듯했다. 하지만 사천만으로의 방류는 또 다른 민물담수, 하구의 퇴적 등 환경 피해와 어민의 생계를 위협하기에 이른다.

    이 땅의 모든 산줄기는 백두산으로 통한다. 백두산에서 비롯한 백두대간은 멀리 등날을 이루며 달려와 지리산에 이르렀다가 남도의 평야지대를 지나 바다로 흘러든다. 백두산이 심장이라면 백두대간은 대동맥이고 그러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의 작은 산들은 모세혈관이다. 이것은 1대간 1정간 13정맥을 생각한 조선후기 실학자 신경준의 산경표(山經表) 개념이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은 산 없이 시작되는 강이 없고 강을 품지 않는 산이 없으니, 산은 스스로 물을 나누는 고개가 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과 강은 하나이고 이는 유기체적 자연의 선순환 구조이다. 고산자 김정호는 1866년 이 산경표를 ‘대동여지도’의 근본으로 삼았다. 그런데 그 맥을 자르고 산자분수령의 원칙을 깨고 인공으로 만든 것이 바로 가화천인 것이다.

    가화천의 ‘진주 유수리 백악기 공룡화석산지’는 약 1억년 전 물과 바람 등에 의해 돌이 쌓이고 쌓이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지골화석과 발가락 뼈, 좌골화석 등 100여 점에 달하는 공룡뼈와 나무그루터기 화석, 숯 화석, 각종 과거 생물의 생활흔적 화석 등 다양한 화석들이 발견되었다. 진주시 진성면 가진리의 새 발자국 화석산지, 혁신도시 개발 중 발견된 진주시 호탄동의 세계최대의 익룡 발자국 화석산지와 더불어 매우 소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 곳이다.

    그러나 겨울 가화천은 썰렁하다. 웅덩이마다 물오리들이 물고기를 잡아먹고 있다가 사람의 인기척에 놀라 푸드덕 푸드덕 날아오른다. 이곳이 고향인 내 친구 강기대에 의하면 가화소(沼)에는 이마에 시퍼런 이끼가 낀 백년 묵은 잉어가 산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가화천에 널리고 널린 돌을 디디며 나는 이 돌 속에 숨어 있을 1억만 년 전의 조개 화석과 공룡의 발자국을 생각해 본다. 망치 하나면 돌 속의 조개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가에 도깨비풀 바늘들이 자꾸 바짓가랑이에 달라붙는다. 나는 차를 몰아 가화천변 마을들을 차례로 지난다. 유동, 관동, 탑리, 용수, 반룡마을이다. 반룡마을엔 조선조 때 옹기가마가 있었단다. 그때는 육로보다 해로로 물자를 날랐을 터, 그때 나루터는 어디쯤에 있었을까? 나는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산청의 남명 조식과 사천의 구암 이정이 뱃길을 따라와 가화에서 만났다는데 언뜻 이해가 안 간다. 그러나 지금의 물길로는 어림없지만 그 옛날엔 가능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보기도 한다.

    인절미고개를 지나 구호를 지나 가산에 닿는다. 가산은 남해고속도로가 지나는 곳이다. 사천휴게소 조금 못미쳐 다리를 하나 건너게 되는데, 거기, 내륙 쪽에서 흘러온 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이 바로 가산이다.

    가산은 가산오광대로 유명한 곳이다. 가산오광대는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73호다. 나는 차를 세우고 옛 가산다리 밑으로 내려선다. 조창포구가 있던 곳이다. 조선 영조 36년(1760년), 이곳엔 경상도의 우조창(右漕倉)이 있었다. 조창포구는 1894년 갑오동란 뒤 조창이 폐지될 때까지 인근 8읍(진주, 곤양, 하동, 단성, 사천, 남해, 의령, 고성)의 전세(田稅)와 대동세(大同稅)를 경창(京倉)으로 운반하던 포구였다. 300여 호나 되던 큰 동네였다고 한다. 16척의 조운선이 전세와 대동세를 나눠 싣고 서울로 운송하였는데, 인근 고을과의 교류는 물론 정기적으로 시장이 서고 경강선인(京江船人)들이 드나들 만큼 흥성했다고 한다. 항시(港市)가 열렸다는 얘기고, 그 시장에서 판을 벌였던 가산오광대는 조창오광대(漕倉五廣大)란 별칭이 붙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조창포구는 너무나 쓸쓸하다. 남해고속도로에는 질주하는 차들이 씽씽 지나가고 경강선인이 북적이던 번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닻줄도 없이 뻘구덩이에 처박힌 배 몇 척만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무사항해를 기원하고 양반을 조롱하며 가산오광대가 흥을 돋우던 옛 항시의 질펀한 저잣거리는 오간 데가 없다.

    낙남정맥을 자르고 인간이 낸 물길을 따라 흘러온 가화천이 무심히 바다를 만나는 광경을 나는 멍하니 지켜본다. 조용하다. 진주 유수리 백악기 화석은 돌 속에 제 자취를 숨기고 사라졌다. 흔적이란 무엇일까? 나는 돌멩이 하나를 주워 물수제비를 뜬다. 내가 던진 돌멩이가 바다 건너 사천시의 공단 쪽을 향해 날아간다. 우리는 이 가화천이 낙남정맥을 자르고 낸 물길인 것도 모르고, 돌 속에 백악기의 화석이 숨어 있는 것도 모르고, 경상도 우조창이 자리 잡은 조창포구가 있었다는 것도 모른다.

    역사를 알고 강을 바라보면 시선이 달라진다. 겨울이 다 가기 전에 지인 몇과 더불어 잃어버린 것들을 이야기하며 다시 한 번 이 가화천을 찾아야겠다. /글·사진=유홍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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