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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고 싶다] 함안 군북면 어계고택

생육신 조려의 충절 '불사이군(不事二君)'
후대에 이어 빛나리 '백세청풍(百世淸風)'

  • 기사입력 : 2012-12-06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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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안군 군북면 원북동의 어계고택.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려가 은거하며 여생을 보낸 곳이다.



    함안군 군북면 시가지에서 반성으로 넘어가는 지방도 1004호선 옆 방어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 원북동이다. 생육신을 모신 서산서원이 입구에 있고,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조선 선비의 충절을 잘 보여준 어계 조려(趙旅)가 살던 고택이 마을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어계 조려와 고택

    조려는 1420년 군북면 명관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주옹(主翁), 호는 어계(漁溪)이며 나중에 정절(貞節)의 시호를 받았다.

    1453년 4월 사마시에 급제해 성균관에 들었는데, 1455년 6월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선위하고 노산군으로 강등된 후 다시 10월에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는 것을 보고는 벼슬에 대한 욕심을 버렸다.

    1456년 4월 명륜당에서 동문수학들과 하직 인사를 하고는 조부가 살던 군북면 원북동에 내려와 손수 띠집을 짓고 은거했는데, 이 집이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159호인 어계고택이다.

    대문채와 원북재(院北齋), 향례를 올리는 조묘로 구성된 고택엔 대문채에 이조판서로 추증하고 정절의 시호를 내린 정려문이 걸려 있다. 원북재에는 오른쪽에는 금은유풍, 왼쪽에는 어계고택의 현판이 걸려 있다.

    어계집 책판과 함께 하사품인 동으로 만든 향로와 선생이 쓰셨던 죽장을 보관했으나 분실 우려로 지금은 다른 곳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호배도강전설(虎背渡江傳說)

    조려와 관련된 일화로 영월읍지, 대동기문, 강원도지 등에 수록된 호배도강전설이 전한다.

    세조는 단종을 영월에 유배하고 청령포 나루를 지켜 사람들이 다니지 못하게 했다. 조려는 함안에서 500여 리에 달하는 영월 땅을 매월 세 번씩 찾아가서 단종께 문안을 드렸다. 그는 원호의 초막에서 유숙하며 매일 밤하늘에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1457년 10월 24일 단종이 승하하자 불철주야로 달려 밤에 청령포에 도착했지만 배가 없었다.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니 강물도 울었다. 의관을 벗어 등에 지고 물을 건너려 할 때, 문득 옷을 당겨 돌아보니 호랑이였다.

    “상을 당해 천리 먼 길 왔는데, 강을 건널 수 없구나. 강을 건너면 임금의 옥체를 수렴하겠지만, 건너지 못하면 물에 빠져 귀신이 될 것인데 너는 어찌 나를 잡아당기는고?”

    호랑이는 머리를 숙이고 엎드렸다. 공은 그 뜻을 짐작하고 등에 업혀 나루를 건넜다. 통곡사배 후 옥체를 수렴하고 나오니 기다렸던 호랑이가 다시 강을 건네주었다.

    서산서원에 있는 정절공어계조려선생사적비에 의하면 조려는 단종이 청령포에 유배된 후 매월 500리 길을 찾아 문안을 드렸는데, 영월에 은거한 원호의 집에서 자고 초하루면 청령포를 찾았다고 한다.

    스스로를 어계처사(漁溪處士)라 하며 세조가 이조참의의 벼슬을 내려도 나아가지 않고 두문불출, 책과 낚시를 벗 삼아 살면서 끝내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켰으니 그런 충절이 호배도강전설로 남아 있는 것이다.



    ▲조려와 관련된 지명들

    조려는 많은 시와 글을 썼는데 단종에 대한 절의가 담긴 명문을 많이 남겼고, 행적이 있는 곳에는 백이숙제와 연관된 지명이나 유적이 많다.

    군북면에 있는 백이산은 당초 서산(西山)이었다. 산기슭에 조려가 학문을 가르치던 곳에는 ‘서산서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1713년 생육신을 모신 서원의 사액을 받을 때 서산서원으로 받은 것도 그 연유다.

    어계고택에서도 잘 보이는 이 산은 지금 백이산으로 바뀌었는데 조려의 충절을 백이숙제에 비유한 것이며, 두 봉우리 중 높은 봉우리를 백이봉이라 하고 작은 봉우리를 숙제봉이라 부르는 것도 같은 연유다.

    원북동 입구에 있는 채미정(菜薇亭)의 채미는 고사리를 캐먹는다는 것이니, 곧 백이숙제의 절의를 지키겠다는 것이다.

    채미정 앞에 있는 바위는 조대(釣臺)로 부른다. 조려가 낚시를 하던 곳으로 그 바위 위에는 후대에 세운 청풍대가 있는데 채미정의 좌우에 걸린 백세청풍의 청풍을 말하고 있다.

    또 물길을 따라 2㎞ 정도 내려가면 고마암이라는 경치 좋은 절벽을 만나는데 그 아래 바위를 어조대라고 한다. 역시 조려가 낚시를 하던 곳으로 절벽에 새겨 놓은 백세청풍의 의미가 크게 다가온다.



    ▲금은유풍(琴隱遺風)의 의미

    어계고택의 금은유풍 현판은 조려가 자신의 조부인 금은(琴隱) 조열(趙悅)의 절개를 잇고자 한 것이다. 공민왕 때 전서벼슬을 지낸 조열은 거문고를 잘 타 이름을 날렸으나,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자 낙향했다. 태조는 1394년 11월 26일 한양으로 천도한 후 낙성연을 열었는데 조열을 초청했다. 그가 마지못해 베옷과 짚신 차림으로 입궐하자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 함께 수학한 친구를 위해 거문고를 타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조열이 공민왕이 청할 때도 거문고를 타지 않았는데, 후일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공민왕을 뵙느냐며 거절했다. 조열이 이처럼 절개를 소중히 하니 모은(茅隱) 이오(李午), 만은(晩隱) 홍재(洪載)와 함께 영남삼은으로 불렸다.

    글·사진= 배성호 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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