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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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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을 가다] 작가와 떠나는 경남 산책 (26) 송창우 시인이 찾은 마산 진동 바다

갈꽃 흔든 겨울바람이 물오리들을 날린다
조선 때 삼진지역 땅 이름이 ‘진해’
진해현 동헌 등 흔적 곳곳에 남아

  • 기사입력 : 2012-12-13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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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창포만의 풍경은 밀물 때 평화롭고 아름답다. 물오리떼가 창포만을 날고 있다.
    과거 진해지역임을 나타내는 옛 진해현 동헌.
    진동면 선두리 남근석과 연리목.
    장기마을 길가에서 굴을 까고 있는 할머니.
     
    창포만 썰물 때 바닷물이 빠지면 드넓은 갯벌이 드러난다.




    진해는 지금의 진해에 있지 않았다. 물론 온 거리가 벚꽃으로 피어 있지도 않았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이런 말은 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얘기겠지만, 지금은 이런 말이 꽤 엉뚱하게 들린다. 근대 백년의 시간이란 어쩌면 그렇게 당연한 사실에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어 온 시간이다.

    그러나 분명 진해는 지금의 진해에 있지 않았다. 진해는 조선 태종 13년(1413) 지금의 마산 진동 일대에 진해현이 만들어진 이후 오랫동안 삼진지역을 일컬어온 땅이름이다. 진해 읍성을 중심으로 동쪽은 진동으로, 북쪽은 진북으로, 서쪽은 진서로 불렸다. 후에 진서지역은 진주군의 양전면과 합해지면서 한 글자씩 따 진전면이 되었다. 그러던 것이 일제가 옛 웅천현의 관할이었던 지금의 진해에다 군항을 건설하고 진해라는 지명을 붙이면서부터 빼앗긴 이름이다.

    근대 100년 그렇게 속절없이 이름은 빼앗겼지만, 옛 진해현의 동헌과 마방과 객사의 추춧돌과 늙은 푸조나무 한 그루와 일렬로 나란히 선 석비군은 아직도 진해를 지키고 있다. 진동면 면사무소 옆에 남아 있는 동헌 건물은 1832년 진해현감 이영모가 건립했다고 한다. 바로 옆, 지금의 삼진중학교 자리에 있었던 객사 건물은 교사로 쓰이다가 화재로 소실되고 이제는 주춧돌만 남았다.

    옛날 고을 사또가 업무를 보고 재판을 하던 동헌 마루에 앉아본다. 동헌 입구엔 줄줄이 송덕비와 선정비들이 서 있지만 모든 사또들이 선정을 펼치지는 않았을 터. 특히 18세기에 많이 세워진 선정비들 중에는 백성의 눈물과 피를 짜서 세운 가짜들도 많았을 것이다. 나는 비석 위에 새겨진 깨알 같은 공덕들과 백성의 평화가 못내 의심스럽다. 그러나 고을 현감으로 다녀간 이들 중에 사상의학의 창시자인 이제마와 같은 인물들도 있었음을 기억해야겠다. 이제마는 1888년에 진해현감으로 부임했다고 하는데, 판결에 있어서는 엄중했고 진해현은 물론 웅천, 고성까지 가서 백성들을 치료해주었다고 한다.

    진동 깊숙이 들어온 바다의 건너편은 미더덕으로 유명한 마을 고현이다. 고현은 이름 그대로 옛 현이 있던 곳인데, 조선 초 진해현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이곳에 우산현이 있었다. 우산(牛山)은 고현마을 뒷산의 이름인데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을 한 데서 온 이름이다. 그리고 그 앞바다를 우해(牛海)라 불렀다.

    우해는 풍요로웠다. 조선 후기의 선비인 담정 김려(1766~1822)는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진해현으로 유배를 오는데, 이곳 바다의 온갖 물고기들에 반해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를 남겼다. 1803년에 완성된 ‘우해이어보’는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쓴 ‘현산어보(玆山魚譜)’보다 11년이 앞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어보다. 어류 53종, 갑각류 8종, 패류 11종 등 모두 72종에 이르는 특이한 어패류들의 생태와 물고기들을 잡는 방법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바닷가 마을의 풍경과 삶을 노래한 ‘우산잡곡(牛山雜曲)’ 39수의 한시가 곁들여 있다.

    ‘우해이어보’에는 유배 온 한양 선비에게는 특이한 물고기로 보여 기록되었지만, 우리에겐 너무도 익숙한 볼락도 있고, 정어리도 있고, 도다리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흔적을 찾을 길 없는 희한한 물고기들도, 낯선 풍경들도 있다. 이 책을 통해 200년 전 진해현 바닷가 마을을 그려보자면 이런 풍경이다.

    바다에는 수십 개의 죽방렴이 있었다. 그중 관이 소유한 한 개의 죽방렴을 제외하고는 모두 개인이 소유한 죽방렴들인데, 썰물에 어부들은 죽방렴에 나가 크고 싱싱한 물고기들을 건져 올렸다. 낚싯배를 타고 좀 더 먼 바다와 섬으로 나갔던 어부들은 더 큰 물고기들을 잡아왔다. 때론 포수(적조)를 피해 물고기들이 해안으로 밀려들어올 때 어부들은 작살을 찔러 물고기들을 건져 올렸다. 아마도 어부들 곁에서 돌멩이로 물고기 대가리를 맞혀 잡아내는 아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포구에는 게딱지로 지붕을 덮은 가난한 집들이 있다. 그들의 집 줄대에는 사시사철 물고기들이 걸려 있고 아낙들은 물고기 배를 따느라 바쁘다. 진해현 남문 밖에 장이 서는 날에는 줄지어 선 술집들이 밤이 늦도록 불을 켜놓고 물고기를 굽고 조개를 삶는다. 아가씨가 새로 온 술집에는 이방도 형방도 모여들어서 아가씨를 꼬셔보느라 호기 있게 마신 말술에 정신줄을 놓는다.

    그렇게 우해 바닷가의 옛 풍경들을 그려보고 있는데 고현 포구가 떠들썩하다. 앞바다의 양식장에서 막 채취해온 오만둥이들을 포구에 부려놓는 중이다. 미더덕과 함께 고현마을의 특산물인 오만둥이는 11월부터 1월까지가 수확철이다. 나는 된장찌개 속에 들어 있는, 앞니로 톡 깨물면 혀를 데일 듯 뜨거운 물이 왈칵 쏟아지는 미더덕의 맛과 향기를 좋아하지만, 미더덕이 나오기 전까지는 오만둥이를 대신 씹으며 혀의 그리움을 달랜다.

    고현마을 지나 장기마을 안길에 들어서니 양지바른 담장가에 마을 사람 몇이 좌판을 펼쳐놓고 오만둥이를 손질하고 생굴을 까고 있다. 한 60년 생굴을 까고 앉았다는 할머니는 꼭 가덕도에 사는 내 어머니를 닮았다. 손이 굴쩍처럼 딱딱해지도록 굴을 까온 내력도 그렇고, 퍼질러 앉은 폼도 그렇고, 밤마다 생손가락을 앓는 것도 그렇다. 사람은 다르지만 굴 까는 사람들의 삶은 다 한결같이 닮았다. 아마 200년 전 김려의 눈에 비쳤을 바닷가 마을 아낙들의 삶도 그러했으리라.

    내친김에 우해 바닷길을 돌아 창포마을 입구까지 걸어본다. 장기마을을 지나면 선두리다. 선두리 부둣가에는 매우 특별한 것이 있다. 해송 한 그루와 팽나무 한 그루가 가운데에서 몸을 합쳐 자라는 연리목이 있는데, 몸은 한 몸이 되었어도 가지 끝은 제 본성대로 산다. 해송은 푸르고 팽나무는 잎사귀를 다 버렸다. 그 나무 곁에 돌로 깎아 만든 남근석이 하나 서 있다. 남근석은 김려가 ‘해음경(海陰莖)’이라고 써놓은 개불을 꼭 닮았다. 발기부전이 있다면 맛없는 비아그라 대신 맛있는 개불을 한번 먹어보시라. 개불을 깨끗이 말려 가늘게 갈아서 젖을 섞어 음위에 바르면 바로 발기한다고 써놓았다. 그런 기운이 부부간에 미치면 금실이 좋아지고, 바다에 미치면 풍어가 된다.

    ‘우해이어보’에는 금실이 무척 좋다는 물고기에 대한 기록도 있는데 원앙어다. 이 물고기는 암수가 항상 함께 다니는데, 수컷이 가면 암컷은 수컷의 꼬리를 물고 가서 죽어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낚시를 하면 반드시 한 쌍을 잡게 된다는데, 옛 진해현 사람들은 남자는 원앙어 암컷의 눈깔을 허리춤에 차고 여자는 수컷의 눈깔을 차면 부부가 서로 사랑하게 된다고 믿었다. 그랬던 원앙어는 어디로 다 사라져버린 것일까?



    포구의 젊은 여인 연분홍 화장하고

    흰 모시적삼에 옥색 모시치마 입었네

    비녀 들고 재빨리 고깃배로 달려가더니

    제일 먼저 비녀 팔아 원앙어 사오네.

    - 김려, 우산잡곡(牛山雜曲)



    김려가 유배생활을 한 마을로 짐작되는 율포리 바닷길을 돌아 진전천이 바다와 만나는 창포만에 닿았다. 갈꽃을 흔들고 지나온 겨울바람이 놀란 물오리들을 날린다. 창포만은 한창 밀물 때여서 푸른 바다가 강물을 밀고 올라왔다. 밀물진 창포만의 풍경은 평화롭고 아름답다. 그러나 창포만의 진면목을 보자면 썰물이 지는 때를 기다려야 한다.

    사실 이번 여행의 대부분은 썰물이 지는 때를 기다리며 갈대숲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찬바람에 몇 번이고 마음은 갈대처럼 흔들렸지만, 그 한나절 동안 ‘우해이어보’를 다시 꼼꼼하게 읽었다. 마침내 드러난 광활한 갯벌과 마주했을 때, 우해가 풍요로웠던 까닭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갯벌 위에서 물새의 발자국과 게의 발자국과 내가 일생을 닮아보고 싶은 한 시인의 발자국을 보았다.

    /글·사진= 송창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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