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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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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일흔에 창동예술촌서 작품 활동 송창수 화백

쉰 넘어 시작한 화가의 길… 내 나이 칠십, 또 시작입니다
흥남서 풍족한 유년시절 중 6·25 발발
1·4 후퇴 때 어머니·여동생과 부산으로 피란

  • 기사입력 : 2012-12-18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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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창수 화백이 창동예술촌의 ‘드 세느’ 갤러리에서 작품 활동에 대해 설명을 하며 웃고 있다. 뒤에 보이는 그림은 작년에 그린 자화상이다.
    송창수 화백이 인물화를 그리고 있다. 송 화백은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소재라는 생각으로 80세까지 작품활동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박완서의 소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는 1·4후퇴 때 헤어진 자매의 굴곡진 운명을 그린 작품이다. 이 소설은 배창호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져 흥행가도를 달렸고, 박완서는 명실상부한 당대 대표 여작가로 이름을 날린다. 평범한 주부가 대문호로 칭송받기까지, 그녀는 자신의 생을 날카롭게 할퀴었던 한국전쟁과 1·4후퇴, 서울수복 등 피란민으로서의 팍팍했던 세월을 담담하게 소설로 풀어냈다. 창원의 한 아틀리에에서 송창수(70) 화백을 만났을 때, 문득 박완서 선생의 생전 모습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전쟁이 가족을 찢어놓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국군과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중공군에게 서울을 내줘야 했다. 이것이 바로 1·4후퇴다. 이때 국군을 따라 남으로 내려오는 수천명 피란민 대열에 송창수 화백이 끼여 있었다. “흥남이 공업도시다 보니 우선으로 집중포격될 것이라는 소문이 흉흉했어요. 그리고 12월에 흥남철수작전이 있었지요. 그 불지옥 같았던 LST(Landing Ship Tank)선(船)에 어머니와 저, 여동생이 올랐습니다. 배가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지요.” 아버지는 출타한 상태,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형과 누나는 학교를 갔던 새였다. 3일 후에 돌아올 계획으로 출발한 배는 온갖 모진 풍랑을 겪으며 영원히 흥남부두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 송 화백이 8살, 여동생은 태어난 지 보름이 갓 넘은 때였다.

    ▲서울신랑에서 소년가장으로

    광산업에 종사하던 아버지 덕에 풍족한 유년시절을 보낸 송 화백. 집 규모가 어마어마해 국군이 흥남으로 올라왔을 때 주둔지로 삼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명마와 명견을 기르던 풍류가였어요. 저는 세련된 두루마기를 입고 다녀 서울신랑이라 불렸지요. 한마디로 부르주아의 삶이 예정되어 있던 것이었는데, 전쟁은 저를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하루아침에 권세가의 자제에서 부산 바닥에 떨어진 피란민으로 전락해버린 그. 설상가상으로 소년가장이 되어야 했다. “산후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어머니가 편마비 증세를 보였어요. 8살 먹은 제가 면사무소에 가서 쌀과 우유를 타오고 핏덩이 동생을 돌보았지요.”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땔감을 구하는 일이었다. 피란민들이 산에 있는 나무를 죄다 베가니 산주들이 눈에 불을 켜고 나무를 지켰다. 송 화백은 그들의 눈을 피해 솔방울을 따 연명했다. 1년 반이 지나자 어머니의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미 극한의 고통을 경험한 그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슬픈 감상에 빠지면 아직 덜 고통스러운 겁니다. 생존의 문제에는 감상이고, 이목이고, 그런 것이 끼어들 틈이 없어요.”

    송 화백에게는 11살 차이가 나는 형이 있었다. 그는 미술천재였다. “형님은 수채화, 유화, 조소 등 미술 전 분야를 섭렵했지요. 고등학생 때 김일성과 스탈린 흉상으로 전국공모에서 1등을 했던 전도유망한 미술학도였습니다.” 꼬마였던 그는 형을 통해 미술이라는 별천지를 넘어다보았다. 그 세계는 놀랍도록 아름답고 경이로웠다. 그가 남으로 내려올 때 형은 모스크바로 유학을 가 있던 상태였다. “2000년대 초, 광주비엔날레에 북한화가 작품 전시가 열렸어요. 저는 형이 분명 대성했을 것이라 믿고 달려갔지요. 하지만 형의 작품은 없었습니다.” 망연자실해 있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형의 이야기를 전해듣게 된다. “함께 남으로 내려온 사람 중에 형의 약혼녀가 있었습니다. 그분을 우연히 만났는데, 형이 모스크바에서 부쳐온 마지막 편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북한 당국이 미술에서 조선산업으로 전공을 바꾸라 명령했다고 적혀 있었다더군요.” 그 후 선교사들을 통해 형이 조선의용군 숙청사건이었던 연안파 사건에 휘말려 숙청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제가 결혼을 하자 어머니가 입을 여셨어요. 사실은 형뿐 아니라 아버지도 국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총살을 당했다고요. 제가 잘못될까봐 그 사실을 20년이 넘도록 함구했노라고.”

    ▲자수성가 그리고 결혼

    부산상고를 졸업한 그는 부산시청 공무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워낙 싹싹하고 수완이 좋았던 그는 마산에 있던 일본계 신발제조회사로 자리를 옮겼고, 한국인 책임자로 발탁돼 1000명 가까운 직원을 거느리며 상승가도를 달린다.

    한창 잘나가던 총각 시절, 이발소에 갔다 눈에 번쩍 띄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웬 아낙이 아이 머리를 깎이러 왔는데, 그 모습이 하도 아름다워 이발사에게 저 아주머니 참 아리땁다고 했지요. 이발사가 웃으며 하는 말이 아주머니가 아니라 처녀라며, 아이는 조카라 일러줬습니다. 그날부터 여인의 마음을 얻으려 줄기차게 쫓아 다녔죠.” 특히 그녀가 성지여고 시절 미술부 활동을 한 이력이 마음에 쏙 들었다. 형이 그에게 낙인처럼 남겨놓은 미술이라는 세계가 환한 빛을 뿜으며 그녀를 비추는 것 같았다. 결국 송 화백은 아내 조영순 씨의 마음을 얻었고, 2남 1녀를 둔 부부가 되었다. 가정을 꾸린 뒤에는 자동차 부품 납품회사를 운영하며 봉암공단 수석부회장까지 역임해, 자수성가한 사업가로 변모한다.

    ▲사람을 그리기 시작하다

    1997년, 또 하나의 격랑이 순항하던 그를 덮친다. IMF가 터지면서 중소기업에 불어닥친 연쇄부도가 그를 피해 가지 않았던 것. 연금을 깨 회사를 정리한 후 나이트클럽에서 일하기까지 했다. “스스로를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아내가 붓을 쥐어주었어요. 일주일에 겨우 한 시간, 문화센터에 나가 김태홍 선생에게 그림을 배웠습니다. 클럽 귀퉁이 공간을 마련해 틈틈이 그림을 그렸지요.” 처음에 정물이나 풍경을 그리던 그의 관심대상은 점점 사람으로 옮겨갔다. 가장 아름다운 소재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람 생김새마다 매력 포인트가 있지요. 아름다운 각도가 있고요. 그러던 중 이강민 선생을 만났어요. 선생이 저더러 비례감각과 형태감각이 뛰어나다며 인물을 그려보라 권하셨지요.” 곧 이종두, 이임호 선생에게 인물화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그렇게 시작된 인물화는 어느새 그의 목표이자 숙제이며 기쁨이 되었다.

    현재 송 화백은 창원 창동예술촌의 ‘드 세느’라는 이름의 아틀리에에서 작품활동을 한다. 인물화를 배우려는 문하생을 가르치고, 초상화를 의뢰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기도 한다. “이보다 행복할 순 없네요. 숨 가쁘게 달려온 칠십 평생 이제야 하느님이 저에게 공간과 시간이라는 자유를 주시는군요. 형님 생각이 많이 납니다. 누구보다 자유로워야 할 예술가가 꿈을 접을 때, 그 심정이 어땠을까 싶습니다.” 올가을, 송 화백의 집에 경사가 났다. 마산부두에 일하는 노무자의 모습을 자신에게 투영해 그린 ‘휴식’이라는 작품이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작으로 뽑힌 것. “이제 시작입니다. 앞으로 80세까지 10년 내다보고 하루 5~6시간씩 그려요. 앞으로는 인물의 역동적인 동세를 포착하려 합니다. 지켜봐 주세요. 허허.” 온몸으로 근대사의 풍랑을 오롯이 겪어낸 뒤, 사람이 가장 아름답다는 영롱한 진리를 얻은 송 화백. 10년 후, 그의 배가 단단하게 닻을 내린 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라며 오늘을 회상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글=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사진= 김승권 기자 s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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