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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고 싶다] 의령 곽재우 생가·현고수

둥둥둥, 홍의장군의 북소리가 가슴을 울린다
대나무숲에 싸인 생가 엄숙하고 장엄
곁에 선 500년 된 은행나무 위용 더해

  • 기사입력 : 2012-12-27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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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의병장 곽재우 생가. 안개로 뒤덮여 고요함과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곽재우 의병장의 생가.
    의병장이 북을 매달아 치면서 의병을 모집하고 훈련했다고 전해지는 ‘현고수’.
    현고수 곁 북을 매달아 놓은 누대.


     
    “공이 숨을 거둘 때 하늘에 뇌성이 울리고 큰비가 내리며, 붉은 기운이 하늘에 뻗쳤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1617년(광해군 9년) 4월 10일 ‘구국의 성웅’ 망우당 곽재우 의병장이 지던 날을 성여신은 ‘부사집’에서 이렇게 썼다.

    하늘에서 내려온 붉은 옷을 입은 ‘천강(天降)’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 의병장의 흔적을 더듬던 지난 14일도 공이 스러지던 날과 같이 장대비가 쏟아졌다. 하늘은 안개로 뒤덮여 한 치 앞을 볼 수 없었다.

    섣부른 외지인의 낯선 방문으로 혹 숭고한 얼이 손상이나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큰비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억측마저 들게 했다.

    평소 현고수를 시작으로 마을길을 걸어 생가를 방문하던 것과 달리 의병장의 나라사랑과 웅혼한 기상이 살아 숨 쉬는 생가를 먼저 찾았다.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의병장의 생가는 대나무숲에 싸인 채 적막감마저 들었다. 고요함은 엄숙미와 장엄미를 덤으로 선사했다. 날아갈 듯 하늘로 치솟은 기와지붕은 의병장의 당당함을 더했고 7동의 건물은 권위를 상징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2005년 복원된 이곳은 사랑채와 안채, 별당, 큰곳간, 작은곳간, 대문, 문간채 등 7동에 방문객을 위해 화장실을 따로 갖췄다.

    대문을 넘자 사랑채가 눈에 들어왔다. 세찬 비바람을 피해 잠시 대청마루에 앉았다. 지정면과 유곡면의 경계를 넘자 비바람이 한풀 꺾이는 듯한 푸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잘 정비된 마당, 반질반질한 대청마루가 의병장의 곧은 성정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 밖 너른 들녘은 금방이라도 의병장이 말을 타고 먼지를 일으키면서 달려올 것 같았다.

    문간채를 건너 안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채 마루에 앉으니 500여 년을 넘은 은행나무(천연기념물)가 집을 보호하듯 서 있다. 세간리 마을을 지켜온 서낭나무로 알려져 있다. 그 위용과 품세가 의병장이 현신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했다.

    학생들의 소풍이나 학습을 위한 장소로 활용되면서 황토벽 곳곳에 낙서가 조금 거슬렸다. 그러나 의병장의 넉넉한 품은 이 정도의 소란스러움과 떠들썩함은 충분히 받아넘길 수 있을 것으로 여겨져 맘에 큰 불편은 없었다.

    비를 뚫고 마을길을 천천히 걸어 현고수에 도착했다. 1592년(선조 25년) 왜군이 부산포에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41세의 선비였던 곽재우 의병장이 이 느티나무에 북을 매달아 치면서 의병을 모집하고 훈련을 시켰다는 데서 유래했다. 의병장은 매부인 허언심과 함께 전국 최초로 의병을 모아 훈련시키고 가재를 털어 병사의 의식주를 해결했다고 한다.

    520년의 풍상을 잘 견딘 느티나무는 추위와 비바람에도 아랑곳않고 당당한 기세를 뽐냈다. 밑동은 장정 두서너 명이 아름을 둘러야 이를 정도다. 두 개의 큰 가지에 4~5개의 중간 가지가 넉넉하고도 당당한 품을 자랑하고 있다. 특히 아래에서 2m쯤 곧게 자란 나무는 큰 가지 두 개가 모두 왼쪽으로 휘어져 북을 매달기에 안성맞춤이다.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곳곳에 버팀목을 댔다.

    현고수에서 20여m 떨어진 곳에 누대를 새로 만들어 북을 설치, 방문객들이 ‘그날’의 북소리를 가슴으로 듣게 했다. 가볍게 두드리자 둥, 둥, 둥 소리를 내면서 내 맥박도 덩달아 뛰는 것 같았다.

    마을회관을 찾아 동네 어르신을 만났다.

    전병관(70) 씨는 “의병장의 생가터는 없어지고 집터만 남아 있다”면서 “현고수 맞은편 기와집 뒤편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그곳을 찾겠다는 마음에 다시 동네로 발걸음을 재촉했으나 기와집에 문이 잠겨 있어 돌아와야 했다.

    빗줄기는 점점 거세졌다. ‘남한과 북한으로 갈라서 양쪽이 대치하고 남한 내부조차도 하나로 통합하지 못하는 오늘을 개탄하는 의병장의 눈물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한편 생가가 있는 의령은 의병장의 외가이다. 망우당의 유해는 경북 달성군 구지면 구지산 기슭에 안장하고 유언에 따라 작은 무덤에 봉분도 평평하게 만들었다. 사후 이듬해 달성군 유가면 가태동에 사당을 세우고 충현사라 이름지었으며, 조선 숙종 때 서원으로 높여 예연서원(禮淵書院)으로 사액했다. 말년에 의병장이 머물던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에는 망우정이 있다. 의령읍에는 의병들의 애국정신을 기리는 의병탑이 있고 충익사를 비롯한 기념관 등이 건립됐다. 또 의병의 날을 제정, 그들의 위대한 정신을 기리고 있다.

    글= 이병문 기자·사진= 성민건 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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