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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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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2012, 대진고속도로의 단상- 황진성(시인)

  • 기사입력 : 2012-12-28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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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해는 개인 사정으로 거의 매 주말마다 대전~진주 간 고속도로를 왕복했다. 토요일 새벽이면 진주에서 출발하여 대전으로 갔고 일요일 밤에는 대전에서 출발해 진주로 오곤 했다. 덕분에 고속도로 휴게실에 단골 커피점도 생기고 휴게실 직원과 아이들 안부까지 묻게 되어 에스프레소의 샷 추가 정도는 덤으로 마시기도 했다.

    대진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세 개의 큰 산을 통과해야 된다. 어머니 품같이 드넓은 지리산에 안겼다 육십령 긴 터널을 지나 남덕유산을 향해 달려올라 갈 때면 시샘하는 변덕스러운 시누이처럼 급격히 기후가 바뀌곤 한다. 4월에도 육십령 터널을 빠져나오면 세상이 하얀 눈 속에 잠겨 있기도 하고 어떤 날은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기도 하다 활짝 갠 환한 세상이 열리기도 했다.

    봄에는 도로 양옆을 환하게 웃으며 밝혀주는 벚꽃을 보며 행복했고 여름에는 경호강 강물 따라 흐르는 저녁놀을 보며 황홀해했다. 태풍 볼라벤이 오는 날도 나는 대전에서 출발해서 진주로 오고 있었다. 주변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태풍의 눈을 향하여 달려간다는 생각에 스릴까지 느끼며 질주본능을 일깨우며 달렸던 것 같다. 산과 산 사이를 연결하는 긴 다리가 많아서 다리 위를 통과 할 때는 강풍으로 인해 차가 흔들리기도 했지만 칼 한 자루 들고 거대한 괴물 문어의 입속으로 뛰어들었던 캐러비안 해적의 두목처럼 볼라벤을 향해 거침없이 내달렸었다. 속도에 맛을 들이며 달리는 쾌감으로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버리는 상쾌함을 다음 시에서 발표한 적 있다.

    태풍의 눈을 향해/ 덕유산과 지리산 이어놓은 긴 다리 위/태풍을 맞으러 당당하게 달린다/ 전사처럼 갑옷도 칼도 없지만/ 나 언제 마주 치는 바람 피한 적 있던가 <본인의 졸시 태풍의 눈을 향해 1연>

    어느 달 밝은 보름날에는 둥근 보름달이 산봉우리에 휘영청 걸려서 달려오는 내 차를 계속 따라온 적도 있었다. 적상산과 덕유산 지리산의 봉우리마다 건너뛰며 나를 쫓아오는 통에 운전하면서도 내가 운전을 하는지 달빛이 나를 조종하는지 왠지 오싹해서 연신 백미러를 보며 혹시 무임승차한 달빛이라도 있나 확인한 적도 있다.

    아이는 북쪽으로 나는 남쪽으로 길을 잡았다/ 해는 기울어지고 별이 한 둘 솟아오른다/ 대전 진주 간 고속도로/ 전조등 앞으로 구부러진 길이 비틀거리며/ 술 취한 듯 튀어나왔다 사라진다/ 어둠이 깊어 갈수록/ 산봉우리는 구름위로 얼굴 내놓고/ 잠에 빠지지 않으려 발뒤꿈치 곧추세운다 <본인의 졸시 인셉션 1연>

    이번 첫눈도 덕유산 자락에서 만났다. 밤 덕유산 자락을 지나는데 눈발이 라이트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덕분에 덕유산 휴게소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미 낯이 익은 직원과 얘기를 했다. 집이 바로 아래인 안성인데 눈이 계속 오면 내려 갈 수 없어서 좀 일찍 문을 닫고 가려고 서두르던 참이었다. 서로 조심해서 잘 가라 인사를 하고 눈 내리는 휴게소 광장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었다. 사진 오른쪽 귀퉁이에 얼굴의 사분의 일만 나오게 하고 가로등이 비추던 눈발과 눈 내리는 밤의 고즈넉한 휴게소를 찍었더니 꽤 운치 있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내가 매주 이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힘들지 않고 즐거워했던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진주에서 대전 쪽으로 달릴 때와 대전에서 진주 방향으로 올 때의 경치가 다르다는 것을 문득 느꼈기 때문이다. 상행 쪽에서 산의 앞 얼굴을 본다면 반대방향에서는 산의 뒤통수를 본다고나 할까? 유심히 관찰해 보니 분명 산의 고랑과 완만한 각도와 햇살의 비추는 정도와 숲이 달랐다. 그런데 한 번은 이편 경치가 마음에 들고 또 다른 경우는 반대편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왜 그럴까? 아마도 그리운 사람이 있는 쪽으로 갈 때 그 방향 산의 얼굴이 더 깊이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던 거 같다. 모든 길은 그리운 마음 쪽으로 통하나 보다. 2012년의 대진 고속도로는 눈발 속에 그리움으로 묻힌다.

    황진성(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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