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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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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진정 쓸모없는 것일까?- 김명희(시인)

  • 기사입력 : 2013-01-04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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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사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 첫날이면 전국의 해돋이 명소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일출을 보며 새로운 다짐이나 소원을 빌기도 한다. 그것은 인류의 신화적 사고에서 기인한 제의(祭儀)의 일종이기도 하다.

    “신화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현대를 생각하는 것과 직결된다.” 일본의 철학자 나카자와 신이치 교수의 말이다. 그는 자신의 강의록을 엮은 ‘곰에서 왕으로-국가 그리고 야만의 탄생’ 카이에 소바주 2권에서 현대사회는 야만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신화를 통해 현대사회에 고착된 야만을 예리한 필력으로 해부하고 있다.

    신화적 사고는 인간이 자연을 대칭적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유동적 지성에 의존한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대상과 비대상 간의 등가적 인식을 지칭한다. 유동적 지성은 인간과 모든 동물들이 유동적으로 왕래할 수 있는 역지사지의 행태를 말한다. 이는 물활론적이며 동일시의 세계로서 동화작가나 시인의 사고관과 유사하다.

    이런 신화적 사고의 세계에서 진정한 문화가 태어난다. 문화 덕택에 인간은 욕망을 억누르고 절제된 행동을 한다. 사회의 합리적인 운행을 유지하기 위한 규칙을 지키며 동물은 결코 모방할 수 없는 정제된 삶을 실현하는 것이다. 또한 신화적 사고는 암유와 환유의 능력을 확장하면서 상징 표현을 통해 서로 다른 의미의 장 사이에 통로를 열어준다. 동시에 타자에 대한 공감을 드러낸다. 아울러 초월적 존재를 직감해 초월의 사고를 하게 된다.

    지금 우리는 신화적 사고, 즉 대칭성의 균형을 상실했다. 다시 말해 문명에 압도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화적 사고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은 기술력으로 인해 편리한 세상에 살아가는 것 같지만, 기실 문명의 이기에 편승한 채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더욱 신화적 사고 능력이나 감성이 절실하다. 이를 위해서는 그 중심에 문학이 놓이게 된다.

    우리는 문학의 근간을 제의(祭儀)에 두고 있다. 특히 시는 문자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구전돼 왔다. 초기 농경사회에서는 샤머니즘 제의와 깊은 연관이 있었다. 농사가 잘 되기를 빌거나 재앙을 물리치려고 외운 주문 형태로 시작된 것이었다.

    임진년 마지막 날의 해와 계사년 첫날의 해는 같은 해다. 그러나 우리는 새해라고 각별한 의미를 둔다. 어떤 사물이나 공간도 의미 부여 여부에 따라 확연히 달라진다. 즉 의미 부여하기 나름인 것이다. 의미 부여하기가 바로 문학의 한 방편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 부여도 신화적 사고와 등가일 때 진정한 가치를 발휘할 것이다.

    우리는 돈 없고 힘없는 소시민이다. 그러나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언어를 가졌다. 야만과 대항할 수 있는 무기이자 보물인 언어! 이 언어가 신화적 사고와 함께 어우러질 때 세상은 아름다워진다. 진정한 문학은 현재에 대항해 새로운 세계를 지향한다. 이는 문명에서 문화로 나아가는 것과 같다. 언어와 신화적 사고의 힘이 만들어내는 역작이기도 하다.

    올해도 꿈꾼다. 인간이나 자연 등 타자와의 동일시 내지는 그들과 공감하는 세계를. 비록 꿈으로 끝날지라도…. 여전히 반짝반짝 빛나는 언어능력을 가진 젊은이들에게 문학의 본질을 가르친다. 가끔 사람들로부터 무엇을 가르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우스갯소리로 현실에 별 쓸모없는 것을 가르친다고 답하곤 한다. 학생들에게 문학 수업은 스펙 쌓기에 도움도 안 되고 스킬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진정 쓸모없는 것일까?

    김명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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