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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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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의 마을 아, 본향! (1) 창원 진전면 오서리 동대·서대마을

권환이 노래했던 풍경과 역사의 아픈 얼룩 옅게 남아

  • 기사입력 : 2013-01-08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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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동대마을의 안동권씨세거지 비석.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번성했지만 지금은 터만 남은 오서시장.
    사람들이 떠난 빈집 대문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일제시대 민족운동의 요람으로 많은 애국열사를 배출했던 경행재.
    동대마을 정판규 이장.
    서대마을 박경근 이장.


    우리네 본디의 고향, 본향(本鄕)의 전통적인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 물 좋고 공기 좋고 인심도 넉넉했던 그런. 이맘때쯤이면 좁은 농로에 거름을 가득 실은 소달구지가 덜컹댔고, 벼 밑둥치가 삐죽삐죽 솟은 투박한 논바닥에선 해 저무는 줄 모르고 소년소녀들이 공놀이와 얼음지치기로 왁자지껄했던, 젊은 기운으로 가득했던 고향이 1990년대 이후 퇴조하고 있다. 급속도로 진행된 산업화·도시화의 필연적 결과이자, 짙은 그림자다.

    도내 자연마을은 지난 연말 기준으로 18개 시·군에 총 7867개. 젊은이 대부분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났다. 그래서 대부분 70·80대 이상 노인들만 산다. 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게 될 10~20년 후의 내 본향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현재도 허물어지고 있는 빈집이 부지기수다. 최근 귀농·귀촌이 늘고는 있지만 제대로 명맥이나 유지하고 있을지, 상상조차 두렵다. 그래서 나선다. 사라지기 전에 기록해 놓기 위해서이고, 고향을 떠나온 도시인들에게 향수를 전해주기 위해서다. 경남신문은 새해를 맞아 도내 자연마을의 현주소를 들여다보는 ‘경남의 마을 - 아, 본향!’ 기획시리즈를 싣는다.



    ‘넓은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이하 생략)

    천재시인 정지용(1902~1950)은 1927년 시 ‘향수’에서 이렇게 농촌을 그렸다. 그랬다. 먹고살기 위해 떠나온 도시인들에게 각인된 본향은 이런 모습이었다.

    들판 한가운데 위치해 진주시와 고성군, 창원시 방향으로 분기하는 국도 2호와 14호 왕복 4차선 자동차 전용도로에 마치 포위된 것처럼 보이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도 한때는 그랬다.

    오서리는 ‘옛 진해현 서쪽에 있는 다섯마을’이라는 뜻으로 동대, 서대, 월안, 탑동, 회동마을을 통칭한다. 이 중 면소재지와 파출소가 있는 동대·서대마을이 오서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두 마을은 원래 대(竹) 군락지로 죽실(竹室)로 불리는 한마을이었으나, 진전천에서 분화된 개울(물통골)이 마을쪽으로 흘러드는 것을 경계로 해 ‘동대’와 ‘서대’로 분리됐다고 한다. 하지만 두 개의 마을이 완전히 붙어 나그네 입장에선 구분하기가 쉽잖다. ‘安東權氏世居地(안동권씨세거지)’라 새긴 비석이 서 있는 동대마을은 안동 권씨, 서대마을은 밀양 박씨가 많이 산다.

    특히 동대마을은 노무현 전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의 친정이자,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문학의 대표적인 인물 권환(1903~1954)의 출생지로도 유명하다. 일제침탈기엔 ‘충절’과 ‘저항’의 중심지였고, 민족이 좌우로 갈려 피를 흘렸던 6·25전쟁기엔 좌익이 우익인사를 다수 살상하기도 했던 ‘이념 대립의 상처’가 얼룩진 곳이기도 하다.

    일본에 유학 중이던 민족문학가 권환은 고향 동대를 이렇게 노래했다.

    ‘내 고향의 우거진 느티나무 숲, 가이없는 목화밭에서 푸른 물결이 출렁거렸습니다 / 어여쁜 별들이 물결밑에 진주같이 반짝였습니다 /검은 황혼을 안고 돌아가는 흰돛대 당사(唐絲) 같은 옛 곡조가 흘러 나왔습니다 / 그곳은 틀림없는 내 고향이었습니다 / 꿈을 깬 내 이마에 구슬같은 땀이 흘렀습니다.’

    권환은 고향마을 한가운데 서 있던 느티나무와 드넓은 채마밭, 마을 옆으로 흐르는 1급수 진전천에 비친 별무리, 진전천이 여정을 끝내고 바다로 흘러드는 창포만 앞바다에 떠 있는 돛단배를 상상하며 객지에서의 외로움을 달랬던 것으로 보인다.

    권환이 노래했던 것처럼, 아직도 동대마을의 자연은 옛 모습 그대로다. 인걸(人傑)만 간 데 없을 뿐….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동대·서대는 활기가 넘쳤다고 한다.

    정판규(66) 동대마을 이장과 박경근(76) 서대마을 이장은 “경행재 옆에 닷새마다 오서시장이 설 때면 고성 배둔과 회화에서도 사람들이 장을 보러 올 정도로 북적거렸다”고 회고했다.

    가구수도 300가구가 넘어 각 가정은 4~8명씩의 대가족이었고, 마을 인구도 1500명은 족히 넘었다. 하지만 1990년대를 넘어서면서 젊은이들이 대거 도시로 빠져나갔고, 지금은 대부분 독거노인이나 노부부만 살아 현재 두 마을 인구는 모두 합해 봐야 600명 남짓이고, 그마저도 주민등록만 돼 있고 객지에 나가 있는 사람을 빼면 훨씬 줄어들 것이라고 박 이장이 전한다. 동대는 209가구, 서대는 89가구로 꽤 큰 마을이다.

    하지만 동대마을에 있는 오서 재래시장은 서지 않은 지가 오래돼 형태만 남았고, 일제강점기 때 학교로 사용돼 민족운동의 요람이기도 했던 권씨 문중 재실인 경행재(景行齋·경남도 문화재자료 132호)도 인적이 없어 휑하다. 텃밭으로 변한 권환 시인의 생가터는 늙은 감나무 한 그루만 쓸쓸하게 자리를 지키고 서 있고 이웃집도 빈집으로 허물어지는 중이다. 1970년대 경제부흥을 위해 세웠던 슬레이트 지붕의 ‘새마을공장’도 빈 건물로 남아 을씨년스러움을 더하고, 주변 폐가 5~6채는 시나브로 허물어지고 있다. 피아노학원과 다방, 식당 등은 모두 문을 닫았고, 동대·서대를 통틀어 작은 슈퍼 1개와 소리사 2개, 이용원·미용실 각 1곳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처럼 마을이 쇠락하고 감시마저 소홀해지면서 1급수를 자랑하는 진전천 주변이 도시건축폐기물의 무단 투기장으로 변해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박경근 서대마을 이장은 “진전천변에 최근 건축폐기물을 몰래 버리는 사례가 늘어 보통 문제가 아니다”면서 “둑길 입구에 차량 진입 방지봉을 설치하고, 마을 노인들에게 일비를 지급하는 ‘폐기물 투기 감시원’을 시에서 운영했으면 한다”고 하소연했다.

    글=이상목 기자·사진=김승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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