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18일 (목)
전체메뉴

[사람속으로] 진해 ‘흑백다방’ 代 이어 지키는 유경아 씨

내가 나고 자란 ‘흑백다방’의 숨결 이어갈겁니다

  • 기사입력 : 2013-01-08 01:00:00
  •   
  •  
    진해 근대사와 예술가들의 오랜 숨결을 간직한 흑백다방. 이곳을 지켜온 유경아 씨가 피아노 앞에 앉아 포즈를 취하고 있다.
    ‘흑백 since 1955’의 글자가 씌어진 간판이 다방 내부에 걸려 있다.
    유 씨가 드립커피를 만들고 있다.


    지난 1955년 6·25전쟁이 끝난 뒤 남도의 끝자락인 진해의 어느 다방. 40평 남짓한 공간에 15개의 테이블이 놓였다. 진한 커피향기와 함께 클래식 음악이 울려 퍼진 자리에는 청마(유치환)와 미당(서정주), 시인 김춘수, 화가 이중섭, 작곡가 윤이상이 앉았다. 이로부터 60년 가까이 흑백다방은 음악 감상실이자 연주회장, 화랑이자 소극장 역할을 한 예술인들의 산실이었다.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 전 고 유택렬 화백은 친구로부터 진해시 대천동의 ‘칼멘(다방)’을 인수했다. 사람들이 오가며 좋은 소식을 전하고 듣는 장소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 ‘까치’의 색깔을 따서 ‘흑백’으로 다방 이름을 정했다. 쉰여덟 번의 겨울이 지난 지금, 유 화백은 몇 해 전 유명을 달리했으며 그의 바람은 둘째 딸 유경아(47) 씨가 이어가고 있다. 6차례의 피아노 독주회, 열 손가락의 인대가 모두 파열될 정도로 피아노에 몰두하던 유경아 씨였지만 지난 1999년 영국 왕립음악원에서 ‘작곡가 코스’를 이수하던 중 돌연 흑백으로 돌아왔다.

    ▲모카골드와 클래식 음악 = “커피부터 한잔 하셔야죠.” ‘흑백’으로 들어서자 유경아 씨가 입구로 걸어가며 말했다. “어릴 때부터 흑백은 손님들에게 ‘모카골드’를 대접했어요. 다방이 문을 연 초창기에는 엄마가 미군부대에서 ‘맥스웰’을 얻어다가 커피를 만들었다고 해요.”

    유 씨는 지난 1965년 흑백다방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녀는 흑백이 문을 열 때와 문을 닫을 때만 출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담배연기가 자욱했던, 시대와 예술을 고민하던 문인들이 드나들던 공간에 어린 경아 씨는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었다.

    하지만 클래식 음악만은 부족함 없이 들을 수 있었다. “엄마 말로는 뱃속에서부터 음악을 듣고 자랐다고 해요. 음악을 하는 사람들에겐 최고의 환경이었던 것 같아요.” 피아니스트로서의 삶은 모태신앙처럼 의심할 여지가 없는 천직이었다. “진해지역을 통틀어서 피아노가 있는 집은 우리집밖에 없었어요. 60년대 초에 샀으니까, 제 나이보다 더 많은데도 아직 음색이 고와요.”

    흑백을 들어서면 오른쪽 벽면에 당시 LP판을 틀던 음악실(DJ부스)이 있다. 피아노를 치면서 들어야 할 음악이 있으면 아버지는 음악실 안에 의자를 놓고 헤드폰을 연결해줬다.

    ▲피아노를 놓다 = 지난 1984년 한양대 음악과에 진학해 피아노를 전공한 후 진해로 돌아온 유 씨는 1993년 4월 1일 진해 시민회관 개관식에서 창원 시립교향악단과 협연했다. 당시 그녀가 연주한 곡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Emperor)’였다.

    그녀가 이날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해 8월 어머니 이경승 씨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들려준 마지막 피아노곡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당시 서울에서 항암치료를 받던 중에도 둘째 딸의 연주를 보기 위해 진해로 내려왔다.

    어머니의 죽음은 흑백을 무겁게 짓눌렀다. “아버지는 그림이 안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림을 그려도 망치는 것 같다고 했어요.” 그녀 인생의 전부였던 까만 ‘업라이트(upright)’ 피아노의 건반 뚜껑도 함께 닫혔다. 아버지는 흑백에서 딸의 피아노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채근하지 않았다고 한다.

    “3~4개월쯤 지났을 때 피아노를 최대한 분해해서 구석구석 진공청소기로 청소했어요. 단순히 피아노를 닦는 게 아니라, 나를 청소했던 것 같아요. 돌이켜 보건대 아버지는 마음이 동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제가 스스로 하길 기다렸던 거죠.” 아버지 유 화백은 이 모습을 묵묵히 바라봤다.

    ▲지킬 수 없는 약속 = 유 씨는 아버지가 팔순이 되던 해 좋아하는 베토벤 연주를 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지킬 수 없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6년 만의 일이었다.

    “99년 8월 말에 아버지가 몸살이 나서 감기약을 드시고 잠이 드셨어요. 방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데 아버지가 오셔서 몸이 좀 이상하다는 거예요.” 당시를 회상하던 유 씨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헛기침을 해댔다. “내일 병원에 가보자고 말하고 새벽 2시쯤 됐을까… 제 방으로 오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주저앉았어요. 그때 119를 불렀어야 하는데, 경황이 없어서 응급실 생각밖에 안 났어요.”

    인근 병원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간 유 씨는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마산 고려병원(현 삼성창원병원)으로 갔지만, 신경과가 없어서 앰뷸런스로 창원병원으로 향했다. 유 화백을 아는 병원의 과장급 의사들이 직접 나와서 살폈지만, 병세는 날로 심해졌다.

    “오늘은 폐, 내일은 간, 이런 식으로 건강이 나빠졌어요. 이틀째 중환자실로 들어갔는데, 다음 날 담당의가 가족에게 전화하라고 했어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던 유 씨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아버지 별세 후, 유 씨는 태어나서 언니 승아(51) 씨와 가장 심하게 다퉜다고 한다. 흑백을 지키겠다는 유 씨와 동생을 걱정한 언니가 충돌한 것이다. 결국 유 씨는 지인에게 흑백다방을 맡기고 그해 겨울 영국 왕립음악원 유학길에 올랐다.

    ▲‘문화’와 ‘영리’ 사이에서 = 영국 왕립음악원에 도착한 유 씨는 ‘순수작곡’, ‘지휘’, ‘음악이론’ 등 3가지 코스 중 평소 하고 싶던 음악이론을 택했다. 그런데 계속해서 흑백이 눈에 밟혔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나고 자란 이곳이 포기가 안 된다는 점이었어요. 집안에서는 엄마와 아버지 시대의 흑백에 네가 왜 그렇게 매달리냐고 말했죠.”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돌아온 그녀는 흑백을 ‘연주회’, ‘실내악’, ‘연극’을 하는 다목적 소극장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2000년 3월. ‘늘근 도둑 이야기’ 연극 공연을 시작으로 7월에는 아버지와 약속했던 베토벤 3대 소나타로 자신의 ‘제2회 독주회’를 열었다.

    하지만 혼자서 흑백을 운영하며 피아니스트로 활동까지 하기는 무리였다. 2002년 쇼팽의 곡으로 제3회 독주회를 준비하면서 척추 2곳의 연골이 망가졌다. 유 씨는 “뭔가 해보려고 할 때마다 일이 생겨서 세상이 불합리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소회를 털어놨다.

    진해 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려던 지난 2008년, 그녀에게 또 한 번의 갑작스런 비보가 들려왔다. 영리 목적으로 운영하지 않으면 다방 간판을 내려야 한다는 말이었다. 유 씨는 아연실색했다. 진해시청 등 관계기관을 백방으로 돌아다녔지만, 차가운 반응에 실망감이 더 커졌다.

    그해 11월 간판을 내리기 위해 홀로 시청 민원실을 찾았다. 민원실 직원은 서류와 유 씨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 물었다.

    “시내에 있는 흑백 말입니까!”

    53년간 자리를 지킨 간판을 떼던 날, 그녀는 가슴 깊이 눈물을 흘렸다. ‘흑백 since1955’의 글자가 씌어진 간판의 겉면을 오려내 손에 쥐고 한참을 울었다.

    주위의 시선은 더욱 냉정했다. 몇몇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말을 내뱉었다. “어떻게 흑백의 간판을 내릴 수 있어?”라는 말이 비수가 됐다.

    ▲시민문화공간 흑백 = 간판 없던 2년 동안에도 선생은 흑백을 고집스럽게 지켰다. 정기적으로 연주회를 열고, 문하생들을 대상으로 피아노를 가르쳤다.

    그러자 창원지역 예술가와 시민단체들이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녹색창원 21’, ‘진해예술인총연합회’를 포함한 미술, 음악, 연극, 사진, 대학교수 등 각 분야 예술인과 단체들이 참여해 2011년 12월 ‘시민문화공간 흑백’이라는 이름으로 간판을 달았다. 지난 2008년에 떼어놓은 간판은 흑백 내부에 걸려있다.

    흑백이라는 간판을 다시 걸었을 때 유 씨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녀는 “흑백은 근대문화를 공유하는 곳이었지만, 시에서도 도움을 주지 않는 마당에 시민단체들이 나서서 간판을 올리라고 말하는 등 격려해줘서 정말 고마웠다”고 말했다.

    인터뷰 중간중간 흑백을 찾는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한쪽 벽을 장식한 고 유택렬 화백의 작품과 옛 정취를 간직한 사진들, 음악실 부스를 구경하는 이들에게 유 씨는 손수 내린 커피를 전했다.

    언제든 사람들을 반기는 흑백은 매주 토요일마다 음악 감상회와 연주회를 열고 있다. 입장료는 무료. 명목상 입구에 작은 후원금 통을 놔두었을 뿐이다.

    유 씨는 지난 2000년부터 5년마다 베토벤 연주를 하고 있다. 오는 2015년 50세가 되는 해의 연주는 그녀에게 조금 특별하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이 50이 되면 그 사람의 색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내가 50세가 될 때 만나는 베토벤이 어떨지 궁금하거든요.”

    진해 근대사와 예술가들의 오랜 숨결을 간직한 흑백.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오롯이 이곳을 지켜온 유 씨와 그녀의 연주가 몹시 기다려진다.

    글 = 정치섭 기자 sun@knnews.co.kr

    사진 = 성민건 기자 mkseong@knnews.co.kr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정치섭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