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3월 29일 (금)
전체메뉴

[경남을 가다] 작가와 떠나는 경남 산책 (30) 배한봉 시인이 찾은 고성 안국사

겨울 산사에서 내면의 고독과 마주하다

  • 기사입력 : 2013-01-10 01:00:00
  •   
  • 안국사 요사채, 저녁 굴뚝 연기가 고요한 절간의 인적을 대신하고 있다.
    고성 송학동 고분군과 지석묘(고인돌).
    도예 가마와 ‘쪽 염색’ 작업실과 처마에 매달린 수백 개 메주가 진풍경이다.
    염색 가마솥 뒤편에 있는 황토 굴뚝.




    춥고 황량한 겨울에 산골의 절을 찾는 까닭은 고요 속에 자신을 온전히 놓아둘 수 있기 때문이다. 바람소리 물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명의 불빛이 사라진 칠흑 한가운데서 별과 달을 온전히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깊고 무거운 적막 속에서 자기 내면의 고독과 온전히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홀로 겨울 절간의 툇마루에 턱을 괴고 앉아 있을 자격이 있지 않은가.

    대한이 와서 추워 울고 간다는 소한(小寒). 고성군 대가면의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안국사(安國寺) 간다. 안국사는 시인이자 도예가이며 쪽(藍) 염색 전문가인 대안스님이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수행을 하는 곳. 그래서 고찰도 아니고 사찰 규모도 자그마하지만, 여러 사람이 알음알음 이 절을 찾아든다.

    안국사로 향하다가 고성의 송학동 고분군(사적 제119호)과 만난다. 잔설 덮인 고분군 풍경이 이국적 느낌을 자아낸다. 소가야 왕릉 7기가 모인 송학동 고분군은 전통적 가야고분과는 다른 붉은색 채색 고분이라고 한다. 하지만 실제 내부를 볼 수 있는 곳이 따로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고분군 아래에 지석묘 한 기가 눈길을 끈다.

    송학동 고분군을 지나 평동과 연동의 들판길 지나 꼬불꼬불 산길을 오른다. 갈림길 모퉁이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안국사’라는 조그만 이정표가 길잡이 역할을 한다. 이정표라…. 무명의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잘 찾아야 한다고 말없이 언질을 던져주는 표지 같다. 하지만 우리 삶은 이정표가 없다. 길 없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프로스트는 “두 갈래 길이 숲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고 말했을 것이다.

    어느새 안국사 입구다. 약수를 한 모금 마시고 돌아본다. 냉기를 뿜어내는 쪽빛하늘이 절간 기왓골을 감싸고 있다.

    안국사에는 일주문이 없다. 사천왕문도 없고 범종각도 없다. 문이라고는 대를 쪼개 얼기설기 엮어 만든 단출한 사립짝이 전부다. 스님도 보살도 보이지 않는다. 굴뚝에서 나는 연기가 인적을 말해주고 있다. 대웅전을 본다. 단청도 없고, 벽화도 없고, 풍경(風磬)도 없다. 대웅전 맞은편 석불이 첩첩 먼 산 능선 아래 세상을 굽어보며 서 있을 뿐이다. 안국사의 살림살이와 대안스님의 성품을 짐작게 하는 풍경이다.

    三界猶如汲井輪 (삼계유여급정륜)

    百千萬劫歷微塵 (백천만겁역미진)

    此身不向今生度 (차신불향금생도)

    更待何生度此身 (갱대하생도차신)

    대웅전 주련의 게송을 읽는다. 채색이 되어 있지 않고 낡아서 글자 읽기가 쉽지 않다. 도신게(度身偈)라 불리는 새벽 종송(鍾頌) 구절이다. 현대식 문장으로 바꿔보면 이런 내용이다. “삼계를 사는 모습 우물 속의 달을 긷는 것 같이/ 백천만겁 지나도록 쉼 없이 오르락내리락 했네/ 이 몸을 이번 생에 깨달아 제도하지 못하면/ 다음 어느 생을 기다려 다시 이 몸을 제도하겠는가.”

    대웅전 왼쪽에 요사채가 있고, 오른쪽에는 도자기 가마와 쪽 염색을 하는 작업실이 있다. 작업실 뒤편에는 아직도 지난 연말에 내린 눈이 하얗게 쌓여 있고, 쪽빛을 깨울 때 물을 끓이는 가마솥 뒤에는 황토를 쌓아 만든 굴뚝 두 개가 이채롭게 나란히 서 있다.

    쪽 염색은 염색과정이 어렵고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온전한 쪽빛을 찾아내기 위해 대안스님은 대학원에서 연구를 거듭해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론과 실질적인 쪽 염색을 두루 섭렵한 것이다. 지금은 겨울철이라 쪽 염색 작업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겨울 안국사의 하늘은 손끝으로 톡, 치면 쨍, 소리가 날 듯 유리처럼 투명한 쪽빛이다. 쪽빛은 우리 삶이 힘들 때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상태로 마음을 돌려놓는다. 그러므로 쪽빛은 우리에게 소유하는 삶보다 존재하는 삶을 보여주는 성찰의 색채다. 고립이 아니라 서로 환대하고 서로 연대하는 상생의 색채다. 스스로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임을 일깨워주는 꿈의 색채가 바로 쪽빛이다.

    작업실 처마에 메주 수백 개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혹한의 냉기에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발효되는 중이다. 이 메주로 된장도 담그고 간장도 담근다. 안국사 장맛이 일품인 건 바로 이 메주 덕분이다. 메주 냄새를 맡으며 나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도 말라(一日不作 一日不食)는 선종(禪宗)의 청규(淸規)를 읽는다.

    “단순해야지. 단순하게 사는 게 좋아.”

    대안스님은 딱 이 두 마디로 중생들이 궁금해하는 것들에 대한 답을 내놓는다. “옛날에 어떤 스님이 감나무 위에서 감을 따고 있었거든. 고을 현감이 자문을 하려고 왔다가 ‘스님, 위험한데 내려오세요’하고 큰 소리로 말했지. ‘이 사람아. 여기서 보니 자네가 위험해 보이네.’ 스님의 대답에 현감이 큰 깨달음을 얻고 선정을 펼쳤다는 이야기가 있어.”

    단순하다는 것이 비우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단순하게 본다는 것은 현상을 꿰뚫어 보는 것과 같다는 말씀일 것이다. 휘둘러보니 자그마한 가람의 공간이 아주 넓게 보인다. 비우고 비워낸 자리가 무엇보다 큰 공간을 연출하고 있는 까닭이리라. 사람의 내면도 그러할 것이다. 무거운 적막 속에서 온전한 자신을 내놓고 대면할 때 우리는 본질과 만날 수 있고, 그 안에서 무한한 크기의 우주가 태어날 것이다.

    겨울이

    찬 바람을 놓는 순간

    봄이 되는 것을



    봄이

    꽃향기를 놓는 순간

    여름이 되는 것을

    여름이

    무더위를 떠나는 순간

    가을이 되는 것을



    가을의 문턱에서

    아직 겨울은 오지 않았는데



    무엇을 놓아야 하는지 묻지 않아도

    스스로 알고

    놓고 가는 마음



    그렇게 사계절은 하나의 몸짓임을 알게 됩니다 - <몸짓>, 대안스님



    안국사에는 매년 부처님 오신 날 하루 전에 ‘山寺쪽빛콘서트’가 열린다. 고성오광대나 동래학춤 같은 공연도 있고, 시인과 함께하는 토크쇼 형식의 산방한담도 있고, 시노래 공연도 함께한다. 콘서트가 마무리되고 나면 슬로푸드 시식회가 산사를 찾은 대중을 반긴다.

    동지가 지났는데도 6시쯤 되자 어스름이 내린다. 산골짜기에는 금세 밤이 깊어진다. 이내 칠흑이 덮치고, 겨울 숲이며 산 능선 같은 것들이 다 사라진 밤은 단순하지만 거대한 한 폭의 화폭이 되었다. 단순한 삶, 비우는 삶을 보여주려는 듯 금방 세수하고 나온 맑고 밝은 별들이 초롱초롱 그 화폭에 깔린다. 여실지견(如實知見)의 밤이다. 눈이 또렷하면 사물도 또렷하게 보인다는 불가의 가르침 그대로다.
     

    글·사진= 배한봉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이상규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