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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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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의 마을 아, 본향! (2) 김해 진례면 시례리 상촌마을

수백년의 시간이 고택에 머물고 흙담에 쌓였다
임진왜란 이후부터 광주안씨 집성촌 이뤄
150년 된 고택 ‘염수당’ 도문화재자료 지정

  • 기사입력 : 2013-01-15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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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경지 선생의 11세 손인 안봉환(왼쪽) 씨와 안병숙 이장.
    조선시대 때부터 자리를 지켜온 쌍괴정 회화나무.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02호로 지정된 ‘염수당’.
    조선시대 유학자인 안언호 선생을 기리는 예강재.
    상촌마을 안 흙담길.
    김해시 진례면 시례리 상촌마을. 곳곳에 흙담길과 고택, 고목이 150년째 마을을 지키고 있다.


    시내버스 정류장에서도 10분을 걸어야 한다. 멀리 보이는 김해 시루봉의 두 팔에 안긴 듯, 좌우로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작은 동네. 지명으로는 김해시 진례면 시례리 상촌마을, 주민들끼리는 ‘예동(禮洞)’이라 부르던 동네다.

    오래전, 마을 서당 ‘흥립재’에서는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효우(孝友)를 제일이라 가르쳤다. 강산이 수차례 바뀌면서 많은 것이 변했지만, 150년째 마을을 지키고 있는 흙담길과 고택, 뿌리 깊은 고목은 그 기억을 품고 있는 듯했다.



    ▲광주안씨 집성촌

    ‘상촌마을’ 비석이 세워진 마을 입구에서 안병숙(53) 이장을 만났다.

    안 이장은 “저~기 마을 앞에 보이는 논밭이 모두 한집안에서 11대에 걸쳐 농사를 짓고 있는 땅”이라며 마을 소개를 시작했다.

    한마을에서 300년에 걸쳐 농사를 짓고 있는 이들은 광주안씨 후손들이라고 했다.

    이날 안내를 맡아준 안병숙 이장은 물론, 이 마을 주민의 90%가 광주안씨다.

    이들이 이곳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게 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로 추정된다. 안경지(安敬祉) 선생이 함안에서 부인의 주거지였던 이곳으로 이주한 후, 마을을 만들어 현재까지 대를 이어 살고 있는 것이다.

    마을 입구에는 ‘시례 광주안씨 세거지(詩禮 廣州安氏 世居地)’ 비석이 세워져 있다.

    “본래 이곳에는 광산김씨들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안경지 선생의 부인이 광산김씨였거든요. 처가 동네로 들어와 이곳에 터를 잡게 된 것이지요.”

    역사가 그렇다 보니 대부분 마을 사람들끼리는 말 그대로 이웃 ‘사촌’ 관계다. 안 이장은 마을을 돌며 거의 대부분 집을 자신의 친척 또는 일가로 소개했다.

    마을에는 현재 총 38가구, 8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작은 슈퍼마켓 하나 없는 시골 마을에, 주민의 대다수가 노인층이지만 마을에는 여전히 활기가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비어 있는 집은 한 곳밖에 없는 데다, 학생과 아이들이 있는 집도 3~4가구에 달한다.

    골목길에서 만난 마을의 최고령자 안선진(94) 어르신은 “평범한 마을이다”며 “그래도 골짜기라서 공기는 참 좋다”며 껄껄 웃었다.

    어르신 말처럼 동네 뒷산인 시루봉에서 내려온 산맥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풍수지리상으로도 좋은 동네라고 합니다. 시례리가 저 시루봉에서 따온 이름인데, 시례리에서 윗마을이 우리 상촌마을이고, 저 밑으로는 하촌마을이 있지요.”


    ▲마을 안에서 조선시대를 만나다

    골목 안을 걷다 보면, 낮은 시멘트 담벼락이 갑자기 흙담으로 바뀐다. 그리고 그 낮은 흙담길을 따라 더 걸어가다 보면 그 끝에 한 고택이 모습을 드러낸다.

    조선시대부터 묵묵히 자리를 지켜왔다는 고택의 이름은 ‘염수당’.

    집으로 향하는 흙담길은 물론, 집 앞 조경수로 심어진 소나무 두 그루, 대문, 기둥, 살림살이 하나까지도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켜온 것들이다. 대문채, 사랑채, 안채, 가묘, 고방채와 기타 3동의 부속채 등으로 이뤄진 모양새도 그대로다. 집터와 일부 집기류는 300년, 집은 150년이 됐다.

    염수당은 이미 그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06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02호’로 지정됐다.

    현재 이 집에는 안경지 선생의 11세 손인 안봉환(85) 씨 내외가 살면서, 선조들의 흔적을 지키고 있다. 이장의 안내로 안봉환 씨가 글을 쓰는 사랑채로 들어섰다. 오래된 종이 냄새와 고가구에서 나는 특유의 향이 난다.

    안봉환 씨는 마을의 어른이지만, 촌수로 따지면 50대 이장님의 조카뻘이라고 했다. 이야기를 잇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 존대를 했다.

    안봉환 씨는 서울에서 교편을 잡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이곳에 내려와 살고 있다고 했다. 당시 3년상을 정식으로 치러내며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돋보기를 쓴 여든의 그는 여전히 글공부에 빠져 산다고 했다. 그가 열어서 보여준 서장에는 누렇게 빛이 바랜 고문서들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이 집안에 전래되어 오는 고문서 역시 도문화재 자료로 등록돼 있다.

    집 안에는 조상의 혼백을 모신 ‘가묘’도 있었다. 출타 시 가묘를 찾아 4대에 걸친 조상에게 인사를 드린다고 한다. 집을 나서며 안봉환 씨에게 마을 자랑을 부탁했다.

    “우리 마을은 유학사상이 뿌리 깊은 곳으로 예의를 중시하는 마을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우리 동네 서당을 찾아서 글을 공부하곤 했습니다. 또 한마을에 재실이 4개나 있는 것에 대해 자긍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후손들이 계속 이러한 좋은 문화를 이어가 주길 바랍니다.”


    ▲효우(孝友) 정신, 마을의 멋이 되다

    이 마을이 예동이라 불리었던 것은 조선시대 유명한 유학자인 예강 안언호 선생의 영향이 크다. 예강은 당시 많은 문하생을 두었고, 효우와 예를 중시했다.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후손 안봉환 씨는 개인 재실인 ‘예강재’를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매년 음력 3월에 유림들과 모여 제를 지내고 있으며, 이는 마을을 상징하는 주요 행사가 됐다.

    마을 중간, ‘훈지정’ 재실 앞에 심어진 ‘쌍괴정 회화나무’ 두 그루 역시 조선시대부터 자리를 지켜 온 의미 있는 고목이다.

    조선 후기 선비 안혁중이 그의 고조부인 지정 안대임과 그 형님 훈정 안대진의 효성과 우애가 돈독함을 기리기 위해, 이 형제의 첫 글자인 ‘훈’과 ‘지’를 따서 홰나무를 두 그루씩 심고, ‘쌍수훈지’라는 돌비석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150년 전 부러지면서 새로 심은 한 그루는 세월의 위풍이 느껴졌으며, 몇 년 전 고사하면서 새로 심어진 어린 후계목 역시 힘차게 뿌리를 박고 있었다.

    ‘쌍수훈지’에 새겨진 글은 이렇게 전해진다.

    ‘오래된 단 위 두 나무 우거져 푸르니/ 남아있는 선조 손길 느껴지누나./ 시례마을 모습 이리 아름다워졌고/ 우애와 집안화목 지금껏 이어졌다./ 그늘 이룬 무성한 잎은 쉬기에 좋고/ 봄 깊어 가지 이어지면 술 마시기 좋겠네’.


    ▲주민들 바람은 “이 모습 그대로”

    마을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 골목에서 마을의 막내(?) 격인 이은희(50) 씨를 만났다.

    이 마을로 시집온 지 30년 된 이 씨에게 아이들을 키우면서 여러 가지로 불편한 시골 생활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이제 상촌마을은 제2의 고향이 됐다. 그런데 이 씨는 최근 마을 사람들에게 걱정이 생겼다고 했다.

    “마을 옆으로 터널이 뚫리고 뒷산에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소식에 우리 마을이 원주민이 될까봐 걱정이에요. 그냥 이대로 조용하고 깨끗하게 자연마을 그대로 보존됐으면 좋겠어요.”

    이장 안병숙 씨 역시 마을의 보존을 꿈꾸고 있었다.

    안 씨는 “산업화 물결이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지금은 대부분 밖에 나가 있지만 후손들이 나이가 들어서 찾아와 살 수 있고, 조상을 기억할 수 있는 곳으로 남길 바란다”고 말했다.

    글= 조고운 기자·사진= 성민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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