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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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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근의 우리땅 순례 (79) 황강 27 가야산 해인사 팔만대장경~금선암

홍류동 겨울 물빛과 소리가 암자 마당 넘나들고…

  • 기사입력 : 2013-01-16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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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년 하담스님이 창건한 비구니 수도처인 금선암. 큰절과 가장 가까이 있는 암자이다.
    홍제암.
    사명대사탑 연꽃무늬.
    마애여래입상(중봉마애불).
    사명대사탑.
    해인사 장경판전 내부.




    올겨울 산사로 가는 길은 유난히 차갑다 못해 매서웠다.
    새해부터는 전력난에 따른 정전위기 극복을 위한 대비 훈련이 있었다. 지구의 온난화 영향으로 유례없는 폭설과 한파에다 불경기에 서민들은 물가고까지 겹쳐 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요즘 젊은 세대는 행복한 시대에 태어나 취업이 어려운 불행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직장을 구하는 일이 겨울 산사의 바람보다 더 차갑다고 한다.
    그래도 넓은 세상을 향해 희망을 가져야 한다.결국 희망은 내가 찾아서 극복해야지 다른 사람이 내 인생을
    대신해주지는 않는다. 새해에는 모두 소망하는 일들이 이뤄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겨울철이 답사를 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팔만대장경·중봉마애불입상>

    어릴 적 어머니께서 새벽에 정화수를 장독에 떠놓는 민간신앙을 보았다. 산골마을에 들어왔던 통일교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해 늘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한때 선배가 몸담고 있던 교회에서 봉사를 하기도 했고 천주교에서 교리를 공부하고 세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에 대한 의문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그러다 우리 문화유산 답사기행을 다니다 경북 선산의 어느 작은 사찰에 들렀다. 갈 곳 없는 병든 노인들을 먹이고 재우고 씻기는 초라한 비구니 스님으로부터 종교의 의미를 이해하는 기회를 가졌다. 비구니 스님의 말에 의하면 어떤 종교를 갖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종교를 믿든지 그것으로 인해 마음에 평화가 오고 평화로 인해 행복하다면 그것이 진정한 종교라고 했다.

    절집이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곳이니 불교의 기원에 대해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불교는 기원전 5세기경에 고타마 싯다르타(석가모니)가 창시하였다. 그는 브라만교의 지나친 권위주의와 엄격한 신분 차별 등에 반대하고 인간의 평등과 윤리적 실천을 통한 해탈을 가르쳤다. 불교가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은 동북부 인도에서 새롭게 형성된 농업 경제와도 관련이 있다. 갠지스 강 중류 유역에서 발달된 농업 경제는 대규모 소 사육이 필요했으나 후기 베다 시대부터 대규모화된 제사에 소가 엄청나게 많이 소비됐다. 새로운 농업 경제와 이를 바탕으로 한 도시 문화가 발달하려면 소를 도살하는 제사가 반드시 중지돼야 했다. 이것이 곧 불교와 자이나교의 기반인 불살생 사상이 나타난 한 원인이었다. 석가모니는 자신의 가르침을 들으려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그의 처지에 걸맞은 방법으로 진리를 전했다.

    그의 가르침은 무사귀족인 크샤트리아와 평민인 바이샤 신분에게 주로 환영을 받았다. 거듭되는 전쟁으로 세력을 키워가던 무사귀족과 상업발달로 부자가 된 평민들이 그 지위에 어울리는 대접을 원했기 때문이다. 불교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주요 종교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불교는 인도 북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마우리아왕조가 제국의 판도를 최대로 키우고 전성기를 맞이했던 제3대 아소카왕(기원전 272~기원전 232)이 적극적으로 불교를 장려했다. 경전을 정리시키고 주변국에 불교를 전해 세계종교로 발전하는데 기여했다. 북쪽으로는 사막길(비단길)을 거쳐 우리나라와 일본까지 널리 퍼졌다. 부처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대장경은 석가모니가 80세를 일기로 입멸하고 500여 명의 장로들이 모여 각자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교법을 모으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통일된 교설을 확정한 것이다. 가야산 해인사에 보존돼 있는 팔만대장경의 유래는 초조대장경이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 봉안되어 보존되다가 1232년 몽골의 제2차 침입 때 방화로 불타고 말았다.

    고려 조정에서는 대몽항쟁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곧바로 새로운 대장경 만드는 일에 착수해 예비 작업을 거쳐 1237년부터 판각을 시작해 12년 후인 1248년에 끝이 났다. 그리고 3년이 지난 1251년 낙성경찬회가 열려 대장경이 최종 완성됐음을 내외에 알렸다. 오늘날 우리가 팔만대장경, 재조대장경 등으로 부르는 고려 대장도감판 대장경이다. 대장경을 흔히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르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인도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수를 표현할 때 팔만사천이라고 하는 데서 유래했고, 인간의 번뇌 또한 무한해 팔만사천 번뇌가 있으며 그 번뇌를 다스릴 수 있는 부처의 가르침, 곧 법문도 팔만사천 가지인데 그것을 새긴 대장경이므로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다.

    실제 경판의 양도 8만1340매에 이르니 팔만대장경에 부합되는 셈이다. 팔만대장경은 완성된 지 765년 동안 거의 아무런 손상 없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고 글자가 마모, 결락된 것도 없다. 경판이 부식되거나 갈라지거나 휘고 뒤틀린 것도 없다. 목판이 마치 어제 만든 듯 생생하게 보존되고 있는 것을 보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책 한 권으로 기록을 해도 부족함이 없는 팔만대장경에 대한 이야기를 다하지 못함이 아쉽기는 하지만 문득 대장경판전에 있는 경판이 진정한 부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근래 대장경판전 주변에 줄을 치고 접근하지 못하도록 삼엄한 경비를 하고 있고 사진 찍는 것까지 금지하고 있는 것은 과잉 반응이라는 생각이 든다.

    팔만대장경 구역을 벗어나면 가야산 등산로를 만나게 된다. 극락골을 거쳐 가야산 정상으로 가는 산길을 따라 약 5리쯤 오르면 길옆 바위에 돋을새김으로 높이 7.5m의 듬직한 불상이 있다. 사람들은 행복했던 과거를 추억 삼아 살아간다.

    한창 산행을 할 때는 가야산 정도는 단번에 올랐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상의 공식 명칭은 보물 제222호 합천 치인리 마애여래입상이지만 보통 중봉마애불이라 부른다. 불상의 민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크고 높직하다. 미소가 없는 풍만한 사각형의 얼굴에는 날카로운 눈꼬리, 두꺼운 입술, 턱주름 등이 표현되었으며 귀는 어깨에 닿을 듯 길고 목에는 3개의 주름이 뚜렷하다. 어깨는 넓고 당당하여 얼굴과 함께 자신만만한 자세의 불상을 나타내고 있다. 양 어깨에 걸친 옷은 왼쪽 어깨에서 매듭을 지어 고리를 만들었으며, U자형으로 연 가슴에는 내의가 보이고 띠매듭이 있다.

    중봉불상의 가장 큰 매력은 두 손이 아닌가 싶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엄지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었고, 왼손은 검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구부려 가슴에 대어 손등을 보이고 있다. 특히 손은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처리하여 생동감이 느껴진다.

    <홍제암·금선암>

    중봉마애불에서 내려오면 일주문 부근에 홍제암이 있다. 홍제암은 사명대사가 수도하다가 세상을 떠난 곳으로 홍제암이라는 암자 이름은 사명대사 입적 후 광해군이 내린 ‘자통홍제존자’라는 시호에서 따온 것이다. 사명대사는 1608년 연이은 전란으로 인하여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해인사로 왔으며, 지금 홍제암 터에 초암을 지었다.

    입적 후 혜구스님이 초암이었던 자리에 가람을 창건해 사명대사의 영정을 모셨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한 기록이 남아 있다. 부속 건물로 서래각과 북동쪽에 사명대사탑과 석장비가 있다. 탑은 조선 후기를 대표할 수 있는 거대한 종 모양의 탑으로, 당당한 형태와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기단은 하나의 돌로 2단을 이뤘고, 아랫단은 사각형이고 윗단은 둥근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그 위에 종 모양의 몸돌을 올려놓은 모습이며 탑의 꼭대기에는 연꽃 봉오리 모양의 보주를 올려놓았다.

    석장비는 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석으로, 광해군 4년(1612)에 세웠으며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비문을 지었다. 계곡 방향으로 눈길을 주면 금선암 입석이 있다. 텃밭 너머로 보이는 법당의 모습이 들어온다. 금선암은 1945년 하담스님이 창건한 비구니 수도처로서, 큰절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암자이다. 비탈에 지어진 전각은 텃밭과 지붕이 맞닿을 듯 나란하다. 맨 위엔 법당이 있고, 계곡 아래쪽으로 전각들이 들어섰다. 암자는 계곡과 맞닿아 있어서 홍류동의 겨울 물빛과 소리가 마당으로 넘나든다.

    (마산제일고등학교 교사·옛그늘문화유산답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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