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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을 가다] 작가와 떠나는 경남 산책 (32) 송창우 시인이 찾은 양산 원동

임경대 서니 낙동강 물줄기 한눈에 담기고
화제리 곳곳선 소설 ‘수라도’ 무대 펼쳐지네

  • 기사입력 : 2013-01-24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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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봉산 자락 임경대의 너럭바위에 서면 김해 상동면과 양산 원동면 사이를 흘러 내려오는 낙동강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황산강 임경대’라는 시를 남긴 고운 최치원 선생의 발길도 이곳에 머물렀으리라.
    용화사에 있는 석조여래좌상.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졌다.
    원동면 화제리 명언마을. 이곳은 김정한의 중편소설 ‘수라도’의 무대가 됐다.
    용당리에 있는 사당 가야진사. 삼국시대부터 낙동강의 용신을 모셔왔다.
    가야진사 앞 용당나루터. 4대강사업으로 강변이 파헤쳐지고 수풀도 사라졌지만 1년 만에 긴 모래톱이 다시 생겼다.


    강을 가로막고 거대한 보가 건설되던 여름 한낮에 나는 보았다. 철망 너머로 붉은 깃발이 나부끼는 것을. 포클레인들이 번쩍번쩍 강바닥을 퍼 올리는 것을. 질주하는 대형 트럭들 위로 산산이 흩어지는 은모래 금모래를. 그 아수라장을.

    그날 이후로 나는 낙동강엘 가지 않았다. 아마도 울산에 사는 형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지지 않았다면, 원고 마감이 좀 더 남아 있었다면, 틀림없이 나는 낙동강엘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서 물금교차로를 휘돌아 나와 낙동강으로 향했다. 형의 병문안을 핑계 삼아, 원고 마감을 핑계 삼아 그렇게 그리운 낙동강엘 갔다.

    낙동강의 옛 이름은 황산강(黃山江)이다. 황산은 오늘의 물금인데, 강은 황산나루를 지나 구포로 흘러가고 영남대로 옛길은 사배고개를 넘고 메깃들을 지나 황산나루로 올라온다. 옛날 낙동강을 거슬러 오르며 한양 천 리 길을 가던 사람들의 발걸음은 여기에서부터 몹시 위태로워진다. 강변의 바위 벼랑을 지나며 아슬아슬하게 난 ‘황산 베랑길’. 마침내 한양으로 되돌아가던 동래부사의 발걸음이야 그나마 좀 가벼웠겠지만, 괴나리봇짐 속에 일말의 희망을 싸서 과시를 보러 가던 만년 낙방거사의 발걸음은 시작부터가 무거워서 이 벼랑길에 이르러 그만 돌아선 이도 적지는 않았으리라. 집으로 곧장 되돌아가기는 쑥스럽고, 하여 낙동강 너머로 지는 해에 시름을 달래다가 황산나루 주막집에서 한 달포쯤 술이나 퍼마시다가….

    그랬거나 말거나 한양으로 가자면 이 길이 가장 빠른 길이었는데, 관도랍시고 양반들의 등쌀에 황산 베랑길을 걸을 수도 없었던 백성들 중에 더러는 이 길을 열망하기도 했을 것이다. 생의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오봉산 화제고개를 넘어야 했던 보부상들이나, 돈 없고 힘없는 백성들은 이 벼랑길이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험하다 해도 어찌 한 번쯤 걸어보고 싶지 않았으랴. 그런 까닭에 벼랑길에 들어섰다가 재수 없게도 마주 오는 동래부사 행렬과 맞닥뜨린 바람에 낙동강으로 떨어져 죽었다는 사람의 얘기도 전하는 것이다.

    그랬던 길을 지금은 KTX가 지나간다. 기찻길 너머론 4대강 사업으로 만들어진 낙동강 자전거길이 있다. 나는 그냥 1022번 지방도를 따라 화제고갯길을 넘는다. 가다 보면 강 쪽으로 내려가는 비탈길이 나오는데 그 길의 맨 아래쪽 경부선 철길과 닿아 있는 곳에 용화사가 있다. 마당 가운데 느티나무 한 그루를 품고 앉은 용화사는 오래되지 않았다. 그러나 용화사 대웅전에 앉은 돌부처는 오래됐다. 보물 제491호인 석조여래좌상은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원래는 김해군 상동면 감로리 절터에 있었다는데, 어느 해엔 강변 부근에 버려졌다는데, 그러다가 1947년 2월에 이 절집으로 옮겨온 것이라 전한다. 말하자면 천년의 곡절 끝에 낙동강을 건너온 파란만장 부처님이다.

    나는 이 돌부처를 9년 전에 처음 만났다. 요산 김정한의 소설 <수라도>에 등장하는 지명지리와 관련한 소논문을 쓰느라 원동면 화제리 일대를 쏘다닌 일이 있다. 그 답삿길에 소설 속 가야부인이 강변에 묻혀 있던 돌부처를 발견하고 우여곡절 끝에 불상을 모시게 되는 ‘미륵당’을 이곳으로 추정하고 들어섰던 것이다. 그 후로 9년이 지났건만 용화사도 돌부처도 변함이 없다. 다만 변한 것은 마당 가운데의 나무가 조금 더 자랐고, 마당 한 귀퉁이에 이곳이 <수라도>의 무대임을 알리는 문학비가 하나 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당가를 서성이는 사내는 참 많이도 변했다. 삼십 대의 사내는 어느덧 사십 대 중반을 넘어섰고, 희망을 품기보다는 절망을 견디는 일에 더 익숙해졌다. 지난 9년의 시간이란 사내의 세상이 수라도로 조금 더 가까워진 시간이다. 수라도. 끊임없이 욕망하며 서로 싸운다는 아수라의 세상.

    힘겹게 내려온 비탈길을 도로 올라 오봉산 산자락을 넘어가면 임경대(臨鏡臺)가 있다. 아니 임경대가 있었다고는 하나 임경대가 어디인지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다. 임경대는 고운 최치원 선생의 발자국이 머물렀던 곳인데 분명한 것은 낙동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이었으리라는 것.

    오봉산 자락에서 임경대로 추정되는 곳은 모두 다섯 곳이나 된다. 그중에 한 곳은 이미 십수 년 전에 정자도 짓고 현판도 붙였지만 위치가 잘못됐다는 논란이 많았다. 그러다 최근엔 그보다 위쪽 벼랑 끝에 있는 너럭바위를 임경대로 추정해 새로 안내판을 세웠고 복원사업이 계획돼 있다. 이곳은 진짜 임경대가 맞을까. 솔숲을 지나고 푸른 댓잎을 흔들며 나아간 곳에 스무 명은 섬직한 너럭바위가 있다. 그 너럭바위에 서면 김해 상동면과 양산 원동면 사이를 흘러 내려오는 낙동강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맑은 날엔 하늘의 한 점 구름까지도 다 비춰낼 것 같은 거울. 고운은 임경대에서 이런 시 한 편을 남겼다.



    연기 낀 봉우리 빽빽하고 물은 넓고 넓은데

    물속에 비친 인가 푸른 봉우리에 마주섰네.

    어느 곳 외로운 돛대 바람 싣고 가노니

    아득히 나는 저 새 날아간 자취 없네.

    - 최치원 시, <황산강 임경대>



    임경대라 새로 추정한 곳은 그 이름에 능히 어울릴 만큼 고즈넉하고 맑고 아름다운 강의 풍경이 있다. 이곳을 임경대로 삼아도 좋으리라. 다만 되돌아 나오는 길에 나는 또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 임경대를 복원한다니 도대체 뭘 복원한다는 말인가. 그냥 저대로가 임경대일진대 행여 복원이랍시고 저 너럭바위 위에 또 정자라도 한 채 앉힐까 걱정이다.

    김정한의 중편소설 <수라도>의 무대는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다. 화제리는 요산의 처가가 있던 곳이고, 주인공 가야부인은 처조모를 모델로 삼은 것이라 한다. <수라도>에 그려진 화제리의 풍경은 너무도 사실적이어서 <수라도>를 읽은 사람이라면 처음 오는 길이라도 화제리가 그리 낯설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화제리는 명언마을을 비롯해 토교, 외화, 내화, 죽전, 도덕골 등 크고 작은 자연 마을을 함께 아우르는 이름이다. 마을과 마을 사이로는 화제천이 흘러 낙동강에 닿는다. 가야부인의 시댁인 오봉 선생 댁은 마을 어귀 해묵은 느티나무가 서 있는 명언마을 어느 집이었으리라. 소설 속의 길들을 좇아 무당 천금새가 산다는 태고나루(토교)도 가보고, 냉거랑(화제천) 건너 오봉 선생의 유일한 글 친구인 양접장이 사는 대밭각단(죽전)에도 가보자. 대밭각단 들머리에는 족히 오백 그루는 될 듯 잘 자란 솔밭이 있다. 소나무 사이로 듬성듬성 작은 무덤들이 들앉았는데, <수라도>에서 괴질에 비명으로 죽은 고명딸의 체봉이 있던 곳이다.

    화제리를 나와 원동역에 앉아서 잠시 매화꽃이 필 날을 가늠하며 기차를 기다려 보다가, 다시 원동 습지의 물버들나무에 눈길을 주다가 용당리 가야진사(伽倻津祠)에 닿았을 때는 해가 지고 있었다. 천태산을 등에 지고 강 건너 용산과 마주하며 앉은 가야진사는 삼국시대부터 낙동강의 용신을 모셔온 오래된 사당이다. 삼국사기에는 한강, 금강, 포항의 곡천강과 함께 나라에서 강에 제를 올리던 사독(四瀆)의 하나라 기록돼 있다. 삼룡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오는 사당의 벽면에는 한 마리의 황룡과 두 마리의 청룡이 그려진 그림이 걸려 있다. 그림 속의 용들이 사는 곳은 용산 아래 용소인데 낙동강에서 가장 깊은 곳이라 한다. 해마다 용소에 생돼지를 바치며 홍수와 가뭄이 없기를 빌어온 세월이 천년도 더 지났다.

    그런 유서 깊은 역사에도 가야진사는 4대강 사업으로 한순간에 터를 잃고 이전될 위기에 처했으나, 가야진사 부근에서 옛 제사 유물들이 발굴되는 바람에 가까스로 제자리를 지켰다. 아마도 세 마리 용신의 힘이었으리라. 그러나 그 힘이 가히 인간의 욕망을 압도하지는 못해서 주변 강변은 파헤쳐지고, 수풀은 사라진 채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 맛 좋기로 유명했던 강변의 원동딸기도 모두 사라졌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강바닥을 준설하고 비스듬히 돌을 쌓아올린 졸렬한 석축 아래에 다시 긴 모래톱이 생긴 일이다. 몇십 조를 들여 만든 인간의 공덕이란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아 이렇게 허무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마침내는 낙동강의 용신이 아수라의 인간을 물리치고 벌하리라. 지금쯤 푸른 기와집에 앉은 인간은 쫄고 있겠다.

    글·사진= 송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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