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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08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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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품을 말한다] (44) 서양화가 노충현

캔버스에 활짝, 사랑 꽃피다

  • 기사입력 : 2013-01-28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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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화가 노충현 씨가 자택인 김해시 진영읍의 한 아파트에 마련된 작업실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노 작가가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를 스케치한 연습장을 들어보이고 있다.


    노충현 작가의 집엔 책이 많다.“습관적으로 독서를 합니다. 책을 읽다 보면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라요. 책 내용과 제가 처한 환경이 마찰하며 머릿속에서 스파크가 튀죠.”

    연습장도 많다. “방이며 거실이며 연습장이랑 연필을 손 닿는 곳에 두고 튀어오르는 스파크를 재빨리 에스키스로 남깁니다. 그게 바로 작품 구상이지요.”

    게다가 불만도 많다. “작가정신이 없는 화가들에게 할 말 많습니다. 한번 들어보시렵니까.”그리하여, 그의 철학과 소신, 작품세계를 들어보기로 했다.

    ▲신동이라 불리던 시골소년

    ‘소신 있는 작가’ 노충현은 뜻밖에도 누나 셋 아래 막내다. 꼬장꼬장한 성격은 아버지가 물려주셨다. “의령경찰서 순경이셨습니다. 당시엔 서장이 심심하면 순경들 세워놓고 따귀 때리는 일이 예사였는데, 어느 날 참다 못한 아버지가 서장 뺨을 먼저 쳤죠. 다음 날 경찰복을 벗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읍내 생활을 버리고 대산리로 들어가 정미소를 차렸다. 그리고 일평생 동안 막내아들을 묵묵히 뒷바라지해주셨다. “워낙 개구쟁이라 어머니가 차분하게 만들려고 그랬는지 크레파스를 사주시며 누나들 따라 학교 가서 그림 그리다 오라셨죠. 1학년 때는 학교대표로 상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신동이라 불리며 자랐죠.” 하지만 중학교에 들어가서 그를 혼란에 빠뜨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생대회에 나갔는데 도시에서 온 애들이 하나같이 너무 잘 그리는 거예요. 얼마나 주눅이 들었던지, 그림을 제출하지도 않고 가방에 숨겨 왔어요. 후에 마산으로 나와 접한 세련된 도시 화풍에 기가 확 꺾였죠. 어쩌면 사생대회에서 제가 그렸던 그림이 진짜였을지도 몰라요. 기교 없는 싱싱함이 거기에 있었을 테니까요.”

    ▲대학시절부터 첫 개인전까지

    방황 끝에 다시 붓을 들었고, 창원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한다. 대학 다닐 땐 살바도르 달리의 영향을 받아 초현실적이면서도 묘사가 뛰어난 그림을 그렸다. 당시 대학생들은 의무적으로 경상남도미술대전에 작품을 내곤 했는데, 그의 그림이 3년 연속으로 특선, 4학년 때 우수작품으로 선정돼 최연소 추천작가 타이틀을 얻었다. 하지만 그런 타이틀을 거들먹거리며 다닐 리 만무한 그였다. 민주의식이 자리잡고 본격적인 물질만능주의가 도래하는 과도기였던 만큼 졸업 후엔 민중미술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정치사회적 인식이 생겼어요. 그때 그린 그림들이 ‘오동동 04시’, ‘제비산의 P씨’ 같은 작품들인데, 자유를 부르짖는 젊음을 은유하거나 서민을 착취하는 부유층을 비판한 그림들이었죠. 95년에 성안백화점에서 첫 초대개인전을 열었는데 그땐 민중미술에서 벗어나 ‘문명찾기 시리즈’라는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사라져가는 전통문양을 찾아서 조형화하고 흙을 채취해 직접 만든 물감으로 그린 향토성 짙은 작품이었죠.”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키다

    아무리 좋아도 예술이 밥 먹여 줄 리는 없다. 대학졸업과 동시에 그는 입시미술학원을 차린다. 하지만 학원을 열면서 스스로에게 굳은 약속을 한다. ‘딱 10년만 벌고 그만두자’는. “궁극적 목표는 화가였으니까요. 시간이 지나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생기고…. 그러다 보니 어느덧 개원한 지 10년이 되는 해가 다가왔더라고요.” 그날로 과감하게 학원을 접고 대학원에 들어가 공부를 하면서 평생교육원에 출강했다.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아 2002년엔 아예 모든 외부활동을 접어버렸다. “그림 가르치는 거, 그게 생활에 밀착된 미술을 지향하는 순기능도 있지만 부작용도 많아요. 미술계 자체에도, 화가 자신에게도. 거기서 탈출하고 싶었죠. 부양해야할 가족도 있는 사람이 경제활동을 접어버렸으니…. 낯짝이 두꺼운 거죠. 하하하.”

    ▲힘든 만큼 행복했던 시간

    2005년과 2006년은 힘든 시간이었다. 작업실 월세가 밀려 보증금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지냈고, 도시락을 싸고 자전거로 왕복 20㎞를 달리며 하루 10시간이 넘게 작업만 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승부를 건 거죠. 물질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밑바닥까지 가보자는 생각이었죠. 조금 위악적이고 의도적인 면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질어진 마음에 부드럽게 노크하는 사람이 있었다. “노태준이라는 친구를 만났어요.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었는데 그림을 좋아해 제 작업실에 살다시피하며 그림을 배웠죠. 그 친군 몰랐겠지만 전 가느다란 생명줄처럼 그 친구의 존재를 부여잡고 그림을 그렸어요.” 그림을 통해 태준 씨를 이해하는 그 시간들은 그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도록 순화시켰다. “애석하게도 태준이는 하늘나라로 돌아갔어요. 돌이켜보면 그만큼 행복한 시간, 다신 없을 것 같네요.” 그러던 어느 날 한 콜렉터가 불쑥 찾아와 2000만 원어치 그림을 사갔다. 자신의 그림이 물질로 환원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후부턴 마법처럼 일이 풀리기 시작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가해 화풍을 정리했고, 학연이나 지연에 따른 열등의식을 벗어버리는 담력을 키웠다. 2007년에는 뉴욕, 싱가포르 등 해외아트페어에 진출하면서 서서히 그림이 팔리기 시작했다.

    ▲꽃이 피어나는 집을 화폭에 담다

    2007년, 그는 그림의 순기능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가족 해체가 워낙에 심각하잖아요. 그래서 화목한 가정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어요.” 그는 캔버스에 대리석 가루를 섞은 흰색 아크릴을 주걱으로 펴 바른 후 사포로 연마하는 작업을 먼저 한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본 대리석에서 영감을 얻었다. “관광객들이 대리석에 연필로 낙서를 해뒀는데 그 질감이 좋더라고요. 방금 그린 듯 거칠지만 밀도 있고 매끈하고.” 그렇게 완성된 표면에 가족과 사랑을 표상하는 소재들을 나열하듯 드로잉한 후 채색하거나 종이를 찢어 붙히는 방식이 그만의 기법이다. 마지막으로는 밀랍을 녹여 스미게 하거나 바니스 칠을 한다. 이 마무리 공정은 소재의 입체감과 작품의 보존성을 증가시킨다. 그의 그림에 가장 큰 특징은 ‘꽃’에 있다. 하지만 꽃송이가 탐스럽게 피어나는 보통의 묘사가 아니다. 지붕이나 굴뚝에서 뻗어나와 껑충 자라난 줄기 끝에 핀 꽃이 ‘이 가정은 사랑이 넘친다, 나는 사랑을 먹고 자란 꽃이다’는 의미를 뿜어낸다. 꽃 아래 집 안에는 부부가 서로를 껴안고 있고, 마당에는 장독이나 우체통, 피아노, 목마, 자전거, 가로등이 디테일하게 배치된다. 더 재미난 요소는 재료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꽃잎에 현란한 잡지를 부분적으로 오리거나 찢어 붙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인쇄물을 꽃잎에 숨겨 묘하게 드러내는 팝아트적 요소도 엿보인다. 그의 그림은 올해 초 삼성문화재단에서 만드는 2013년 달력과 다이어리, 가계부에 수록되며 더욱 유명세를 탔다. 소위 잘나가는 화가들이 대거 도전한 공모에서 모두를 제치고 그의 그림이 선정된 것. 작품이 수록된 홍보물은 전국 삼성생명 VIP고객에게 배부됐고 일부는 삼성 리움미술관에서 판매 중이다.

    ▲지역화가의 지역화단에 대한 일침

    “경남엔 제대로 된 미술평론가가 부재하죠. 그러다 보니 소위 미술정치꾼들이 기관이나 기업체와 기묘하게 연결돼 그림을 팝니다. 그들이 시장을 선취하고 나면 열심히 작업한 작가들은 그림을 팔 곳이 없어요. 그렇다고 그림을 매입하는 공공기관이나 기업체 자체에 안목 있는 사람이 있느냐? 없거든요. 그러니 잘 그리는 작가가 아니라 세일즈 잘하는 작가가 각광받는 이상한 행태가 경남미술계에 판을 칩니다.” 그는 대학의 미술교육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젊은 작가들이 왜 없느냐? 주범은 대학입니다. 세상살이 목표를 설정하고 방법을 제시하는 곳이 대학 아닙니까? 교수들에게 학생 개개인 인생에 대해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한 적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일단 졸업시키면 할 일 다했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제가 생각한 것이 대안적 연대입니다. 지각 있는 선배들이 뭉쳐서 후배작가들이 마음 놓고 그려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자는 겁니다. 소속감을 갖고 일할 수 있는 정신적 물질적 지주가 되어주자는 거죠.”

    ▲작업에 빠져서 세상을 모르고 싶다

    예술가의 인생에 있어 최대의 꿈이면서 최소한의 조건이 바로 ‘경제 사회적 상황과 무관한 작업환경’이다. “제 그림에 어느 정도 상업성이 가미됐다는 것 인정합니다. 수요를 무시하고 자기 하고픈 것만 하는 화가도 결코 좋은 화가는 아니니까요. 하지만 훗날엔 입체, 도판, 조각 등 장르 구분 없이, 팔리든 말든 제 마음대로 작업을 하고 싶어요. 작업에 빠져 웬만한 세상일을 모르고 늙어가고 싶네요.” 그는 그 첫걸음을 아버지가 계셨던 대산리에서 내딛고자 한다. “6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정미소가 그대로 있어요. 그곳을 화랑으로 만드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지금껏 작업해 오면서 제가 얻은 진리가 뭔지 아십니까? 역설적이게도, 그림은 그리면 그릴수록 더 어려워진다는 것이랍니다!”

    글=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사진= 김승권 기자 skkim@knnews.co.kr

    △노충현= 1960년 의령 출생, 창원대학교 및 동대학원 졸업, 개인전 22회 단체전 300회, 현재 창원미술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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