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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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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의 마을 아, 본향! (5) 창녕군 고암면 계상리 계팔마을

돌담길 사이로 옛 선비들 글 읽는 소리 들리는 듯…

  • 기사입력 : 2013-02-05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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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풍스러운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마을 돌담길.
    옛 선비들이 학문을 닦던 마을 문화의 요람 ‘영사재’.
    야동마을에 세워져 있는 송덕비.
    김정식 옹이 계양서당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조선 전기 성리학자 김굉필 선생 후손들

    500년 대 이어 살아온 서흥김씨 집성촌


    항일독립운동 기념비·백성구제 송덕비 등

    마을 곳곳 충렬·효행·애민의 발자취 남아

     
    마을 벗어나 울창한 노송길 접어들면

    선비들 모여 학문 닦던 행동재·영사재도



    창녕군 고암면 계상리 계팔마을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인 김굉필(1454~1504) 선생의 자손들이 대대로 살고 있는 전통적인 마을로 500여 년의 역사를 품고 있다. 계팔마을은 서흥 김씨의 집성촌으로 창녕읍에서 교동고분군을 거쳐 차로 약 10분 거리에 있어 읍소재지와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지만, 조선시대 시골마을에 온 것처럼 고색창연한 기와집과 돌담 등이 어우러져 여전히 고풍스러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마을 어귀에는 마치 수문장처럼 마을 표지석과 계팔 농암교(桂八 籠岩橋) 표석이 버티고 있으며, 물슬천 변에는 농바위가 지키고 있다.

    이 마을은 1506년 한훤당(寒暄堂) 김굉필 선생의 둘째 아들인 김언상 선생이 터를 잡아 자손 대대로 살고 있다.

    마을 앞은 화왕산과 열왕산 사이에서 발류해 내려오는 물슬천이 서쪽으로 흘러 우포늪(소벌)으로 접어든다. 풍수에 문외한인 사람들도 배산임수의 마을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부흥산을 주산(主山)으로 팔봉(八峯)이 좌청룡(左靑龍)을 형성하며 내려온다고 해서 마을 이름을 계팔이라고 정했다고 한다. 또 계수나무가 8그루 있다고 해 계팔마을이라고도 전한다. 이 마을에서는 8명의 대과 급제가 난다고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후손 중, 1800년을 전후해 대곤, 치곤, 석희 공 등 3명의 문과 급제자가 나왔다고 전한다. 참봉 이남, 야헌, 만오, 계은 공 등 학덕 높은 선비들이 배출됐으며, 온 마을의 칭송받는 효자 규철 공과 근검으로 한때 최고의 부를 쌓았던 규수 공 등 도덕과 문한(文翰)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자그마한 다리를 건너 넓은 들판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서자 수백 년은 됐음직한 기와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산자락에 고즈넉이 자리잡고 있어 고가의 운치가 더하다. 이 마을은 다른 마을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많은 정자와 재각들이 존재하며, 대표적으로 행동재, 영사재, 계산재, 계양서당, 벽계정, 관수정, 계팔정 등이 있다.

    돌담길을 따라 자리 잡은 고택의 운취에 빠져들쯤 애국지사인 간취 김희봉 선생의 기념비와 안내문을 만나게 된다. 선생은 한훤당 선생의 15세손이며, 1919년 3·1운동 때 세칭 ‘파리장서사건’에 가담해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경상도 유림들로부터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의 서명을 받아내는 임무를 수행하다, 일본 헌병에 적발돼 고초를 겪었다. 이후 3·1운동 1주기를 즈음해 거족적인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하고, 독립선언문 제작과 수천부 등사(謄寫)를 해 창녕 장날을 기해 살포하려다 일경에 발각·체포돼 다시 고초를 치렀다고 한다. 선생은 수감생활을 하면서도 고고한 기풍과 절개를 버리지 않았으며, 석방 후 후유증으로 별세했다. 정부는 199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산자락과 맞붙은 마을 끝까지 발걸음을 옮기자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한문을 가르치던 계양서당이 눈에 들어온다.

    계산 김희달 선생이 일제 강점기에 수많은 제자들에게 유학을 가르친 곳이다.

    계산 선생의 손자인 김태인 옹이 조부의 탄신일을 기점으로 전국의 효자, 효부를 조사해 표창과 상금을 내리며, 참석하신 손님에게 경객지도(敬客之道)를 다하는 칠접반상을 독상으로 차리는 등 아름다운 미덕과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제자들과 뜻있는 유림들도 계산 선생의 탄신일이 있는 주의 주말·휴일에 향례를 올리는 행사를 해마다 연다고 한다. 전통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은 요즈음 현 시대에 부모에 대한 효를 더욱더 계승 발전시키고 있는 곳이다.

    계산 선생의 5촌 조카이며 마을의 최고령자인 김정식(95) 옹은 “이 서당을 거쳐간 인재가 1000명 이상 될 것이다”며 “40여 년 전쯤 계산 선생이 돌아가시고 난 후 10여 년간 명맥을 유지해오다 1980년대 중반부터 서당에서 글을 읽는 소리가 사라졌다”고 아쉬워했다.

    계팔마을에서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야동(冶洞)이라는 표석이 나온다. 마을과 골짜기의 형상이 불미, 즉 풀무와 같다고 해 불밋골이라 했는데, 야동(冶洞)은 그 한자 이름이다. 야(冶)는 대장간을 뜻하는 한자다.

    여기서 자손이 번창해 계팔과 창락 등 여러 곳으로 진출했다고 한다.

    울창한 노송길로 접어들면 이 마을 문화의 요람인 행동재(杏東齋)와 영사재(永思齋)가 있다. 옛 선비들이 학문을 닦으며, 글 읽는 모습이 느껴지는 듯하다.

    행동재 밑에는 수령이 430여 년 된 은행나무가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한훤당의 외증손인 한강 정구(鄭逑) 선생이 선조 13년 서기 1580년 4월에 창녕 현감에 부임한 후, 진외종숙(陳外從叔)인 성재(惺齋) 김립(金立) 선생을 틈틈이 문안 인사드렸을 때 심었다고 전해져 내려오며, 성인 4~5명이 안아야 되는 둘레 6.5m 높이 40m에 달하는 아주 큰 은행나무다.

    한훤당의 손자인 성재 선생은 이 노송길을 거닐며 학문에 열중했다고 한다. 그는 1528년 사마시에 급제해 형조정랑 선공감정을 거쳐 통정계에 오르고 퇴계, 남명 등 선비들과 교우를 했으며, 특히 퇴계 선생과 각별한 인연이 있어 한평생 도의로 깊이 사귀고 두 아들을 수학케 했다.

    이곳에는 또 일제강점기 배고픈 주민들을 구제한 규수 공의 은덕을 기리는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규수 공은 계팔마을 서흥김씨 중 가장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헐벗고 굶주림에 지쳐 숙식을 찾아 떠도는 나라 잃은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옷과 노잣돈을 나눠주며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했다. 이런 은덕을 잊지 못해 은혜를 입은 과객들이 뜻을 모아 그 충정을 돌에 새겨 후대에 남겼다고 한다.

    송덕비 등 마을에 세워진 표석은 대부분 한글로 되어 있다. 김희진(87) 옹이 한문으로 되어 있는 것을 풀이해 누구나 알기 쉽게 표석을 다시 만들어 세운 것이다.

    박월산 자락에 자리 잡은 구니서원(求尼書院)은 한훤당 선생의 후손들이 조상을 받들기 위해 300년 전에 세운 것으로 묘각이나 서당으로 사용했다. 1866년 한훤당의 둘째 아들인 감찰공 김언상 선생을 비롯한 3대 4명의 위패를 모시고 서원으로 지었으나 1868년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폐쇄됐다.

    지금의 서원은 1916년에 복원한 정면 6칸, 측면 2칸, 2익공계 팔작지붕집이다. 이 밖에도 경내는 사당, 동재, 서재, 문루, 관리사 등이 있다.

    계팔마을도 갈수록 젊은 사람들을 보기 힘들어져 역사 깊은 마을을 유지하기가 힘든 실정이다. 특히 기와로 된 고택을 고령자들이 관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김태진(73) 이장은 20여 년 전만 해도 80여 가구에 100여 명의 주민들이 거주를 했는데, 지금은 50여 가구 80명 정도밖에 살고 있지 않아, 빈집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어 걱정이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김 이장은 “이런 상황이 10년 정도 이어지면 수백 년 된 기와집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며 아쉬워 했다.

    선비정신과 500여 년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서흥김씨 집성촌 계팔마을. 소중한 멋과 맥을 자손대대로 이어 살아 있는 전통을 유지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물슬천 다리를 건너왔다.

    글= 이종훈 기자 leejh@knnews.co.kr

    사진= 성민건 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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