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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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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의 마을 아, 본향! (6) 하동군 북천면 직전마을

강성 문씨 문중 300년 유학 가풍 면면히 흘러

  • 기사입력 : 2013-02-12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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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식으로 다시 지어진 직하정.
    마을 돌담길.
    직하재의 6세 손인 황남 문영빈의 생가
    이명산 정상부 암벽에 조각돼 있는 마애불상.
    이명산 석불사지 옆에 있는 시루떡 바위.
    강성 문씨 후손들이 300여 년째 모여 사는 하동 직전마을. 이 철길을 2㎞가량 따라 가면 코스모스축제로 유명한 북천역이 나온다.



    문익점의 10세 손 ‘직하재’ 문헌상 선생

    출사 뜻 접고 정착해 직하정 짓고 후학 양성

    후손들도 가르침 이어받아 학문에 정진

     
    마을 뒤 이명산엔 통일신라시대 유물 눈길

    마을 소나무숲은 ‘아름다운 숲’ 우수상 빛나

    인근 지역 코스모스축제·한우단지 가볼 만


    몇 년 전부터 매년 가을이면 코스모스 축제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하동군 북천면이다. 이곳 북천역에서 하동읍 방향으로 2km 정도 가다 왼쪽편으로 보면 크지 않은 마을이 나오는데 직전리 직전(稷田)마을이다. 마을 뒤편을 보면 해발 360m의 계명산(鷄鳴山)이 솟아있고, 계명산 너머는 더 높은 이명산(理明山·570m)이 버티고 서있다. 이명산에서 계명산 쪽을 보면 문필봉처럼 뾰족하게 생겨 학자들이 많이 나올 풍수지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또 계명산과 이명산 사이를 가로질러 가면 봉명산 아래에 많은 얘깃거리를 간직한 사천 다솔사가 위치해 이 마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마을 앞에는 하천이 흘러내리면서 주변으로 논이 넓게 펼쳐져 오랫동안 농사로 가업을 잇고 있는 우리네 전통 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외형상 평범한 마을이다. 지난 2003년 발간된 북천면지편찬위원장을 맡았고 현재 직전마을에 살고 있는 삼우당 문익점의 19대 손인 문병이(79) 씨의 도움으로 이 마을의 내력 등에 대해 들어봤다.


    ◆ 직하정 통해 유학 가르침 이어져

    북천면 일대는 이미 가야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지만, 현재의 직전 마을이 형성된 것은 300여 년 전인 조선조 숙종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문병이 씨는 “이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330여 년 전인 조선 숙종 5년(1679년)에 직하재 문헌상(1652~1722)이 처음으로 이사와 정착한 후 강성문씨 집성촌이 형성되었다”고 밝혔다.

    강성문씨 후손으로 삼우당 문익점의 10세 손인 직하재가 고향을 버리고 이곳으로 옮겨온 것은 벼슬길에 진출할 뜻을 단념한 후 한적한 곳을 찾았기 때문이다. 일찍이 가정에서 가학을 계승해 심경, 근사록, 소학, 주서, 한서 등에 통달했던 그는 배안골 산 중턱에 집을 지어 직하정이란 현판을 걸고 후학을 양성하게 된다. 당시 직하정은 북천면 일대에 남아 있는 지암서소(止岩書巢), 경현당(景賢堂), 신천서당(新川書堂)과 함께 서원에 준하는 사학의 교육기관이었고 문씨들의 가숙(家塾)이 됐다.

    그는 또 향약을 시행하면서 향풍을 진작시키고 흉년을 만나면 기아에 허덕이는 빈민들의 구제에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아 숙종 21년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로 임명된다. 하지만 그는 조선 경종 때 신임사화로 화를 당하고 만다.

    직하재가 사화로 죽으면서 가르침을 이어 받은 후손들은 출사의 길을 자제하고 학문에만 정진하면서 크게 알려진 이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직하정에선 근세 들어 경학에 통달했던 유암(有菴) 이후림(1893~1972)이 젊은이들을 모아 놓고 유학의 경전을 가르치면서 서구사상 일변도로 치닫는 세태를 경계했다. 그는 마지막 유풍을 일으켜 국학을 바르게 정립하려고 5년여 동안 애쓰다가 6·25전쟁으로 인해 직하정을 떠나게 되었다. 직하정은 근세 최후까지 유암의 제자로 제헌 국회의원을 지낸 인석 강달수, 효당 최범술 등과 같은 인물들이 출입하면서 시대를 걱정하고 토론했던 구국의 유적지이기도 하다. 지금은 문병이 씨와 종회장을 맡고 있는 문병일 씨 등이 선대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직하정은 처음 들어선 곳에서 다섯 번을 옮겨 현재는 마을의 중앙에 위치해 있는데 지난 6일 찾았을 때는 현대식으로 지어져 옛 모습을 찾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직하재와 유암의 가르침이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 마을은 과거 160가구에 500여 명이 있었던 적도 있지만 현재는 70가구에 160여 명으로 많이 줄어든 상태다. 과거 강성문씨 집성촌이었지만 현재 청주한씨도 일정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해방 이후 이곳에서는 문정일 전 해군참모총장, 문병집 전 중앙대총장, 문병인 이화여대 의대교수와 문여황 경남과학기술대 교수, 문병철 한국전자통신연구소 연구원, 문병연 KAI 임원 등 사회 각계 각층에서 주요 활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배출됐다.


    ◆ 독립운동 인사 눈에 띄어

    이 마을에 들어서 조금 올라가면 삼우당 문익점의 17세 손이자 직하재의 6세 손인 황남 문영빈(1891~1961)의 생가가 나온다. 현재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 있지만 일제시대 이전에는 500석 부자로서 사랑채 앞과 주변으로 객사만 5~6채에 이르는 등 집이 모두 7~8채였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황남의 며느리인 박정자(85) 여사 혼자 머물고 있는데 주변의 오래된 나무와 넓은 집터만이 과거의 옛 모습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과거 잘나가던 이 집안이 가세가 기울게 된 것은 황남의 독립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현재 정확한 사료는 남아있지 않고 주변의 증언에 따르면 황남은 1910년 경술국치 때 중국 상해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의 전신인 배달학회(주석 이시영, 외교부장 여운형)에서 활약하다가 자금조달책으로 귀국해 1919년 백산 안희제가 운영하는 백산상회 설립에 참여한다. 당시 문중의 위토 등 전래가산 전답 1000여 두락을 한성은행에 담보로 잡히고 주식 500주의 대주주로서 백산상회의 감사역으로 자금조달에 나서다가 망하면서 가산을 잃게 된다.

    황남은 이 외에도 많은 활동을 했지만 당시 시대상 모든 것이 비밀리에 진행되면서 나중에 아무런 공식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지 못해 유족들은 안타까워하고 있다.

    황남과 함께 문익점의 19세 손인 은파 문공학(1897~1946)은 1919년 3·1운동 때 수천의 군중들을 모은 후 당당하게 대한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크게 외쳤다. 이후 면 주재소와 하동경찰서를 습격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3년간 옥살이를 하다가 출옥한다. 마을 앞에 그의 사적비문이 1997년 세워졌다.


    ◆ 이명산 마애석조 여래좌상 등 주변 문화재

    마을에서 뒤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이명산 중턱에는 자연 암벽을 다듬어 작은 방을 만들고 그 자리에 불상을 조각한 마애석조여래좌상(磨崖石造如來坐像) 이 있다. 경상남도 문화재 제136호로 지정된 이 불상은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머리 아랫부분은 비바람에 쓸려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려운 상태지만, 얼굴 모습은 분명하게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래좌상이 있는 곳에서 산 정상부로 가면 과거 석불사(石佛寺)가 있던 절터(경상남도 기념물 제28호)가 나온다. 주변에선 보기 드문 석굴사원이었던 이곳에는 석굴 2기와 암벽에 조각된 마애불상이 있다. 석굴은 벽과 천장이 모두 무너져 원형을 잃어버린 상태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불상이 있는 석굴은 다솔사 보안암의 석굴보다 규모가 크다. 학계에선 이곳 석굴이 경주 석굴암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석불사지(일명 개금사지) 옆에는 시루떡 같이 층을 이루고 있는 거대한 시루떡 바위도 눈길을 끈다.

    또 석불사지에는 기단의 일반형 3층 석탑(경남도 유형문화재 제129호)이 있었는데 현재는 진교면사무소에 안치되어 있다.

    이 외에도 직전마을 안에 울창하게 서 있는 소나무숲은 2011년 산림청 생명의 숲 가꾸기 국민운동이 주관한 ‘제2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피밭이란 의미에서 이름이 붙여진 직전마을. 오랫동안 유학의 가풍을 드날렸지만 현재는 코스모스축제와 한우단지 등으로 새로운 명성을 되찾고 있는 곳. 앞으로 전통과 현재가 어떤 식으로 조화를 이루며 발전할지 기대된다.


    글= 이명용 기자 mylee@knnews.co.kr

    사진= 성민건 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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